산에는 꽃이 피네 (소책자)
법정스님 지음 / 동쪽나라(=한민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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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행자가 있었다. 수행하는 데 쥐 한 마리가 계속 얼쩡거렸다. 그래서 쥐를 쫓으려고 고양이를 샀다. 고양이에게 줄 우유가 필요해서 암소도 샀다. 암소를 돌볼 여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결혼했고 아이를 가졌다. 그 여자와 아이가 살 집이 필요해서 집을 지었고,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는 가만히 앉아 수행할 수 없었다.

어리석은 이 수행자에 대한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유는 소유를 낳는다. 이 집보다 더 큰 집으로 이사가면 가구를 바꾸고, 가전제품을 더 사야지 하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고 나면 그 집과 그 물건들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벌이가 적어질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이 덫에 걸려 들기만 하면 우리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몇 십 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세금도 안 내고, 입에는 늘 돈이 없다는 말을 달고 지내면서 한 끼밥을 겨우 먹는 사람의 돈을 몰인정하게 빼앗는다. 그 사람은 본래 나빠서 그런 것인가? 아니다. 바로 소유의 덫에 걸려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덫인 줄을 모르면 계속해서 모자라고 모자란 돈을 버느라 무슨 짓이든지 하려고 하게 된다. 그 시작은 쥐 한 마리와 같이 사소한 것이지만 마음이란 놈은 얼마나 광대한지 곧 마을을 채울 소유물을 필요로 하게 된다.

법정 스님이 늘 경계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스님께서는 감옥에 갇힌 줄 알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벗어나고자 하는 빠삐용이 되어야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고 하신다. 무엇으로부터 갇혀 있는가? 바로 욕망이다. 어쩌면 그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해 수행이라고 말하기보다 스님은 자연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갖고 살아가는 동물들처럼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 자연과 같이 침묵하는 것, 자연 속에서 홀로 있을 때 샘솟는 존재의 갈망들에 대해 이야기 하신다. 모든 여분의 것은 부자유를 부른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와라. 그러려면 마음을 비워라, 맑히라...

자기 마음을 맑히라니 어떻게 맑힐 것인가. 마음을 비우라니 어떻게 비울 것인가. "관념적인 것을 갖고는 마음이 맑아지지 않는다. 물론 참선이나 염불이나 기도를 지극히 해서 마음을 맑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에 불과하다. 자칫하면 관념화되기 쉽다. 현실적으로 선행을 해야 한다. 선행을 함으로써 저절로 우리들 마음이 열리고 맑아진다. 마치 시절 인연이 와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그렇게 맑아진다"(p.195)

스님은 그 선행의 일환으로 "맑고 향기롭게"에서 활동하신다. 소리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게 아주 사소한 일부터 마음으로 하신다. 아주 작은 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 마음, 아주 사소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는가, 그저 한 사람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스님께서 "한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면 그 둘레가 점점 맑아져서 마침내는 온 세상이 다 맑아질 수 있다"(p.196)고 말씀하신다. 한 사람의 마음을 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그런 생각이 아닌가 싶다. 한 사람 중히 여기는 마음이 소외된 이웃을 둘러 보게 하고, 소수의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고, 굶주리는 한 사람의 손을 잡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 읽는 내내 산 중턱에 걸터 앉아 스님께 이야기 듣는 기분이었다.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을 보니 내가 사랑하는 어린왕자를 사랑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또 이 책을 보니 내가 그 삶을 음미하고, 음미했던 성프란체스코를 친구처럼 여기신다. 사실, 어린왕자나 성프란치스코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나는 굳이 공통점을 발견해 기뻐하며 스님과 가을 바람을 맞고 있다.

훌쩍 떠나고 싶은 가을이다. 단풍 때문도 아니고, 하늘 때문도 아니다. 어쩌면 바람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서늘하고, 헐벗게 하는 바람이 내게도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것들은 가라, 비본질적인 것들은 가라. 이 바람에 날아가 버려라. 나무가 잎을 버려 제 안으로 침잠해 가듯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피워낸 크고 넓은 이파리들"(기형도의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중에서)은 이제 가라. 나는 그만 행복해져야 겠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홀가분한 마음, 여기에 행복의 척도가 있"(p.97)으니 그 불필요하고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훌쩍 떠나고 싶은 게다. 떠나야 겠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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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책자는 절판되었지만 같은 출판사에서 크기를 다르게 해서 지금도 출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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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14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일찍 일어나 문안인사 드리려 왔는데, 리뷰가 있네요.(브리핑의 압박!)
오..알았어요. 한 구좌 튼당게요..흐흐..
언젠가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선생님이 우스운 농담에 입을 벌려 웃으시는 겁니다. 그때 살짝 그 분의 충치를 보고 말았는데, 어떤 인간적인 연민 같은 게 느껴지더라구요. 평범하고 가난한 소시민들..이런 소시민들에게 가질 수 없는 물질은 너무 많아 보이는데, 자본은 자꾸 그것을 소비하라 유혹하쟎아요. 가끔 넘치는 활자가 머리속을 헝클여놓는 바람에 좀 책까지도 싫어지는 날에는 저도 훌쩍..훌쩍..콧물이나 닦으며..(바람을 느껴보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가여운 이 내 신세...)

이누아 2005-10-14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이 댓글에 답 달다 페이퍼로 옮겨 갑니다. 페이퍼에서 봐요.

icaru 2005-10-14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볕 좋은데 앉아서 가을 바람 맞고 싶다 합니다... 옆에 누구라고 괜찮으니...!

이누아 2005-10-14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몸살은 다 나으셨나요? 몸살은 다 낫고 바람 맞으셔야 됩니다. 부디 몸조심!!

달팽이 2005-10-1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자리에 함께 둘러앉아 바람맞고 싶군요..

로드무비 2005-10-14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낄게요.^^

혜덕화 2005-10-14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저 자신부터 더 나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을 줄이고 있습니다. 막상 예전엔 더 좋은 제품으로 바꾸지 않으면 불편할 것 같던 마음이, 오히려 헌 것을 깨끗하게 관리하고 쓰는 동안 새것을 바꾼 것보다 더 마음에 평온을 주더군요. 소유를 줄이는 것, 노력하고 있지만 어렵군요.

이누아 2005-10-1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모두 둘러 앉아 가을 바람을 맞고 있는 듯하네요. 비본질이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날려 보내는 바람 앞에 앉아 있는 우리들...괜스레 흐뭇하군요. 혜덕화님, 복돌님도 같이 앉으세요~

혜덕화님, 저는 어느 때보다 소유의 덫에 걸려 들기 쉬운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님이 이 소비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먼저 실천하고 계시는군요. 저도 잘 할 수 있을까요?

비로그인 2005-10-14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푸덕!! 쿵~ ㅡ_ㅡ;;
옙! 잘 하실 수 있을 낍니다! 아, 혜덕화님께 물어보셨던 거구나..

이누아 2005-10-15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고맙습니다. 힘이 됩니다. 잘할께요.^^

big_tree73 2005-10-22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을 맞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 바람이 몸에 닿으면 무슨 호르몬이 발생해서... 이 기억력은 어디 쓸데가 없다... 그러고 생각해보면 바람을 맞을 때는 항상 기분이 상쾌해졌던것 같아. 이 가을, 바람맞고 상쾌해져서 훌 훌 떠나보자꾸나. ^^

이누아 2005-10-23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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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뒷 표지에는 작가가 왜 이 글을 썼는지에 대해 쓴 말이 적혀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무시하기로 한다. 그의 의도 역시 섬을 지배하려 했던 초기의 로빈슨처럼 인위적이며, 이 책의 자유로움을 앗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를 쓴다. 또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책 뒤편에 놓인 작품해설도 읽지 않는다. 내 마음대로, 나오는 대로 하겠다. 나는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겠다. 모든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므로, 또한 우주이므로. 로빈슨이 자신이 스페란차와 합일되는 듯이 느끼듯이 나는 이 이야기와 한 덩어리가 되어 간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대구 외곽에 있는 광덕사라는 절에 간 적이 있다. 그날은 무슨 행사가 있어서 공부도 하고, 거문고 연주도 듣고, 초를 들고 탑돌이도 하고, 캠프파이어도 했다.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는 흥분되고 기뻤다. 캠프파이어라는 것도 처음 해 봤다. 그 불가에서 스님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불었다. 어떤 작은 틈이 있어서 서늘한 바람이 내 따뜻한 행복 언저리로 불어 오고 있었다. 뜨거운 불가에서 느낀 그 서늘함을 나는 곧 잊어 버렸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 때가 되어 내 내부에 있는 틈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 틈은 어둡고 서늘해서 모든 의미들을 삼켜 버렸고, 나는 "무의미"에 갇힌 듯한 답답함과 그 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을 술로 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 틈은 점점 커져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커다란 틈 앞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틈 앞에서 이제 그 틈 속으로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이 이야기를 나는 단편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그려 내려고 시도까지 했었다.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이 틈은 로빈슨이 그의 배에서 스페란차로 이동하는 그 순간이기도 하며, 그가 점차 한 인격체로서 스페란차를 받아 들이기 시작할 무렵 어둠 속에서 걸어 들어가는 동굴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게다가 그가 진흙 속에서 발가벗고 누워 한없이 늘어질 때, 그리고 그 진흙 속에서 나왔을 때의 후회감 역시 비슷하다. 무의미가 엄습하는 때에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계획적인 삶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용솟음친다. 그래서 나는 로빈슨이 진흙에서 일어나 성서를 꺼내 읽고, 농사를 짓고, 법률을 정하고 하는 계획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 까닭을 알 수 있다. 그런 회의와 불신은 축 늘어진 어깨와 막막함을 가져다 줄 뿐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기억할 수 있는 과거와 그 유물들로, 누구나 살아왔다고 여겨지는 그 삶으로 얼른 돌아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자가 필요했다. 첫번째 타인은 하느님이자 성서였다. 그는 권위 그 자체인 하느님의 말씀의 찌거기를 따라 살기로 한다. 거기에서 부여되는 권위의 한 자락을 자신에게 부여하고, 물시계를 통해 삶을 통제하려 한다. 두 번째 타인은 항해일지였다. 그의 항해는 끝난 지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저 일기라고 하지 않고 항해일지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유지시킨 채 글을 쓴다. 어느 수필가의 말처럼 "모든 쓰여지는 것은 보여지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일지는 나중에 그 글을 읽게 될 타자(그것이 시간이 지난 후의 자기 자신이 된다 할지라도)에게 보내는 편지와 같은 것이다. 그 세 번째는 바로 스페란차였다. 그는 그녀를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다가 어머니로, 연인으로 변신시킨다. 왜냐하면 그녀만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명을 탄생시키고 있었으므로 그도 그의 생명을 낳기 위해서는 하느님이나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타자보다는 그녀가 필요했다. 살아 있는 가축이나 그 개 텐과 같은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었으나 그들을 타자로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권위나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하며, 끝없이 착하고 다정하신 하느님과 언젠가 만나게 될 인간과 자신을 재창조할 수 있는 여인, 그리고 생명의 바탕을 이루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물시계까지 갖춘 그는 완벽했다. 그런 그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야 했지만 스스로 진흙으로 돌아갈까봐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까 두려웠던 것이며, 이 완벽함 속의 틈을 불쑥불쑥 느꼈을 것이다. 틈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릴 용기가, 아닌 그런 생각조차 불경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그것을 무너뜨릴 존재가 필요했다.

 

그 존재는 방드르디였다. 저자는 방드르디가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한 모양이지만 나로서는 동의할 수 없다. 여전히 이 책의 주인공은 로빈슨이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의 틈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다. 로빈슨이 스페란차에 온 초기에 발견한 그 환상의 배와 같은 것이다. 그 배 위에 서 있는 여인이 죽은 자신의 누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본 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던 바로 그 장면말이다. 하느님의 권위 아래 질서를 창조했으나, 그의 딸까지 피어나게 했으나 오래도록 홀로 있었던 그는 환상의 방드르디를 만나게 된다. 로빈슨이 총을 들고 죽이려고 했던 바로 그 존재, 권위로부터, 과거로부터 벗어난 그 존재는 로빈슨 자신이었다. 기막힌 우연-그러나 나는 그것을 로빈슨의 속마음, 혹은 무의식이라고 생각한다-으로 살아남은 그 존재는 금요일이다. 예수가 죽은 그 금요일. 그러므로 로빈슨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과거와 권위를 죽이러 온 존재였다. "쌍둥이가 달 속에서 태어난다. 서로 마주 붙은 그들은 마치 수백 년 동안의 잠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움직인다"(p.287)라는 구절에서 보듯 그들은 애초부터 하나였던 것이다.

 

애초부터 하나였던 그를 만나는 순간, 그는 틈에서 부는 바람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익혀간다. 계획된 삶 바깥의 틈 쪽으로 얼굴만 돌리면 바로 진흙 속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는 오류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것이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항상 우위에 서 있어야 할 것 같았던 자신을 버려야  했으므로. 스페란차와 그 안의 모든 것은 그의 소유였고, 그의 지배 하에 있었다. 그러나 방드르디는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그것들과 교감하고, 히히덕대고 있었다. 아무 노력도 없는 듯 보였다. 그것이 로빈슨에게 불타는 질투심을 가져다 주었고, 방드르디에게는 매질을 당하게 했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는 태어나서 모든 사회적 활동을 익히지만 죽음을 익히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갑작스런 것이기도 하다. 마치 그가 일궈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듯이. 방드르디는 죽음이다. 애써 외면해 왔던 죽음, 동시에 갈망해 왔던 그것. 그것의 자연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어서 어떤 상황과 마주쳐도 놀라지 않는다. 심지어 화이트버드호에 들어갔을 때조차 그는 히히덕거리며 그곳에 원래 있었던 존재처럼 행동한다.

 

이 책에서 그런 자연스러움에 대한 질투는 부러움으로 변해가고, 결국 문명과 계획된 삶을 암시하는 하얀 새-화이트버드호- 대신 검은 독수리가 사는 곳에 머물기로 한다. 이제 그는 겨우 죽음, 혹은 틈에 익숙해지고 있었으므로 삶이 만들어낸 익힌 음식을 토해냄으로써 완전히 스페란차에 정착한다. 그러나 방드르드는 떠난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인 그를 자신 속에서 살려냈기에 분리된 그가 이제는 필요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떠나도 된다. 그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누구도 곁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이므로 어디에 가도 그의 존재방식은 자연 그대로일 것이다. 그러니 그를 염려하지 마라. 이제 남겨진 로빈슨을 보자. 그에게 또 하나의 존재가 생성되었다. 그것은 화이트버드로부터 버려진 어린 로빈슨이었다.

 

이전에 그는 삶 쪽에 서 있었다. 그가 갈망한 죽음은 그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과 하나되기 위해 그의 성기로 파종하며 "대지와 혼인한 자가 죽어 잠들다"(p.155)는 표현처럼 은밀한 자신만의 성, 혹은 죽음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죽음 혹은 방드르디는 이제 한 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새로운 생명, 어린 로빈슨이 그의 곁에 남았다. 그는 자연스러운 삶과 죽음의 조화로 존재하면서 어린 로빈슨을 보살피지 않고 던져 둘 것이다. 어린 로빈슨의 이름은 목요일이다. 어린아이들의 일요일, 그는 로빈슨이 자신이 노인인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 아니 노인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 언제나 어린 아이인 채로 존재하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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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10-05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 근사한 서평입니다.
inua10님!^^

비로그인 2005-10-05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다른 동료들이 듣거나 말거나, 박수를 치고 있습니다. 우오우오우오, 쫙쫙쫙!
전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은 것이 아니었군요. 이렇게 다양하고 멋진 해석이 가능할 줄 몰랐어요. 아니, 해석하고 싶었는데 제 무지와 게으름, 닿을 수 없는 능력이 완강히 버티고 있었던 거에요. 부끄럽습니다!! 이 주의 마이 리뷰감이구만요!!

2005-10-05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5-10-0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그냥 이누아라고 부르세요. 영문과 숫자를 쓰려면 불편하잖아요. 님이 근사하다고 하시니 우쭐해집니다.^^;;

제가 이 책을 읽게 된 건 전적으로 복돌님 때문이에요. 님의 리뷰를 읽고 읽게 된 책인데 이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는 표현을 하시다뇨? 전 책 읽는 내내 복돌님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직도 할 말이 많아요...이를테면 스체란차의 성적 이미지로 본 로와 방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는데 몸도 지치고, 불쑥 튀어나오는 생각들을 진정시키기도 어렵고...어쨌든 재미있었어요. 다 님 덕분이에요.

숨어 말씀하시는 분, 제가 오히려 님을 알게 되어 기쁘고 고맙습니다.

2005-10-12 16: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5-10-13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리뷰 기다릴께요^^
 
참선일기 - 잠든 나를 깨우는 100일간의 마음 공부
김홍근 지음 / 교양인 / 2005년 5월
평점 :
절판


알라딘에 적힌 리뷰의 찬사를 보고 선뜻 읽어보고 싶었다. 고맙게도 알라딘에서 알게 된 벗이 이 책을 선물해 주셨다. 감사드린다.

저자는 100일만 참선수행을 한 사람이 아니고, 그 전에도 계속 해오던 사람이다. 그러다 현웅 스님이라는 선지식을 만나고부터 자신의 공부에 어떤 변화를 느낀 것 같다. 그렇게 가까이, 매일 점검을 받을 수 있는 선지식이 있다는 것은 분명 커다란 복이다. 그 변화의 기쁨으로 이 글이 시작된 것 같다.  

저자가 한 선체험이나 선체험 이후 저자가 가진 태도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도 이런 상태로 며칠만 가면 펑 하고 뭔가 터질 것 같은 적이 있었다. 죽비소리가 귀찮게 여겨졌다. 나를 앉은 채로 두라! 그리고 집에 돌아갔는데도 그런 상태가 계속 되었다.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속해 있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나 자고 난 후, 사라졌다! 그래서 용맹정진이나 오매불여 같은 상태가 요구되는가 보다 생각했다. 자꾸 그 상태로 가고 싶었다. 그 상태가 좋았다. 당시는 무여 스님을 뵌 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라 스님의 법문 테잎을 늘 듣고 있었는데, 스님께서 어떤 체험을 하더라도 거기에 매이거나, 다시 그 상태를 기다리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체험을 도반 보살님께 했더니, 그런 체험은 누구나 다 하지만 그 체험에 묶이지 말고, 그 체험을 흘려 보내라고 하셨다. 그런 스님과 도반 보살님들 덕에 삼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체험은 너무 강렬해서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저자 역시 자신의 선체험 상태로 "되돌아가거"나 그 상태를 자신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저자의 대단한 점은 참선수행을 하면서 글을 쓴 것이다. 화두가 순일할 때(그런 일은 잘 흔하지 않았지만)는 글이 잘 써지지가 않는다. 자신이 충만해서 다른 것을 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분은 글자로 적어서 다른 수행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역시 이 분도 충만할 때는 쓸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스승의 말이 이 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 책은 [선방일기]가 아니라 [참선일기]라 그런지 참선에 대한 그의 열정이나 생각에 집중되어 있다. 간간이 수행이 생활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또 참선이 생활이 되는 그런 수행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예는 별로 없다. 참선으로 인해 마음이 변하고, 생활이 변화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핵심이지만 그것은 이야기는 아니다. 이야기는 구체적인 어떤 것을 요한다. 그런 것들은 아주 간간이 드러난다. 전시회를 가거나, 영화를 보거나, 자연을 보거나, 무엇을 하거나 참선일기 안에는 그 모든 것이 선수행과 관련하여 적혀 있다. 모든 것이 비유인 듯. 아직 그 자체가 선은 아니고, 선수행의 방법으로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 점이 아직 생활이 되지 못하고, 생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게다가 참선일기가 되어서 그런지 수행과 여행과 법문이 있지만 홀로 있는  것만 같다. 우리가 모두 상호의존 속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이 덜 든다. 그가 그것을 이야기로는 강조하고 있다 하더라도. 또 매일의 느낌과 수행이 적혀 있었지만 이 글이 아주 솔직하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솔직해지려고 애쓴 것은 같은데...그냥 내 느낌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행의 과정을 글로 써서 객관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독특한 경험을 했거나 변화가 왔을 때, 아니면 수행이 처절했을 때는 적기가 쉬울지 모르지만 일상에서의 수행은 반복이다. 잠이 왔고, 망상이 일었고, 다리가 저렸고, 관계 속에서의 반성을 했고...저자는 자신의 수행을 통해 몇 가지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 참선수행을 하는 이들과 체험을 공유한다는 점, 선지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 수행이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 수행의 근간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 그리고 그런 근거들을 가지고 우리를 참선수행으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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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6 16: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5-09-06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리가 저리다, 잠이 왔고, 망상이 일고..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내 자신이 변화할 수 있다는 점..참선의 리얼리티가 살아있네요.^^

이누아 2005-09-06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그 리얼리티가 바로 이 책의 최대 장점이에요.

니르바나 2005-09-08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날개에 있는 저자의 약력을 보고 한 권 구입했습니다.
제가 스승으로 모시는 다석선생님으로, 도반이 지었다면 틀림없겠지 하고요.
아껴 읽는다고 앞부분만 보고 책더미속으로 쌓여 들어갔는데
이누아님의 리뷰를 보니 다시 꺼내 읽어야 겠군요.

이누아 2005-09-1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르바나님, 재가자의 수행인지라 그런지 자극이 많이 되는 책입니다.

반조 2005-10-23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서평 잘 읽었습니다. 책상물림의 저와 일상 속에서 수행하시는 이누아님의 차이가 서평의 차이를 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이누아 2005-10-25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녀 가신 줄 몰랐어요. 님이 소개하신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를 주문했어요. 그 책에서 저도 님처럼 보석을 발견하기를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반조 2006-08-27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 님, 이제 이누아 님의 서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아요. 언제나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달라이 라마 죽음을 이야기하다
달라이 라마 지음, 제프리 홉킨스 편저, 이종복 옮김 / 북로드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모든 것을 남겨놓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친구를 위해, 적을 향해 온갖 나쁜 짓을 했었다        - -붓다

이 말씀은 반대로도 여전히 적용된다. 내 친구와 적이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을 남겨놓고 떠날 것임을 알지 못한 채 나는 그들에게 온갖 나쁜 짓을 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죽고 싶었다". 그러나 죽을 수 없는 이유를 3장이나 써서  친구에게 보냈다. 친구의 답장은 "그래도 오죽하면"이라는 한 구절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스스로 죽은 어떤 사람을 비난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죽고 싶었으나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바로 다음 해, 나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한 선생님을 찾아가 "죽음이 두렵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선생님은 "죽음은 네 그림자와 같다. 네 손을 보렴, 죽음과 이미 손을 잡고 있단다"라고 대답하셨다. 그렇게 내게 죽음은 갈망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후 나는 나 스스로가 사고로 두 번이나 죽을 뻔했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봤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끊이지 않았으나 죽음이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내 손을 쳐다본다. 그러면 죽음이 정말 손을 잡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하다. 여전히 가족과 이웃의 죽음 앞에서 그것은 멀리 보내버리고 싶은, 혹은 잊어버리고 싶은 무엇이다. 그래도 그것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모든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내게 죽음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던 선생님은 늘 학교에서 "죽음학" 같은 과목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셨다. 누구나 알아야 하고, 누구나 겪게 될 그런 일인데 말이다. 이 책은 죽음학 과목에 교재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판첸라마의 시를 달라이라마께서 설명해 주시는 형태로 씌어진 이 책은 죽음 바로 그 순간에 할 수 있는 수행에 관한 책이다. 죽음의 순간에 혼란과 공포 때문에 가장 중요한 시간을 우왕좌왕하며 보내지 않도록 돕는 책이다. 실제로 나는 여러 스님들께 죽음의 순간이나 죽음 후 일정 시간 동안 영가들이 아주 예민하고, 맑은 정신상태를 가질 수 있어서 그 시기에 어려운 법문이나 경전을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천도재 때 법문이나 독경을 한다. 어쨌든 이런 중요한 시기에 수행할 수 있으며, 그것이 환생이든, 윤회든, 극락왕생이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시한 죽음의 명상은 내게 그리 재미있지 않았다. 명상이 뭐 재미있는 것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내게 명상은 재미있는 것이다. 이 명상은 빨리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자기 전에 판첸라마의 시를 읽는 것으로 명상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이 책은 죽음 전반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죽음, 그 순간에 관한 것이다. 사실, 죽음은 순간이지만,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은 순간이지만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햇살과 물과 토양에 의존해서 잎이 자라고 열매가 맺은 뒤에 떨어지고, 누군가의 입에 들어가거나 다시 흙에 묻혀 태어난다. 이 책은 전 과정을 바라볼 수 있도록 자극을 주지만 그것들을 자세히 보여주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 때문에 죽음의 "순간"이 익숙하지 않은 내게 이 명상이 확 끌리는 무엇이 아니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여전히 죽음의 순간은 너무나 중요해서 달라이라마는 그 순간에 이 명상을 할 수 있을지 확신을 갖지는 못하지만 그 순간을 그냥 놓쳐버릴까 지금도 매일 수행하신다고 하셨다. 나나 내 이웃 역시 그분처럼 그 순간, 수행의 가장 좋은 시기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런 명상이나 시에 관심을 놓치 않게 된다.

비록 명상에 익숙해지지는 못했지만 이 책 덕에 죽음이 철학이나 사고의 대상이 아닌 체험이며, 수행의 대상임을 더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 더 가까이, 더 전체적으로, 더 내 삶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소걀 린포체의 "티베트의 지혜"를 읽기 시작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삶을 회피하거나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죽음에 대해 담담할 때 삶에 담대해진다. 그런 면에서 이런 책은 삶을 도와주는 책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이런 "觀" 혹은 명상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것이 참선수행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삶에서의 모든 수행은 죽음의 수행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족과 이웃의 죽음 앞에 울부짖음으로 대응하는 전도된 나의 행위가 나와 그들 모두를 바른 견해와 바른 체험으로 이끌 수 있는 행위로 변화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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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9-05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대한 생각이 일단 정리되고 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살면서 중요한 문제는 밀쳐두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어리석게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장단에서 못 벗어나지요.
가끔 이렇게 자세를 가다듬을 뿐......

비로그인 2005-09-0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일이지만 죽음을 앞두고 편안히 생을 마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어요.
제가 늘 이누아님께 감사드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이누아님 만나뵙기 전에는 죽음이 마냥 두렵고 허무했거든요. 그런데, 삶과 죽음이 하나, 라는 사실을 님께 가르침받곤 현재에 보다 충실하고 더욱 즐기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 물론 충실한다고 해서 담박에 개과천선한 건 아니지만요. 그냥 걸러 들으시압! 헤.^^
이런 리뷰는 신문지면 같은 곳에 실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어요.

이누아 2005-09-05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에 관해 생각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했지만 지금처럼 죽음이 "현실적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습니다. 가족의 죽음이 처음이 아닌데도 이런 걸 보면, 끝까지 수행자로서 살고 싶어했던 언니가 준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로드무비님, 우리 모두 아직은 잘 안 되지만 끊임없는 관심으로 사소하고, 불필요한 근심과 염려를 밀쳐 내고, 중요한 것들을 우선 순위로 끌어 당겨요!
복돌님, 님에게 그런 여유가 분명 생기실 거라는 믿음이 일어요. 그리고 가르침이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저 스승들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지요. 저야말로 님에게서 어떤 따뜻함을 느낍니다.

혜덕화 2005-09-05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변에서 거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글을 읽어도 그것은 내게 <관념>이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끔, 내가 죽을때는 거추장스런 옷을 벗듯이 내 몸을 벗어나야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이유가 옷을 벗듯 내 몸을 벗는 것, 나뿐 아니라 내가 아는 모든이가 그렇게 되는 것이 내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누아 2005-09-0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님의 댓글에 대해 잔뜩 대답을 했는데 어쩌다 갑자기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저도 님처럼 제 자신과 제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이웃과 세계가 피하고 싶어하는 고통과 죽음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알아차리게 되기를 발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무도 안 읽었지만 했던 말 또 하는 게 민망하군요. ^^

2005-10-12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유, 아름다운 모험
브랜든 베이스 지음, 박인수 옮김 / 인바이로넷 / 2005년 1월
평점 :
품절


고무풍선처럼 감정은 탱탱해져 가고 있었다. 언니의 49재가 끝나갈 무렵부터 폭발 직전이었다. 아니 안에서는 서너 번은 벌써 폭발하고도 남았다. 그렇게 화가 났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지만 49재 기간 동안 너무 침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나 싶기도 했다. 어쨌든 화난 나를 자각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탱탱해져서 조금만 더 불면 펑 터져 버릴 것 같았지만 시어머님 생신도 있고 해서 휴가를 갔다. 시댁 모임을 이틀 갖고 나머지 휴가는 친정 식구들과 계곡에서 보냈다. 거기서 친정 오빠는 거의 애걸하다시피 이 책을 읽어 보라고 했다. 평소 명상에 관심이 있는 내가 이 책의 가치를 알아 볼 거라고 하면서.

오빠는 이 책을 산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이 책의 프로그램을 함께 할 파트너를 만나지 못했다. 이 프로그램 앞에는 이 책을 꼭 다 읽은 후 프로그램을 진행하라고 되어 있는데 책을 준 사람 중에 아무도  이 책을 다 읽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 만했다. 첫 느낌은 쉽고 얉게 보이는 그런 명상류처럼 보였다. 저자의 이야기는 좀 지루했다. 다 읽고나서도 그랬다. 식구들이 밖에 나가 삼겹살 파티를 하고 있는 동안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 프로그램이지만 감정치유를 혼자서 해 봤다. 그냥 해 봤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팽팽한 풍선 같던 감정 덩어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아, 이거 신기하네.

오빠와 나는 정식으로 서로의 파트너가 되어 감정치유와 신체치유를 하기로 했다. 먼저 나부터 했다. 얼마 시간이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3시간이나 걸렸다. 덕분에 오빠는 다음 주에 하기로 했다. 프로그램과정은 어둡고 조용한 곳에서 행해졌다. 감정치유보다 신체치유가 더욱 놀라왔다. 마치 최면치료처럼 느껴졌다. 나는 상상도 못한 이유로, 의외의 신체장소에서 문제가 있었다. 정말 많이 울었다. 한방에 "풍선"이 사라진 뒤라 기대가  컸다.  정말 이 지긋지긋한 만성피로가 사라질 것인가? 다음날, 그대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음날 바로 좋아진다는 말은 없었다. 치유는 내가 잠든 사이, 매일 일어난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자꾸만 건강해져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치료가 최면치료에 가깝다고 느낀 것은 그 때문이다. 몸이 확 나아지지는 않았는데 몸이 좀 안 좋으면 나도 모르게 "걱정마, 너는 점점 건강해져 가고 있어"하고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더욱 놀랍고 감사한 것은 이 저자다. 저자도 1박 2일 등의 프로그램을 갖고 이 치유를 시행하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 책으로 아무 것도 감추지 않고, 할 수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다. 서양의 고가의 명상 프로그램들을 생각한다면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오빠와 나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지만 몇 가지 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다. 정말 이 프로그램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 신뢰할 만한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는 것, 방해받지 않을 조용한 장소와 방해받지 않는 두 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끝까지 읽기에 책이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다는 점, 그리고 장점이자 단점인 무료라는 점이 그것이다. 만약 고가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면 아마 최선을 다할 테지만 무료니까 하다가 말아도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치유를 한 지 겨우 사흘이 지났을 뿐이지만 내게는 유용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면 더 유용할 것이고, 일 년이 지나면 더 유용해질 것이다. 링린포체를 만났던 순간처럼 어떤 계기가 될 것만 같다. 책 제목처럼 일종의 "모험"이었다.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고, 내 안에 울고 있는 어린 나의 울음을 그치게 해 줄 수 있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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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05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면서 잠이 드는 건가요? 그런 경험은 매일 있다시피 하는 습관이라 최면치료라 할 수 없을 테구요.(날도 더운데, 좀 썰렁해지셨나..^^) 고단한 마음을 매우 긍정적인 마인드로 바꿔주는 치유 프로그램인가 봅니다.

왈로 2005-08-07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예요.
당신은 건강해져야해요. 꼭 건강해요.
생일 지나갔지만 축하하구요. 곁에 있어 줘서 고맙고 든든해요.
어디 멀리 갈버릴까 걱정했어요.
많이 아팠죠?
쌔쌔, 호호 상처가 잘 아물도록 쌔쌔, 톡톡...

이누아 2005-08-07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반갑네. 여름 생일은 내 생일이 아니야. 내 생일은 겨울이야. 주민번호랑 생일이 달라서 아마 착각했을거야. 어쨌든 격려,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