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14

 

 

  밥솥이 기차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쌀알들을 고온으로 짓누른다. 남김없이 패배시킨다. 다 된 밥솥 뚜껑을 막 열어 그 섬뜩한 증기에 얼굴을 가져다댄 사람은 알 것이다. 밥솥은 무서운 도구이다. 저 안에 내가 한 알의 쌀이 되어 들어가 있다면? 엽기적 연상이 될 때마다 나는 숨쉬기도 힘든 가마솥 찜질방에 대한 기억에 몸서리를 친다. 돌연 헛구역질을 하기도 한다. 열기라는 것의 위력. 그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차라리 삶이라는 것은 고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 하지만 미온은 간직한 채 - 있는 상태의 평정심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닐까. 나 자신을 돌아봐도, 격정적이고 날카로운 파장 탓에 마치 100미터를 전력으로 달리는 순간은 얼마 없다. 심장이 오래 견디지 못하는 일을 삶의 주식(主食)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열렬히 사랑하다가도 언젠가는 긴 냉온의 일상을 보내고, 그로부터 또 한 번 격렬한 연애를 꿈꾸다가도 자신이 감당할 만한 체온으로 돌아가며, 난폭한 몸짓과 화를 식혀 용서의 형국으로 진입한다.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은 약불[弱火]에서 보글보글 끓는, 이 ‘용서’에 관한 감각적인 이야기이다. 우리 모두는 한 마리의 ‘원숭이 암컷’이기에. 각자 돌아갈 동물원의 문이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진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    *    *

 

 

  찜인 브레이징보다는 짧지만 - 재료를 보통 한 입 크기로 자르니까 - 스튜 역시 적잖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음식이다.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화력(火力)”으로. 권지예는 이 스튜에서 “세월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피카소가 79세에 그린 작품답다는 뜻이다. 노년의 화가와 스튜. 사랑을 회상하기에도 어울린다. 화려한 요리도 아니라서 ‘인생’스럽다.


  소설은 피카소의 스튜 그림, 그리고 남편이 스튜 냄비에 삼계탕 할 거리들을 다 넣어놓고 1시간 타이머를 맞춰놓은 순간, 이 두 개의 장면으로부터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그 사이에 권지예가 삽입한 남편과의 이야기, 입양된 아이에 대한 회상, 그리고 옛 애인인 남자와의 사랑 이야기는 1시간이 지난 타이머의 ‘땡’소리와 함께 하나의 단어로 수렴된다. 그리고 그것은 스튜와 닮아 있다.


  “무언가를 죽여 보지 못한 사람은 무언가를 사랑할 수도 없다는 거야. 이렇게 죽어 있는 닭들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닭을 다시 키운다고 해도 애정 따윈 생겨나지 않지.”


  단번에 죽이지 못해 목이 너덜너덜한 채로 달아난 닭이 자신의 머리맡에 있었다던, 기이한 일화를 소개한 남편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살의를 갖는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한 번은 바퀴벌레 새끼들을 눌러 죽이는 남편에게, 다른 한 번은 노르망디 지방의 바닷가 마을(에트르타) 절벽에서 남편에게. 그것은 사랑에의 갈구였을까.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일시적인 혐오, 혹은 본능적 충동이었을까. 누구라도 이 장면에서 저 둘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남편은 아내에게 탐탁지 못한 남자가 되었다. 그녀가 받은 첫 감동은, 자신의 상처를 애무해주는 남편으로부터 치유되는 듯했기 때문에 일어난 느낌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다시 그래줬으면 하는 아내의 말 못할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아내도 이제는 더 이상, 상처를 애무하는 남편에게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 전희를 위한 전초전 정도. 둘의 삶에는 선명한 균열이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폭발하는 감정을, 독자들은 프랑스에 입양된 한 한국인 여자아이를 만난 식당에서 읽게 된다. 아이에게 한국을 소개해달라며, 호텔비까지 내주겠다는 프랑스인 중년 부부의 요구를 아주 간단하게 묵살한 채, 아내는 차에 가 시동을 건다. 스프링처럼 튀어나간 남편에게 그녀는 안기지만 남편은 차에서 내려 소변을 볼 뿐이다. 합일감이라는 것이 전혀 없다. 도대체 그녀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나. 갑작스럽게 등장한 ‘나’라는 서술자가 말한다.


  “꼭 꿰고 싶은 구슬을 놓치는 적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구슬을 놓친 것이다. 시공이 이동하고, 독자들은 고딕체로 적힌 하나의 편지를 읽게 된다. 동물원을 탈출한 암컷 원숭이에 대한 이야기. 아니, ‘산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서 나는 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불륜이다.’


  장소는 파리가 아니라, 한국이다. 그녀는 나체로 일어났고, 부엌에서는 한 남자가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는 옷차림으로 샐러드를 만드는데, 둘은 삼 년 만에 만난 것이고, 그녀는 집을 떠난 지 거의 두 달이 되어가는 날이었다. 남편으로부터 온 편지는 이렇다.


  “마음속에 당신을 향한 쪽문을 잠시 열어 두리다.”


  ‘잠시’라는 부사가 촉박한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진 않다. 동물원 우화 속 암컷 원숭이는 동물원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열린 쪽문으로 암컷은 들어갈 것이다. 그곳에는 수컷 원숭이와 그 둘이 낳은 새끼원숭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대관절 그녀는 왜 나신의 남자에게로 떠나온 것일까.


  “남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여자가 보기엔 그는 세상에 대해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남자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전의는 모두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의 사랑도 상실당한 것이었다. 그녀는 현재의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그로 상징되는 과거에 와 있다. 그것은 ‘솔미재’라 언급된, “한평생 마음의 고향”과도 닿는다. 치매가 들어 저녁때마다 어머니가 외쳤다던, 옛 짝사랑 총각이 살던 마을. 그녀에게 ‘솔미재’는 남편이 아닌 남자가 될까. 그러나 그녀는 묻는다. 남자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녀도 언젠가부터 남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중독일까. 충동일까.


  그녀는 남자를 온몸으로 받아준다. 그 수용에는 연민이 있다. 늙어가는 남자의, 홀로 사는 에고이스트의, “여자를 구속하고 길들이길 싫어하는” 남자의, “떠나기 위해 온몸을 바쳐 사랑하는 관계.”를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이 마치 늙은 피카소라도 된 양 바라보는 연민.


  혈육의 정에 대한 남자의 본성은 거의 귀소본능과도 같은 것일까. 내가 그의 심정을 이해해보려고 한다는 것은, 우스운 시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막연히, 아주 먼 산의 실루엣만을 바라보듯 해서, 결혼이라는 것이 고독의 근원을 잘라 내줄 것이라고는 믿고 있다. 그것이 가벼운 젊음의 섣부른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고독은 낯선 것.


  늘 마주하는 것이 낯선 것일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고독만이 가진 특징이다. 고독의 무력이다. 나는 그가 그녀에게 자신을 넣으며, 그녀가 그를 생각하듯 그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었을 것이라, 또한 막연히 생각해봤다. 그녀는 그와 오래 전에 낳은 한 아이를, 외국으로 입양 보낸 그 아이의 존재를 그에게 설명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고독의 중첩, 관계에 대한 배신, 그런 것들 따위만을 줄 뿐이니까.


  돌아왔다. 옆에는 남편이 있고, 곧 타이머가 울릴 시간이다. 남자에게 가졌던 연민이 남편에게로 옮아간다. 싫어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은 질긴 실을 만드는 일이고, 그것은 삶을 함께 하는 것이다. 사랑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이 용서로 이어지고, 집에 돌아온 그녀에게 끓여주는 남편의 삼계탕으로, 슈미즈 차림으로 담배를 태우는 그녀에게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타이머 종소리로 이어진다.


  “평화로움에 길들여지는 일.”

  피카소가 스튜 재료들을 살뜰하게 그리며, 생각한 것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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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4 2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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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5 2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