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11

 

 

  정신 나간 아내를 둔 남편, 거의 정신병에 시달리는 것 같은 엄마를 둔 아이. 그리고 그녀. 이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다룬 소설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륜을 의심도 했다. 주간지와 텔레비전 드라마에 길들여진 ‘누님’의 의심처럼. 임신 중의 히스테리인가는, 나로서는 생각지 못했으나 작가는 그마저도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줬다. 한편 나는 불안하고 초조할 때마다 담배를 물었다는 남편의 진술을 통해 그녀가 혹 마약에 빠진 것은 아닌가 생각도 했다.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그녀에 대한 묘사, 그리고 남편의 분노는 이 짧은 소설의 초입에 선 나를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번잡한 마음을 남편에 대한 연민을 빌려 달랬을 정도였다.


  인내심이 거의 바닥이 날 무렵이었는데, 소설은 막 2장의 시작을 알리며 놀랍게도 전환된 시점을 보여줬다. 그녀의 마음이 작가의 시선을 통해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였다. 내가 ‘오정희’라는 작가와 작품 속 ‘은수’라는 여인의 경계를 까마득하게 잊으며 하나의 ‘여자’라는 존재를 신비하게 바라보게 된 때는.


  오정희의 <바람의 넋>을 다 읽으니 새벽 1시 8분. 아파트 앞 공원에는 소란스럽지 않은 비가 내리고 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뭐가 있다고, 하지만 비가 ‘여자를 닮았다.’고 나는 직관적으로 웅얼거렸다.

 

 

 

*    *    *

 

 

 

  첫 가출은 신혼여행지의 의미에 대한 암시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2장의 시작과 함께 나는 그녀가 정신병 환자가 아닌 것을 확신(확인)했다. 사연이 있음이 분명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쉽게 미치자, 나는 살짝 겁이 났다. 내가 이 책장들을 다 넘기면 그녀의 사연에 공감할 수 있을까. 해보지도 않은 일에 대한 기우는 사실을 앞에 둔 소심증이 자주 낳는 것이니.


  걱정은 내가 ‘남자’이며, 그녀의 남편인 지세중의 심정을 혹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2장에서 시점이 옮겨진 것을 눈치 채고, 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나는 여자가 아니다.”였다. 작가가 여자라는 사실이 새삼 내 앞에 와 섰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을 해보지 못한 나의 입장에서 더 와 닿는 세중의 마음은 “빈번히 자행되는, 아내의 명분 없는 출분을 참아낸 사내가 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겠는가.”라는 한탄보다는 “아내는 대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걸까.”라는 궁금증이었다. 이해를 위한 의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나는 독서의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은수의 입장에서 서술되기 시작하면서 소설은 감상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녀는 남편이 싫어서 가출하는 것이 아니다. 은수의 마음은 당초 이렇다.


  “비죽 드러난 살이 없고 뼈가 두드러진 커다랗고 헐벗은 발을 모두어 가슴에 안았다. 거의 비애라고나 말해야 할 슬픔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조용히 차올랐다. 이것인가, 함께 살아온 여섯 해의 부피는 이런 것인가.”


  그런데 그녀에게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긴 끈이 하나 있다. 가출하기 시작할 무렵에도, 그러니까 그녀가 세중과 결혼한 지 6개월이 된 후에도, 그녀는 이미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생모가 아닌 어머니에게 들은 바로 그녀는 전쟁고아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진실이 숨어 있을 것 같았으나,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않았다.


  과거를 알고 난 그녀는 ‘새로운 파종’이라고 한 결혼이 그 검은 옛 기억들을 잊어버리게 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내심 바랐을 것이다. 그 놈의 ‘두 짝의 고무신’의 정체, 하지만 그것이 결코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은수는 과거를 찾아 끝없이 헤맬 수밖에 없다. 나는 체증을 느끼며 그녀의 기구한 삶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아니, 이상하다고까지 할 것은 없는데 도통 나의 시선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없었던 까닭에 나는 그걸 이상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들 승일이 어린 마음에 바람이 왜 부는지 묻는다. 그러자 은수가 답한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란다.”


  왜 하필 ‘바람’일까. 불륜을 뜻하기도 하는 이 단어로부터 소설은 이탈하기 시작한다. 바람 본연의 차디차고 냉정한, 그리고 형체 없는 특징들이 은수의 과거로부터 이곳으로 끌어당겨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녀가 어떻게 세상에 나게 되었는지 더듬거리게 되었다. 불의의 강간을 당하는 장면에서, 은수가 그 소름끼치는 동안 불현듯 ‘두 짝의 고무신’을 떠올렸기에 나는 그녀가 혹 그러한 방식으로 태어난 아이는 아니었나 의심도 하게 되었다. 출생의 ‘더러움’이 은수의 현실을 과거로 잡아끄는 것은 아닌가, 하며 말이다.


  온통 그녀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으로 꽉 들어찬 독서에 남편 세중의 소심한 생각들이 끼어들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 그의 사람됨에 대한 이야기도 역시 감상해봐야 할 것이었다. 별로 특이한 것은 없다. 그는 그저 가정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회사에서는 일 잘 하고 성격 좋은 대리이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는 때때로 무심한 것이 상책이라고 믿는 소심한, 어찌 보면 오늘날 이곳에 널려 있는 남자들의 전형이라 할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말라 있는 감성이네 어쩌네 하지만 자기변호나 두둔은 하나같이 감상으로부터 도출시키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 감성이라는 것이 어떨 때에는 자기변호를 실패에 빠뜨린다. 다시 만난 아내의 헤진 구두를 보다가 그는 “연민 때문에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다짐한다. 주택적금을 깨서 200을 아내에게 건네주면서도, 그 행위는 분명 이혼 - 최소한의 별거 - 의 제스처였지만 세중은 여전히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려는 속내였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왜 자신을 잡고 울지 못했냐고 그녀를 맘속으로 채근한다. 실은 그 자신에 대한 질책이다.

 

  갈등의 최고조는 이렇게 끝난다. 은수는 갈현동에 있는 그녀의 - 생모 아닌 - 어머니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이를 생각한다. 승일을 떠올리며 어머니로서 그녀가 가질 수 있는 따뜻한 감정으로부터 용기를 얻어, 하루는 세중의 일터에 찾아가 용서를 구하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가보니 그는 잘 살고 있다. 배신감이 일어난다. 결국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M시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나는 몹시 불안했다. 내가 상상하던 결말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녀의 과거, 방랑벽의 원인. 그 무엇 하나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바닷가로 간 것은 분명 나에게 섬뜩한 심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자살? 이렇게 의문을 쏘아붙이고 나는 애써 그 순간을 지워버렸다.


  “이건 유괴가 아니야, 내 아이를 내가 데리고 있을 뿐이야.”


  은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여하튼 상상력의 부족이 다행스런 나의 결점이었기에 망정이지 그 이상을 나는 그려내지 못했다. 그녀가 한시라도 빨리 서울로 돌아갔으면 했다. 승일을 걱정한다는 점에서 나는 여전히 세중의 마음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돌연 자신의 유년시절 기억이 있는 그곳으로 아들과 함께 찾아간 은수의 의도로부터 나는 심연에 침잠되어 있는 ‘과거에의 추궁’을 발견했다. 왜 나는 그녀가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갈망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것일까.


  “내게 보이는 건 유폐와도 같은 어둡고 막막한 희망없는 미래뿐이에요.”


  서울로 돌아온 아들을 데리고 세중은 갈현동을 떠났고, 은수는 어머니와 남아 술자리를 가졌다. 해소의 자리이다. 속으로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토록 하고팠던 말을 속으로 내뱉었다. 드디어 어머니의 입에서 과거가 흘러나오는구나. 드디어!


  과거는 이해될 만한 수준을 훨씬 웃도는, 안타까운 사실이었다. 은수는 쌍둥이였고, 부모와 은수의 쌍둥이 자매는 전쟁 때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쌍둥이였다! 영혼을 나눠 갖는다는 그 사이. 무엇이 은수를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게 했었는가, 과거가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나는 갈등이 해결되기만을 막연하게 바랐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은수가 이 사실을 알게 된 직후 곧바로 모든 일이 해결된 쾌감을 맛봤을까. 그럴 리 없다. 이건 안고 가야 하는 사실이다. 문 걸었냐. 어머니의 물음에 은수는 깊은 밤 골목을 내다보다 그곳에서 자신의 어린 넋을 바라봤다.


  “오라, 나의 어린 넋이여, 바람되어 떠도는 넋이여, 하염없는 그리움 잠재우고 이제는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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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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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0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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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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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14: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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