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1.07

 

 

  내가 너무 곱게 책을 읽어왔나 싶었다. 욕설과 비속어가 전체를 수놓은 소설을 접한 건, 이걸 창피한 편향적 독서이력이라 불러야할지는 모르겠으나, 처음이었다. 나는 김영하가 좋아졌다. 짧은 단편 하나 읽었다고 작가에게 이 정도의 관심을 갖게 된 건, 그것도 역시 처음이었다. 욕설로 썼는데, 군더더기가 없다. 주제는 모르겠는데, 공감이 된다.


  아마 생각건대,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이 소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니미 씨팔이다.”로 끝나는 이 소설에, IMF가 포르노 영화 찍으려고 암스테르담까지 간 제작사의 외화 낭비로 발생했다고 알고 있는 ‘나(김우현)’가 “한 따까리 뛰다가” 걸려 “좆같은 새끼들”에게 쫓기게 되는 이 소설에 말이다.


  심드렁하게 읽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 - 만약 그렇다면 십중팔구 무성의하게 읽은 것일 테고 - 이다. 김영하가 ‘충격요법’의 일환으로 소설적 장치들을 여기저기에 배치한 흔적을 찾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충격의 정체는 무엇일까? 소설의 내용 자체이다.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이라는 표현을 선택하는 것에도 나는 조심스러워야만 한다. 뉘앙스가 있으므로. 소설 속 ‘저들의 일상’과 ‘나의 일상’에는 어떤 위계질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질 법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위계질서가 있다.”라고 말하고자 한다. 그들의 삶을 나보다 ‘낮은 수준’의 삶이라 평가하려는 마음도 있다. 만약 이러한 상대적 우월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를 비롯한 일반 독자들은 김영하의 이 단편에게서 충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어떻게 저렇게 살아?”라고 묻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감정적 질문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류인생에 대한 정서적 혐오감은 실재한다. 그것은 거의 직관적이므로 도덕 감정과는 달리 시정되기도 어렵다.


  이것이 우리, 즉 독자의 한계라면 김영하는 그런 삶을 보여주면서 소설의 경계를 확장시킨다. 우리는 분명 - 소위 ‘1인칭 시점’이라 할 때 - 소설 상의 ‘나’에 대한 동질감을 바탕으로 독서한다. 감정이입이 안 되면 독서가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전통적인 ‘나’라는 화자를 등장시키는 대부분의 소설들은 그 인물의 성격을 상식이나 일반 도덕 따위들로부터 동떨어져 있지 않은, 그리고 살짝 고뇌에 차 있는 정도로 만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김영하의 이 단편은 반대의 경우이다. 반대 중에서도, 이 인물은 거의 극단의 반대에 서 있다.


  내가 이 소설을 - 정말 - 단 한 번의 정지도 없이 읽어버리고 나서 처음 이면지에 적은 질문은 “왜 공감?”이었다. 왜 공감했냐는 것이다. ‘나’의 의식은 나와는 다르다. 성(性)관념, 양심의 수준, 일상, 언어사용, 학식 등 거의 전 영역에 걸쳐 나는 그보다 ‘정상’에 가깝다. 이렇다면 나는 ‘나’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나는 공감했고, 이 감정의 정체를 복기해보니, 그것은 연민의 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뿐만은 아니다. 희열도 있었다. 내가 사는 일산이 잠깐 등장했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된 것도 사실이었고, 대형마트에서 바나나를 훔쳐 먹고도 “쫄지마.”라는 요즘 청춘의 ‘시대적 구호(?)’에 기대 “게기는” 나와 동거녀의 으름장을 보면서 나는 그들의 편에 서 있었다. 그들의 범행을 목격한 아주머니나 점원의 입장이 되어보려는 생각은, 지금 생각해보니 하지 않았다. 김우현과 종식이 한 남자의 머리를 각목으로 내리찍었을 때에는 통쾌하기도 했다. 멋있기도 했다. 영화 <해바라기>나 <아저씨>에서 주인공이 고난도의 무협액션을 성공시켰을 때 느끼는, 남자가 남자에게 느끼는 일종의 “남자다움”도 있었다.


  또 하나 내가 이 소설에서 주목한 것은 직설적인 화법이었다. 대화든 서술이든 돌려 표현하는 법이 없다. 독서의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생각할 시간은 거의 없었다. 예외는 있었다. 다른 이들의 경우에는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나(우현)’가 동거녀의 음부에 있는 털을 면도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저게 무슨 감정일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분명 선정적인 장면인데도 우현의 눈물이 의미하는 바가 희미하게나마 뚜렷해지는 역설적 상황 때문에 전혀 ‘야하지 않은’ 기이한 경험을 한 것이다.


  “왜 그랬는지, 씨팔, 눈물이 났다. 나는 여자애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 그 애가 내 쪽을 안 보고 있던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무슨 감정이었을까? ‘나’가 모르니, 내가 모르는 건 당연지사고, 김영하는 알았을까? 몰랐으니 썼겠지, 하는 심정으로 추리를 해보건대, 그건 혹시 ‘비상구(exit)’를 바라보고 있는 막연한 현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여자애의 성기를 “비상구”라 부른다.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은데 - 그러나 대관절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 ‘나’와 그녀의 연대감은 생각 외로 견고하다. 적어도 ‘나’가 가진 생각과 생활의 수준에 처했다는 가정 하에 보자면 그녀의 ‘성기’로 읽을 수 있는 현재에의 비상구, 혹은 ‘돌파구’가 그러한 연대감을 만든 절대적 원인일 수도 있겠다.


  그녀가 후줄근하게 맞고 온 탓에 종식과 복수를 감행한 것은 ‘나’의 상식에는 없는 정의감이나 의리 때문이 아니라, 비상구를 지키고 싶은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본능 때문이라는 생각을, 나는 한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감동’이다. 문학이라는 것을 체험하며 대개 바라는 종류의 고귀한 감동이 아니라, - 이렇게 부르면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 ‘원초적 감동’ 같은 것 말이다. 나는 원색의 물감이 치덕치덕 발라져 있는, 울퉁불퉁한 유화 작품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름답다고 하긴 어려우나, 퍽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불리지도 않는.


  “나라면 저러지 않겠다.”라는 식으로 교훈을 추출하려는 시도는 이 소설에 대한 오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라는 사람에게 김영하가 팬을 맡긴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작가가 유독 이상한 - 누군가의 표현대로라면 ‘또라이’인 - 인물을 작중 화자로 등장시키곤 한다는 배경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가 그의 소설을 읽으며 생각할 수 있는 시선의 각도는 비일상적이라고 가정해야 함이 옳을 것이다. 비경계의 체험을 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또한 놀라운 일이고. 내가 ‘나’로부터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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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8 1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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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1 0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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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15: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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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2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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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5 2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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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6 0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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