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사용자들은 문장 하나를 말할 때마다 그렇게 상대와 자신의 지위를 확인한다. 너는 나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나는 너에게 존댓말밖에 쓰지 못할 때 나는 금방 무력해진다. 순종적인 자세가 되고 만다. 그런 때 존댓말은 어떤 내용을 제대로 실어나르지 못한다.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도전적인 아이디어들이 그렇게 한 사람의 머리 안에 갇혀 사라진다. 나의 자존을 지키지 못하는 언어, 틀렸다고 꾸중 듣기 좋은 말을 자주 쓰고 싶을 리 없다. 단기적인 대책은 상사, 선생님, 윗세대와 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장기적인 대책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한국의 세대 구분이 그렇게 촘촘하고 계층 간 단절이 심한 것, 이 사회가 그토록 출세 지향적인 것은 언어 탓이 꽤 크다고 생각한다. ‘존댓말 쓰고 반말 듣는 상황’을 다들 피하고 싶지 않나. 오래도록 그런 처지에 내몰려 억울함이 쌓이고 묵으면 한이라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p282-
처음 중국 생활을 시작할 때 가장 당황스러웠던 일 중 하나가 중국 직원들의 억양과 말투였다. 직원들과 대화할 때 그들이 쓰는 언어는 동등했다. 그들 사이의 언어와 나에 대한 언어가 다르지 않았다. 오직 나만이 그들과 나 사이의 나이와 직책과 서열을 언어와 관련 짓고 있었다. 동등한 언어의 사용, 그들 사이의 말이 나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때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데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해외 고객의 공정 감사에 대응할 일이 많았다. 영어와 중국어권 고객과의 협상 자리의 언어는 평이하고 동등했다. 대화에 높낮이가 없었고 조심스런 격식만이 느껴졌다. 반면 (일본어는 잘 모르지만 분위기상) 일본과 한국 고객과의 언어는 나를 얼마나 낮추고 있는지, 그리하여 당신이 얼마나 높아지고 있는지는 보여주려는 무의식적 외피를 두르고 있었다. 한국어와 중국어를 사용할 때 나의 언어 습관은 무척 달랐고 행동의 양태도 달랐다. 스스로 느낄 뿐 아니라 제삼자도 흥미롭고 의아하게 지켜보던 모습이었다. 한국어가 훌륭한 언어인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존댓말이 갑질의 언어로 변질될 때 존대는 굴종을 요구한다. 훌륭한 한글이 존댓말로 대표되는 동방예의지국의 언어가 아니라 반말이 사라진 평등한 나라의 언어이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