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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 - 평생을 수치심과 싸워온 우리의 이야기
로라 베이츠 지음, 황가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9월
평점 :
대부분의 여자들에겐 자신만의 목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뚜렷이 인식하기도 하고 의식하지 못한 채로 존재하기도 합니다. 화가 나고, 겁에 질리고, 수치스럽고, 모욕감을 느끼지만 아무 말로 하지 못한 일들의 목록 말입니다.
일상 속 성차별 사례를 들어보는 웹사이트 '일상 속 성차별 프로젝트'를 개설해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모은 로라 베이츠 저자. 그저 개인의 문제, 사적이고 우연한 목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상화되고 만연한 여성혐오의 증거들이 모이고서야 우리가 아니라 시스템이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기나긴 이야기 목록을 거의 모든 여자가 가지고 있는 사회. 하지만 완전히 혼자라고 느끼는 사회. 내가 뭔가 잘못했을 수도 있다고, 자초한 것일 수도 있다고, 운이 나빴다고,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
게다가 우리는 성차별, 성희롱, 성적 괴롭힘을 피하고 건너뛰고 넘어서는데 너무 숙달되어 있어서 경험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그것을 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여성 스스로도 성차별과 성 불평등이 사회 근간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목록>에서처럼 일깨워줘야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은 자신만의 개인적인 불행이라고 느껴왔던 것이 사실은 구조적 억압에 의한 여자들의 공통된 경험임을 일깨웁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성별에 따라 교육받고 사회화됩니다. 요즘은 덜하지 않나? 생각한다면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구분하는 용어가 일상에서 얼마나 다르게 쓰이는지 조목조목 짚어낸 목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 편향적인 단어가 이토록 많을 거라곤 미처 몰랐습니다.
문제는 이런 메시지가 성 편향적인 권력관계의 기반이 된다는 겁니다. 성차별이 어린 나이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평생 그런 메시지에 둘러싸여 살아온 사람이 그것을 문제나 편견이라고 인식하기는 어렵습니다.
<목록>에서는 교육기관의 여성혐오를 보여주는 복장 단속, 교내 성폭력 신고제가 없는 수많은 대학교 등 여성의 신체를 비난하고, 성적 대상화하고, 경멸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시스템이 버젓이 자리 잡은 사례를 낱낱이 보여줍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위축된 상태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목소리를 냈을 때 비난당할 거라는 부정적 경험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한마디로 이 사회는 여성 개개인에게 낙인을 찍는 집단 세뇌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우리의 자기의식, 자기 가치, 안전감, 포용력과 연결된다고 합니다. 실내에서 운동하는 편을 선호한다, 나는 그냥 임금 협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마 그 자리에 지원할 자격이 안 될 거다, 내가 프레젠테이션을 잘 못하나 보다, 나는 늘 시간이 부족한 것 같다 등 그 상태에 익숙해진 채 맞서 싸우길 포기하게 됩니다.
불평등하게 살기 쉽고, 받는 것보다 많이 주기 쉽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에 감사하기 쉬워집니다. <목록>은 우리가 개인의 약점이라고 믿는 것이 실제로는 조직적 장벽임을 짚어줍니다.
"문제는 여자들이 아니다. 시스템이다." - p72, 목록
최근 성범죄는 경악스럽습니다. 그마저도 보도되지 않은 사건이 더 많습니다. 영국 여성 네 명 중 한 명은 가정폭력을 경험하고 1년에 8만 5000명은 강간 또는 강간 미수를 겪는다고 합니다.
성범죄가 일어나면 여자들이 더 조심해야 할 뿐입니다. 통계에 따르면 범인은 남성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고, 남자들이 밤에 외출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여자들 보고 외출하지 말라고 합니다. 외출을 피하고 자제해라. 왜냐하면 남성의 폭력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지배합니다.
그리고 구세대 여자들이 사용했던 대처법과 안전 조치를 습득합니다. 무기가 필요할 때를 대비해 손마디 사이에 열쇠 끼우기, 길을 걷다가 남자들이 모여 있으면 반대편으로 건너가기, 조명이 어둡거나 나무가 우거진 곳을 피하기 위해 멀리 돌아가기, 성희롱당한 적이 있는 곳을 피하기 위해 통근이나 등교 경로 바꾸기, 혼자 살지 않는 척하기, 성희롱을 피하기 위해 옷차림 바꾸기, 뛰어야 할 경우에 대비해 단화 신기...
극히 일부만 소개했지만 이 목록을 남자들에게 보여주면 저런 조치를 취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고, 그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여자가 이 모든 일을 매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겁니다. 별빛 아래서 인적 없는 거리를 걷기도 하고 일출을 보기도 하면서 밤산책의 즐거움과 고요를 누리는 남자들은 여자들의 이 피곤한 행위를 알지 못합니다.
시스템은 여자들을 얌전히 행동하게 하고, 단단히 가둬두고, 절대 선을 넘지 않게 훈련시킵니다. <목록>은 경찰, 사법체제, 형법제도가 성범죄를 다루는 방식을 비롯해 직장, 정치, 대중매체의 성차별적인 생태계를 낱낱이 파헤칩니다. 흑인 여성, 이주 여성에 대한 문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목록>은 흔히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한 마리, 흔하지 않은 개별 사건으로 치부했던 점과 점을 연결합니다. 다양한 시스템 간의 다양한 권력과 억압 형태 간의 교차성을 인식하고 나면 한 분야의 억압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분야들과 중첩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가부장적 구조와 시스템적 여성혐오, 인종차별, 장애인 차별, 연령 차별, 동성애 혐오, 계급 차별 등 사회 근간에 있는 억압들을 뿌리 뽑아야 편견의 교차성 문제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스스로 목록을 작성해 보면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것이 떠오르게 될 거라고 합니다. 작은 일들, 정말 쓰라렸지만 과민하게 굴지 말자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던 일들, 자신 있게 판단 내릴 수 없었던 일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유난을 떠는 건가 싶은 일들처럼 오랫동안 묻어뒀던 의심스러운 일들도 떠오르게 됩니다. 명절 연휴를 보내면서 또 얼마나 긴 목록이 생겼을런지요.
우리가 받은 억압을 지적하고 드러내는 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리고 해결책은 이미 억압받은 여자들이 수십 년 동안 제시해온 게 있습니다. 무시되고 사용되지 않은 채로 존재해온 해결책들이 말입니다. 그중 일부만 실천해도 좋은 시작이 될 거라고 저자는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해결 방안 '목록'도 이 책에 수두룩하게 소개됩니다.
생존 기제로서 수년간 스스로를 겹겹이 감싸왔던 부정을 또렷하게 드러내면 버거운 감정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이런 자각을 통해 강력한 집단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하고 개인에 대한 비난은 거부하는 당연한 일들을 하자고 응원합니다.
"이제는 멈출 때다. 우리 딸들에게 너희는 누구에게도 사과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고 말할 때다. 우리 아들들이 시스템을 붕괴시키도록 키울 때다." - p261, 목록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