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노크, 어쩌면 의학의 승리
쥘 로맹 지음, 이선주 옮김 / 북레시피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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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시인, 소설가이자 철학자 쥘 로맹 (본명 루이 파리굴 1885-1992)의 희곡 <크노크, 어쩌면 의학의 승리>. 1923년 발표한 희곡 <크노크>는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처음 상연된 이후 대성황을 이루며 1924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북레시피 출판사에서 한국에 처음으로 쥘 로맹 희곡을 소개합니다. 무려 100년이 흘러도 지금 이 시대에 의미를 안겨주는 <크노크> 매력을 만나보세요.


구글링을 해보니 영화로도 만들어진 데다가 해외에선 연극축제에서도 여전히 인기 많은 작품이더라고요. 이 작품이 상연되지 않은 나라를 손꼽는 게 더 빠를 만큼 (1939년 크노크 관련 보고서에서 상연되지 않은 나라로 중국과 한국을 언급하기도) 대단한 고전문학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 시절 2020년 10월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기사 제목에 크노크가 다시 등장합니다. "코로나19에 맞서 국가가 닥터 크노크가 되다!". 당신은 보균자이니 지금부터 침대에서 쉬어야 한다는 크노크의 진단이 코로나19 진단 상황과 비슷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크노크는 역주행 베스트셀러를 맞이합니다.


총 3막으로 구성된 <크노크>는 희곡을 잘 모르는 독자도 처음 접하기 좋은 작품입니다. 등장인물 수도 혼란을 주지 않는 데다가 작품 분량이 짧은 편이어서 희곡의 묘미를 맛보기 좋습니다.





1막은 닥터 파르팔레 부부를 기차역에서 만나 프랑스 작은 마을 생모리스로 이동하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크노크는 대도시에서 말년을 보내려는 파르팔레의 후임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때만 해도 거래를 통해 자기 담당 지역을 넘기는 방식이었나 봅니다. 전임과 후임의 대화 속에 오가는 속물 냄새가 처음부터 진하게 풍깁니다.


돈을 벌려면 이 마을 사람들을 치료해야 하는데, "세계적인 유행성 독감이라면 또 모를까.(p21)" 마을 사람들이 웬만한 병으로는 의사를 찾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게다가 간단한 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조차 생미셸 날(9월 말 추수 직후 수금하거나 빚을 갚는 전통)에 지불한다니... 환자들이 진료비를 연간으로 지불하는 마당에 전임에게 지불해야 할 돈을 어떻게 갚을 수 있겠나요.


문제는 크노크는 제대로 된 의사도 아니었던 겁니다. 어린 시절 약 복용 방법을 달달 외우는 취미가 있었던 그는 의사자격증도 없이 선박에서 의사로 일하며 그만의 의료방식을 확립합니다.


크노크는 전임에게 갚아야 할 돈을 현금 대신 자기와 일주일 같이 일해보면서 자신의 비법을 알려주는 걸로 퉁치자고 하는데... 크노크가 그토록 자신 있어 하는 모습 때문에 앞으로의 상황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2막에서는 마을 사람 홀리기 대작전에 본격 돌입합니다. 크노크에게는 주민 모두가 고객입니다. 자주 들르는 손님이 충직한 고객입니다. 아파야만 의사를 찾는 방식은 집어치웁니다. 건강하다고 말해주면 그게 오히려 속이는 거라고 말이죠.


그에게 마을 주민들은 한마디로 '보균자들'입니다. "겉으로는 지극히 멀쩡해 보여도 몸 은밀한 구석에 한마을을 감염시킬 수도 있는 수백만의 박테리아가 잠재하고 있다 (p68)"는 걸 알립니다.


크노크는 광고부터 시작합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온갖 종류의 의심스러운 병들이 전파되지 않도록 힘쓰려는 선의와 자신감을 담아" 인사드린다며 말이죠.


그렇게 찾아온 마을 주민을 진료하는 크노크의 언변을 보면 정말 희대의 사기꾼 저리 가라 할 지경입니다. 그저 노동에 피곤한 상태의 부인에게 일주일 동안 고형식 금지, 두 시간마다 물만 마시라고 합니다. 굳이 꼭 먹겠다면 아침저녁 비스킷 반 개를 우유에 적셔서 먹으라고 합니다.


일주일 후 상태를 다시 보자고 합니다. 그때도 정정하고 몸이 가벼우면 대수로운 게 아니지만 그 반대로 머리가 무겁고 힘이 빠지고 의욕이 없다고 느껴지면 (아니, 먹은 게 없는데!!)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이죠.


그렇게 마을 주민들은 크노크를 존경심으로 바라보게 되고, 3막은 그로부터 3개월이 흐른 시점을 보여줍니다. 타지에서도 달려올 만큼 크노크의 명성이 높아져 있습니다. 그야말로 떼돈을 벌고 있습니다.


"제 역할은 그들에게 의료적인 생각을 심어가면서 의료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지요." - p127





진료는 낚시할 때 그물을 던지는 것처럼, 치료는 양식업처럼. 크노크의 진료를 받고 나면 희한하게 치료 횟수가 확 올라갑니다. 정규적으로 치료받는 환자도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크노크는 환자의 이익, 의사의 이익보다 앞서는 의학의 이익을 내세우며 이 일을 합리화합니다.


과잉 진료 문제를 100년 전 희곡에서 발견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건강 염려증이 어떻게 병을 키우는지 크노크와 마을 주민들의 관계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흥미롭게도 이 모든 것들을 비판적으로 암울하게 그려내는 게 아니라 은근슬쩍 비꼬는 유쾌한 블랙코미디로 표현하고 있어 더 재미있습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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