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영자들의 기념비 - 당대비평 특별호, 한국사회의 성과 속-주류라는 신화
강수돌, 박노자, 권명아, 김두식 외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1> 책 속으로 들어가며
1> 한국사회에서 주류가 되기 위한 조건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주류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28세의 기혼 여성인 C는 생각한다. 먼저, 남성일 것, 그리고 고급 지식을 습득했다는 국내외 증빙자료가 있어야 할 것,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계통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어디 보자. 이 조건에 몇 가지나 해당될까? 따질 것도 없이, 답은 금방 나왔다. 그렇다. 주류는 아니다.

2> 주류가 아닌 이들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요새 유행하는 말로 C는 아웃사이더 또는 단독자일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국제이주 노동자도 아니고, 트랜스 젠더도 아니며, 매매춘 여성은 더더욱 아니다. 다행히 아직은 장애인도 아니다. 가만, 이런 구분은 문제있다. 아웃사이더가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잠시, 이 질문은 접어두자.

<2>'어머니는 말할 수 있을까?'를 읽고
1> 왜 어머니는 오빠의 밥상에만 관심 있었을까?
글을 읽던 중 떠오르는 장면 하나.
저녁 밥때, 현관문을 열고 누가 들어온다. 스물 대여섯된 여대생이다.
어머니 말씀하시길, '밥 차려 먹어라.'

똑같은 상황. 아까 그 여대생보다 2~3살 더 들어보이는 젊은 남자.
어머니 몸을 일으키며 말씀하시길, '우리 아들, 일찍왔네. 찌개 데울 동안 씻어.'

밥상을 받지 못해서 서운한 게 아니다. 좀 이상한 것이다. 왜 어머니는 장성한 아들에게 스스로 밥상 차리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일까? 왜 아들은 가사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수저만 들었다 놓음으로써 밥상 치우는 일을 외면하는 것일까? 도대체, 왜?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머니는 아들의 대리인이다. 고부 갈등은 여성과 여성의 갈등이 아니다. 시어머니/며느리는 여성의 관점에서 정체성이 아니라, 여성이 남성과 맺고 있는 힘의 관계를 설명할 뿐이다. 어머니의 권력은 출세한 아들의 권력에서 나온다. (...) 그런 어머니가 남녀고용평등법에 찬성하거나 군 가산제 폐지를 두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p.49)'

아들의 대리인인 어머니는 아들 대신에 할 수 있는 일을 처리한다(아들이 결혼하면, 배우자가 그 일을 대신하며 간혹 고부는 그 일의 과정 또는 결과를 두고 다툰다). 다행히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한국 어머니들은 행복하다. 아들이 성공하면, 지금껏 그를 뒷바라지 한 어머니에게도 공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철저하게 아들에게 예속되어 있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똑같은 밥상인데, 어머니는 왜 아들의 밥상만은 외면할 수 없었을까? 혹시, 비난 받는 것이 두려웠던 건 아닐까? 아들에게 밥상도 차려주지 않는 어머니를 우리 사회가 현모양처라 불러줄리 만무하다. 그러나 딸의 밥상을 차려주지 않았다 해서 비난받을 어머니는 없다. 도리어, 딸의 밥상까지 염려하는 어머니를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시킨 애처로운 부인으로 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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