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식의 장례행렬이 이어지던 곳에서 지나가던 한 스님이

죽은 이에게 한마디 해줄 것을 부탁받았다.

그랬더니 그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이 놈 내가 너 죽을 줄 알았다.

언젠가는 네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줄 알았어!

 

그래, 우리가 언젠가는 모두 죽는 사실, 그 사실에서만큼은 모두가 공평하다.

하지만 삶의 과정은 어떤가.

어떤 이는 폭력과 학대로 점철된 삶 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성장하고,

어떤 이는 뭐 하나 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신의 온갖 재능을 꽃피우며 주인공으로 산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제각기 다르고, 우리가 그 속에서 택하는 방법도 모두 다르다.

 

 

 

 

이 연극의 주인공들은 뭐 이런 사람들만 모아놓았나 싶게, 불.행.하.다.

집안에 콕 박혀 수프만으로 연명하는 반지는 새아버지와 함께 자살한 엄마에 대한 증오로 자신을 가두어버렸고, 반지에게 찾아드는 유일한 사람인 우람은 자유분방한 연애관을 가진 엄마와 가정폭력의 희생자이고, 우람의 엄마 정란은 자신을 강간한 사람와 결혼해야 했던 과거를 안고 방황하는 인물이다.

 

참, 구질구질하다.

참, 거지같다.

알고 보면 모두 다 희생자고, 약자다.

 

삶은 맞서 싸우며 이겨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감당해야 할 진실이 너무도 클 경우 인간은 뭘 할 수 있을까.

외로워도 슬퍼도 웃는 캔디처럼 우리는 명랑을 가장할 수 있을까.

 

연극에는 내재된 아픔과 상처를 이기지 못해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며

또 다른 생채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도 울고 악 쓰며, 온몸으로 절규할 수 있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다.

 

기대했던 것만큼 치유의 과정이 잘 그려져 있지 않았고,

대사만을 통해 인물들의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데 전달력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어서

몰입이 잘 안 되는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반지가

"누구나 사는 건 이렇게 절박한데, 행복이나 이해를 바랄 순 없어도, 서글픈 인생에도 '수고했다' 박수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했을때, 나는 힘껏 박수를 쳤다.

너덜너덜 누더기 같은 인생이라도,

그렇게 꿋꿋하게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박수받을 만한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별 볼 일 없는 인생도,

박수받을 만한 인생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누군가에겐 이렇듯 절박한 삶,

충분히 만끽하고 충분히 행복해져야겠다고.

다짐,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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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4-09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삶은 때론 살아가기도 하고, 때론 살아지기도 하는 것 아닐까요.
비교하지 않는 삶, 그저 나의 삶에 스스로 박수칠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이 듭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4-10 12:38   좋아요 0 | URL
예전에 '삶은 살아진다'는 말에 발끈해서는
난 '삶을 살아갈 테야'라고 결심한 적이 있었는데요,
길다면 긴 인생에서 때로는 의지를 내려놓고 살아지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요새 느낍니다. :)

차트랑 2012-04-10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나그네길...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4-10 12:38   좋아요 0 | URL
삶은 여행 :)

잉크냄새 2012-04-10 14:02   좋아요 0 | URL
삶은 달걀

차트랑 2012-04-11 1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계란 ㅠ.ㅠ
 

 

*

무한자유를 즐기는 백조인 나의 유일한 즐거움은

동네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가끔은 멍때리는 것,이다.

나는 이제 커피의 크레마를 보고

향을 맡고 한모금 입에 넣어 맛을 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쿱  ;ㅂ;

 

집에서는 조금 멀지만 이수역 근처에 이쁜 카페가 생겼다.

가게는 일본의 아기자기한 카페를 연상시키고

주인언니는 <카모메 식당>의 사치에 상을 연상시킨다.

역시나, 주인언니는 영화를 보고 이런 카페를 구상했다고 한다.

 

사실 나는 작은 규모의 가게를 좋아하지 않는다.

주인의 시선 안에 다 들어오는 가게 안에 있다 보면

뭔지 모를 답답함과 구속을 느낀다.

뭔가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시끄러운 프랜차이즈 가게를 찾을 정도이니.

정작 친밀함을 원하면서도 애미한 관계(주인과 손님)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몰라서

그냥 익명의 개인으로 남길 원하는,

나는 그런 요즘 애다.

 

그런데 점점 이 언니의 매력의 빠져들기 시작했다.

유별나게 살갑게 구는 것은 아닌데

이야기할 수록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매력의 소유자였던 것.

 

먹을 것을 좋아하는 나,

먹을 것을 나보다 좋아하는 언니.

'일본의 간장과 한국 간장은 뭐가 다른지 궁금하다'는 질문을 시작으로

우리는 수다를 떠는 사이가 되었다.

만세!

 

 

**

무슨 이야기 중이었던가,

스타벅스에서 일을 했었던 언니가 마음이 바닥까지 추락했던 일화를 시작했다.

늘 저지방우유를 넣은 거품이 만땅인 카푸치노를 시키던 손님.

게다가 그란떼사이즈를 주문했으므로 늘 그 큰 컵을 카푸치노 거품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야 했다고 한다.

번화한 스타벅스에서는 조금만 주문이 밀려도 손님이 문밖까지 줄을 서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 손님이 오면 그 손님만을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서 음료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어느날 신입이 주문을 잘못 넣어 언니는 일반우유로 음료를 만들게 되었다.

다 만든 음료를 카운터에 내놓는 순간,

그 손님의 얼굴을 보고 순간적으로 잘못을 직감.

"죄송합니다. 다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 손님이 짜증을 내더란다.

"이 언니 맨날 이래!!!!!!"

자기 잘못은 아니지만 모든 실수를 손님에게 설명하기도 뭣한 노릇이고

예전에도 한번 실수한 적이 있어서 뭐라 말은 못하고 묵묵히 음료를 새로 만들어 대접했다고.

 

 

별것 아닌 일 같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을 스산하게 만드는 건

별것 아닌 일들의 연속이다.

 

그날따라 소개팅남과 약속이 있었고,

언니는 차가 막혀 거의 한 시간이나 늦은 남자를

엄청난 바람이 부는 날 벌벌 떨며 기다려야 했고,

게다가 언니는 그 남자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다.

 

남자는 영화를 예매해두었는데 그 영화가 <2012>였다.

영화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과연 그 영화를 볼 수 있을까, 하며 언닌 그냥 영화를 포기하자고 했지만,

가보기나 하자는 남자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 기적같이 영화의 예고편이 시작될 때 극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뭐 되는 일도 없는 오늘 같은 날,

관심도 없었던 영화.

그런데 점점 영화에 몰입이 되기 시작하더란다.

그리고 마음이 눈 녹듯 풀리기 시작했다고.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그깟 일이 뭐 그리 대수냐고.

그런 마음이 들었더란다. 푸훗.

그리고 처음으로 그 남자의 그날 스타일이 눈에 들어오면서

생각보다 괜찮았단다.

만약 그 남자와 잘되었다면 이날의 일화는 아주 로맨틱하게 끝났겠지만, 뭐. 여기까지!

 

그날 이후 우울한 사람에겐 언제나 <2012>를 추천하게 되었다고.

 

 

*

별것 아닌 일로 다친 마음을 위로하는 건

역시 별것 아닌 일이다.

 

별것 아닌 일로 마음이 다쳤을 때,

그것을 엄청난 삶의 여정 속의 자그마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삶에서 스치는 소소한 것들에

애정을 쏟을 수 있다면,

우린 풍부한 거품이 넘치는 카푸치노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나는,

아메리카노에 크레마가 가득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웃을 수 있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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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4-06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지만 밝은 모습을 보니
반갑습니다

제게는 자주 카라멜 마끼야또를 사다주는 선생이 하나 있는데...
곤욕스러운 일입니다 ㅠ.ㅠ
자기 부인이 좋아하는 메뉴라고 그러면서 말이지요.

아, 제게는 영 아니거든요 ㅠ.ㅠ
(어떻게 카라멜 마끼야또같은 것이 나오게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저 까페 라떼~!!^^

아니면 자판기가 더 낫더라구요 ㅠ.ㅠ

다음엔 마끼야또 대신에 아메리카노가 어떤 맛인지
그걸로 사오래야 겠습니다 ㅠ.ㅠ

아, 이수역 부근이라면
반포에서 국립묘지방향으로 겠군요 ㅠ.ㅠ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4-07 16:50   좋아요 0 | URL
부드러운 맛을 좋아하신다면 아메리카노는 비추입니다만, 한번 경험해보는 것도 좋겠지요. 전 가끔 독특한 메뉴를 먹어보기도 하거든요. 맥주에 에스프레소를 탄 커피라든가 ㅋ
따듯한 봄날 만끽하시길 :)

차트랑 2012-04-10 00:59   좋아요 0 | URL
맥주에 에스프레소라^^
알코홀 냄새만 맡으면 저는 순간 바로 사망이랍니다 ㅠ.ㅠ
술하고는 상극인지라...
술 잘하는 분들이 제일 부러워요~~

잉크냄새 2012-04-07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것 아닌 일 같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을 스산하게 만드는 건
별것 아닌 일들의 연속이다

별것 아닌 일로 다친 마음을 위로하는 건
역시 별것 아닌 일이다.》

작은 일에 상처를 쉽게 받는 것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고,
또 쉽게 위로받는 것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 근데 저 위에 쓰신 문구가 프랑스 보통씨를 넘어서는 문구같아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4-07 17:10   좋아요 0 | URL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살면서 그렇게 큰일은 겪지 않고 사는 것 같아요. 거의 남들 겪는 일 나도 겪는 수준이랄까요. 별일 아닌 일에 상처받고 위로받는 건 우리가 그만큼 의미부여를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
보통씨의 문장 이상이란 말씀은 너무 과찬이신듯 ㅋ
 

 

*

언제부터인지 나는 '만병의 근원은 마음'이라는 말을 믿어왔다.

일이 정말정말 하기 싫었을 때는 원인 모를 이유로 시력이 흐려져 고생했었고,

'나는 몸이 약해'라는 신념에 젖어 있었을 때는 늘 철이면 철마다 감기를 달고 살았다.

마음이 절망적일 때면 온몸을 여기저기 긁고 다녀서 상처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그래, 몸이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구나.

 

 

올 겨울 들어 무려 4번에 걸쳐 감기가 찾아왔다.

처음엔 정말 오랫만에 감기에 걸렸구나, 정도였고,

두 번째 찾아왔을 땐 일본생활을 접으며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것들을 풀어내야 할 시기,라고만 믿었다.

 

 

하지만 설이 다가오는데, 또다시 감기, 회복.

다시 2월이 다가오는데, 또다시 감기, 회복 중.

정말 사람이 아프면 너덜너덜, 해지는구나.

쉴 새 없이 흐르는 콧물과

뱉어내지도 못해 절절 매는 가래와,

과도한 기침으로 인해 침을 삼킬 때마다 느껴지는 목의 통증.

 

 

희귀병이나 큰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그 시간들을 어떻게 버텨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 되면 떠나가겠지 싶은 감기도 이렇게 길어지고 잦아지면 괴로운데.

 

 

그러다가 어느 날은 너무너무 화가 났다.

에이씨, 나는 지금 일도 거의 안 하고,

잠도 충분히 자고,

바깥을 쏘다니지도 않았고,

큰 스트레스에 노출될 일도 없는데, 왜! 왜! 왜!

내 마음에 뭐가 있어서 그런 거야! 도대체!!!!!

 

 

고작 감기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나의 무력함에 화가 났다.

 

 

그렇다, 무력함.

나는 이게 뭔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력.함.

나름대로 애써봐도 애써봐도,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날들.

그 앞에서 절망했다가 웃었다가 낙관했다가,

이제 될 대로 되버려라,

이 시간도 언젠간 끝나겠지.

시간아 가라, 멀리 저 멀리까지 가버려라.

그러면 또 다시 즐겁고 신나는 시간이 오겠지.

버텨내고 버텨왔던 날들.

 

 

나의 감기는, 나의 그 무력감을 반영하고 있었다.

아파서 콜콜거리며 침대 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용서받는다, 아프니까.

휴식이 필요하니까,

나을려면 쉬어야 하니까.

 

 

하지만 건강한 몸뚱아리로 허비하는 시간들은 비난의 칼날을 받아내야 한다.

젊은 애가!

일도 안 하고!

사지가 멀쩡한데!

남들은 다 맞벌이해서 돈 버느라 정신 없는데!

애기도 안 낳고!

넌 도대체 뭘 하니!

도대체 뭘 하고 사니!!!

 

 

다들 무섭도록 빠른 스피드로 삶을 살아내고 있어서 나는 그게 무서웠다.

처음부터 경쟁할 생각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는데,

내가 하늘을 보고 풀을 구경하고 고양이에게 말을 거는 사이,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

아니, 그들은 달리고 달리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내가 흔들린다.

왠지 나도 두 팔을 걷고 지금부터라도 온 힘을 내어

달리고 달려서, 저들이 쉬고 있을 때도 힘껏 달려서

내 온 몸의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그렇게,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늘 그랬던 것처럼 타박타박 걸어갈 수밖에 없고,

아직 뛸 준비가 안 된 건지, 걸어가는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달릴 힘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감기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길가의 온갖 풀들을 다 짓밟아놓으면서

앞만 보고, 그렇게, 그렇게 달리지만은 않겠다.

 

 

나는 사이좋게,

내 마음이 허락할 때,

내게 아름다운 시기가 열릴 때,

그때 아름답게 걸어가겠다.

느리지만 또박한 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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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2-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리지만 또박한 걸음.
전 인생의 저 걸음을 나름 생각하는데 직장 12년을 보냈습니다.
지금 가는 길이 그 당시 생각한 길인지 지금도 흔들리지만 가슴 한켠에 내가 가야 하는 길은 느리고 또박한 걸음 어딘가에 항상 드리워져 있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판피린 에스가 요즘도 나오나 모르겠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2-22 20:48   좋아요 0 | URL
느리지만 또박한 걸음과 너무 잘 어울리시는 잉크냄새 님.
감기를 떨치고 나니,
요새는 내면을 탐구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시간이 괜히 주어진 게 아니구나, 감탄하는 요즘입니다.

판피린 에스 ;ㅂ;
병원에서 주사 맞고 완쾌했어요. 호홋;

차트랑 2012-02-10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한 이야기지만
식사 잘 하시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시고,
몸을 혹사하지 않으시면
감기와 멀리 지낼 수 있습니다요 ㅠ.ㅠ
애쓰셨습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2-22 20:49   좋아요 0 | URL
그동안 몸은 편했는데 마음을 너무 혹사시켰나 봅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고,
제 몸도 생기를 찾아갑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 :)

2012-03-31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6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밤에 불을 끄고 침대에 누으면 가끔 한밤의 배처럼 흔들리며 선잠을 잤던 그 날을 떠올린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켜놓은 티비에선 삐익-쓰나미 경보가 울리고, 그러면 잠에 취해 눈을 뜬 나와 신랑이 손을 꼭 잡고, 온 집안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흔들림이 잦아들면 꼭 잡은 손을 헐겁게 쥐고 잠이 들고 또 흔들림이 찾아오면 다시 손을 꼭 잡던,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꿈처럼 기억하는.

 

3.11 일본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나는 도쿄 근처의 사이타마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 일본에 온 지 2년이 넘은 그때, 우리는 특별한 희망도 없으면서 왠지 고향은 금의환향해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일본을 떠나지도, 뭘 이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좋은 기회가 왔고, 우리는 그걸 잡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런데, 어지럼증과 같은 지진이 찾아왔다.

오후 3시쯤 추워서 나가기는 싫은데 집엔 먹을 게 없어서 마트를 향해 집을 나섰다. 가까운 곳에 '야오코'란 대형마트가 있지만, 전철 선로 위 육교를 지나면 건너편엔 더 싼 대형마트가 있으니까, 10엔, 20엔이 아까운 나는 자연스레 싼 곳을 향한다.

육교로 가기 위해 길을 걷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왔다. 어어, 왜이러지? 그런데 그건 현기증이 아니라 땅이 흔들리는 거였다. 그리고 저 하늘 위로 새떼들이 한 방향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어디선가 새를 따라가면 죽진 않는다는 얘기가 생각났고, 나는 그곳을 향해 냅다 뛰었다. 그리고 가까운 마트 '야오코'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진이 나자 사람들을 밖으로 대피시킨 것. 대부분의 사람들은 침착했고, 너무 놀란 한 여인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가슴을 쓸어리고 있었다. 그러고도 흔들림은 5분 정도 지속됐다.

 

그때만 해도 가볍게 지나가는 지진이려니, 이 지역에서만 일어난 일이려니,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회사에 있을 신랑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가 되지 않는다. 열 번, 스무 번... 아무리 해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새 공중전화박스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섰다. 다들 통화가 되질 않는다고 난리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별일이야 있겠어. 지진 초보 경험자인 나는 다시 마트를 가다 전봇대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본다. 마트와 가게들이 문을 닫고 비상사태에 돌입하는 것을 본다. 뭔가, 심상치가 않다.

 

어쨌든 티비를 보면 사태를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집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가슴이 철렁. 집안의 온갖 가재도구들이 떨어져있다. 이상하다, 갑자기 눈에 눈물이 고인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마구잡이로 흩어져 있는 가재도구들을 본 순간, 그냥 속상하고 당황스럽고 슬펐다. 티비를 켜고 신랑이 있는 곳에는 사상자와 피해가 없는 것을 확인한다. 070 전화가 울린다. 친구들이 시댁, 친정식구들이 전화를 걸어온다. 신랑과 연락이 되지 않지만 괜찮은 거 같다, 고 대답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냥 집에서 되지 않는 휴대전화에 몇 번이나 전화를 걸며 신랑을 기다리고 있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십 분 이십 분 사이로 여진은 계속 됐고, 집안에 혼자 있는 것이 너무도 무서워서 도저히 그곳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편의점, 거리, 책방... 문을 연 곳이면 어디든.

 

집과 밖을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면서 수백통 전화를 걸고 또 걸고... 그리고 세 시간쯤 지나 6시가 넘었을 무렵, 신랑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고, 많이 흔들리긴 했지만 자기가 있는 곳도 괜찮았다고. 전차는 운행되지 않으니, 천천히 걸어오다가 택시라도 타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신랑이 다음날 새벽쯤 도착할 거라고 예상했다. 전차로 한 시간 거리이니 걸어오려면 밤새 걸어야 할 거라고.

그 와중에도 배는 고파서 마침 문을 닫지 않은 근처 패밀리레스토랑에 들어간다. 사람들이 많다. 천천히 식사를 하면서 사람들 속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혼자, 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나에게 신랑이 있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외로운 거였나.

만약에 혹시 일이 잘못돼서 죽게 되더라도 누군가의 곁에서 죽고 싶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타인이라도, 심하게 냄새나는 더러운 부랑자라도

혼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단 나으리.

뭐 그런 생각을 했다.

 

이 혼자의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하나.

지진과 쓰나미보다

예측할 수 없는 두려운 일에 혼자 놓여 있다는 것이 너무 외롭고 쓸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장장 네 시간을 부런히 걸어 신랑이 왔다.

너무 빨리 와서 깜짝 놀란 나에게,

신랑이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오로지 그 생각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그날 밤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잠을 잤다.

견딜 만했다,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신랑의 손을 꼬옥 잡고 견디면 흔들림은 사그라들었으니까.

다시 집이 흔들리는 공포 속에서도 붙잡을 손이 있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그전부터인지

우리는 손을 잡고 자는 버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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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14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한 버릇이 아니라
좋은 버릇입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1-17 15:04   좋아요 0 | URL
근데 손잡고 자는 사람들이 많이 없을 거 같은 생각이 들어서 :)

차트랑 2012-02-0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침묵이 있으셔서
어디 아프시기라도 한 것인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하고...
뭐 그렇습니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2-09 15:30   좋아요 0 | URL
감기가 걸려서 고생 좀 했어요 ㅠㅠ
 

 

 

 

2011년 가장 충격적이었던 일은,

지하철에서 벌어진 정말 아주아주 작은 사건이었다.

 

한 달에 두 번 복지재단의 잡지 교정을 보러간다.

다달이 날짜는 다르지만 거의 월,화로 잡히는 경우가 많은데,

그날도 월요일, 무척 붐비는 날이었다.

나는 7호선 남성역에 사는데,

이수역 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은 아침시간엔 늘 만원이다.

문이 열리고, 빼곡빼곡 들어차 있는 사람들을 보면 숨이 턱턱 막히지만,

차를 몇 대를 보내도 같은 걸 알기에

과연 내가 들어갈 수나 있을까 싶게 빼곡한 사람들 사이에

내 몸을 구겨넣는다.

옴싹달싹할 수 없는 몸의 부자유보다

제자리를 지키려 뻣뻣하게 구는 사람들의 완고함이 더 불편하다.

그날은, 차를 탈 때부터 문가에 서계시던 젊은 할머니가 팔꿈치를 내세우며 나를 공격해댔다.

오랜 세월 억척스럽게 굴며 살아왔을, 그것만이 나를 생존시켜줄 것이라 믿어왔던 사람의 방식이다.

 

그런데!

잘 달리던 지하철이 갑작스레 급브레이크를 밟는 일이 벌어졌고, 무방비 상태로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옆으로 기울어졌다. 내 옆의 키 큰 아저씨가 큰 고목나무가 베이듯 나를 향해 쓰러져왔다.

허우적대던 나는 순간적으로 문가의 봉을 잡았고, 겨우겨우 넘어지진 않았지만 오른팔이 아려왔다. 봉을 잡지 않았더라면 크게 넘어졌을 상황이었다.

먼저 문가에 서서 봉을 잡고 있던 할머니. 급한 김에 봉을 잡은 내 손은 할머니의 뒷목을 감싸는 형국이 되었고, 옆으로 쓰러지면서 할머니의 목이 죄는(?) 그런 형국이 되었나 보다. 뒤를 돌아 내게 한마디 쏘아붓이는 할머니의 말이 가관이었다.

"아이구, 손을 놨어야지!"

".........??"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던 나는, 순간 내가 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물론 만원 지하철 안에서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니 짜쯩이 날 수도 있다.

날 째려보면서 아프잖아, 라고 무언의 항의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속으론  별별 생각을 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런 말이 입밖으로 나왔다는 게,

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무서웠다.

마치 존재를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괜찮으면 돼!!!!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내렸지만,

그날 하루 내내 머릿속에서 그 말이 맴돌았다.

더 큰일이 생기면 저 사람은 더하겠구나, 싶은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우리 좀더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될까.

조금만 아주아주 조금만 더 다정해지고 너그러지워지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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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0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워낙 섬세하게 잘 쓰시고 묘사력이 탁월하셔서
마치 소설의 한 장면을 읽는다는 착각을 했습니다.
또한 좀더 다정한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한편의 수필을 보는 듯 합니다.

그러나...주어진 상황은 독자를 슬프게합니다.

차라리 전철의 바닦에 혼자 나뒹구는 한이 있더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약간의 불편이 되더라도 관용을 베풀줄 아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회는 도대체 그 어떤 윤리관을 가진 사회인지...
타자가 부정되는 사회는 사회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애민'이라는 말은 임금에게만 해당하는 말은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장자는 우물가의 위태로운 어린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보호하려는 인간의 마음은 본능과 같은 것이어서 그 누구라도 얼마든지 "'선'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철에서의 상황은 마치 '장자님, 그 말씀이 틀리셨네요'라고 말하는 듯해서 더욱 슬프게합니다. 장자의 그 말씀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께 여쭙고 싶은 말씀은..."할머니께서는 전철 바닦에 혼자 쓰러지실거에요?" 낙상하시면 약도 없는데 ㅠ.ㅠ


다음은 저 혼자 중얼거리는 말입니다. '마음을 데려가시는 분' 께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니 심각하게 생각하시지는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늙어가서는 타자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보다 더 힘든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타자를 이해하고 염려해주는 마음을 잃지 않는 사회는 연세드신 분들께서 외롭지 않게 사실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몇해 전 유럽에서는 혹서로인하여 울.리.지. 않.는. 전.화.기. 옆에서 혼자 돌아가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프랑스의 언론이 만들어낸 신조어가 바로 '울리지 않는 전화기'였습니다. 가슴을 무너지게하는 개인주의를 앵커는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도 울리지 않는 전화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될까봐 더럭 겁이납니다. 말씀하신 대로 '믿어지지 않고, 소름이 돗으며, 무서운 일'입니다.

반대로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얼마나 놀랐느냐' 라는 글이었더라면 나는 그 고마움에 눈물이 핑 돌았을 텐데...슬픔으로 눈물이 핑 돌려고합니다..우리집의 전화기도 울리지지 않는 날이 올까봐서요."


그나저나 마음을 더 무겁게 해드렸나봅니다. 다치시지는 않으신거죠??

차트랑 2012-01-0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따구가 싸~ 한 상쾌한 아침입니다.
그러나 겨울 날 치고는 그리 추운 날은 아닙니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저 귀여운 고양이는 집에있는 고양이 입니까요?
블로그에서나 볼 수 있는 이쁜 고양이라서요...ㅠㅠ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1-09 13:32   좋아요 0 | URL
저도 인터넷에서 주워온 녀석입니다.
너무 예쁘죠? 호호호

차트랑 2012-01-07 0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어제에 비하면 더 춥습니다.

차트랑 2012-01-10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워다 키우고 있는 녀석이란 말씀이죠^^
아주 이쁜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