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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 나는 '만병의 근원은 마음'이라는 말을 믿어왔다.

일이 정말정말 하기 싫었을 때는 원인 모를 이유로 시력이 흐려져 고생했었고,

'나는 몸이 약해'라는 신념에 젖어 있었을 때는 늘 철이면 철마다 감기를 달고 살았다.

마음이 절망적일 때면 온몸을 여기저기 긁고 다녀서 상처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그래, 몸이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구나.

 

 

올 겨울 들어 무려 4번에 걸쳐 감기가 찾아왔다.

처음엔 정말 오랫만에 감기에 걸렸구나, 정도였고,

두 번째 찾아왔을 땐 일본생활을 접으며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무의식적 강박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것들을 풀어내야 할 시기,라고만 믿었다.

 

 

하지만 설이 다가오는데, 또다시 감기, 회복.

다시 2월이 다가오는데, 또다시 감기, 회복 중.

정말 사람이 아프면 너덜너덜, 해지는구나.

쉴 새 없이 흐르는 콧물과

뱉어내지도 못해 절절 매는 가래와,

과도한 기침으로 인해 침을 삼킬 때마다 느껴지는 목의 통증.

 

 

희귀병이나 큰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그 시간들을 어떻게 버텨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 되면 떠나가겠지 싶은 감기도 이렇게 길어지고 잦아지면 괴로운데.

 

 

그러다가 어느 날은 너무너무 화가 났다.

에이씨, 나는 지금 일도 거의 안 하고,

잠도 충분히 자고,

바깥을 쏘다니지도 않았고,

큰 스트레스에 노출될 일도 없는데, 왜! 왜! 왜!

내 마음에 뭐가 있어서 그런 거야! 도대체!!!!!

 

 

고작 감기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나의 무력함에 화가 났다.

 

 

그렇다, 무력함.

나는 이게 뭔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력.함.

나름대로 애써봐도 애써봐도,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날들.

그 앞에서 절망했다가 웃었다가 낙관했다가,

이제 될 대로 되버려라,

이 시간도 언젠간 끝나겠지.

시간아 가라, 멀리 저 멀리까지 가버려라.

그러면 또 다시 즐겁고 신나는 시간이 오겠지.

버텨내고 버텨왔던 날들.

 

 

나의 감기는, 나의 그 무력감을 반영하고 있었다.

아파서 콜콜거리며 침대 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용서받는다, 아프니까.

휴식이 필요하니까,

나을려면 쉬어야 하니까.

 

 

하지만 건강한 몸뚱아리로 허비하는 시간들은 비난의 칼날을 받아내야 한다.

젊은 애가!

일도 안 하고!

사지가 멀쩡한데!

남들은 다 맞벌이해서 돈 버느라 정신 없는데!

애기도 안 낳고!

넌 도대체 뭘 하니!

도대체 뭘 하고 사니!!!

 

 

다들 무섭도록 빠른 스피드로 삶을 살아내고 있어서 나는 그게 무서웠다.

처음부터 경쟁할 생각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는데,

내가 하늘을 보고 풀을 구경하고 고양이에게 말을 거는 사이,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다.

아니, 그들은 달리고 달리고 있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내가 흔들린다.

왠지 나도 두 팔을 걷고 지금부터라도 온 힘을 내어

달리고 달려서, 저들이 쉬고 있을 때도 힘껏 달려서

내 온 몸의 에너지가 소진될 때까지, 그렇게,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늘 그랬던 것처럼 타박타박 걸어갈 수밖에 없고,

아직 뛸 준비가 안 된 건지, 걸어가는 것에 익숙해져서인지,

달릴 힘이 생기질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감기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길가의 온갖 풀들을 다 짓밟아놓으면서

앞만 보고, 그렇게, 그렇게 달리지만은 않겠다.

 

 

나는 사이좋게,

내 마음이 허락할 때,

내게 아름다운 시기가 열릴 때,

그때 아름답게 걸어가겠다.

느리지만 또박한 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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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2-10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리지만 또박한 걸음.
전 인생의 저 걸음을 나름 생각하는데 직장 12년을 보냈습니다.
지금 가는 길이 그 당시 생각한 길인지 지금도 흔들리지만 가슴 한켠에 내가 가야 하는 길은 느리고 또박한 걸음 어딘가에 항상 드리워져 있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판피린 에스가 요즘도 나오나 모르겠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2-22 20:48   좋아요 0 | URL
느리지만 또박한 걸음과 너무 잘 어울리시는 잉크냄새 님.
감기를 떨치고 나니,
요새는 내면을 탐구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시간이 괜히 주어진 게 아니구나, 감탄하는 요즘입니다.

판피린 에스 ;ㅂ;
병원에서 주사 맞고 완쾌했어요. 호홋;

차트랑 2012-02-10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한 이야기지만
식사 잘 하시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시고,
몸을 혹사하지 않으시면
감기와 멀리 지낼 수 있습니다요 ㅠ.ㅠ
애쓰셨습니다~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2-22 20:49   좋아요 0 | URL
그동안 몸은 편했는데 마음을 너무 혹사시켰나 봅니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고,
제 몸도 생기를 찾아갑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 :)

2012-03-31 0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6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