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통 그리고 저항


서울혁신파크는 은평구 녹번동에 있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누군지 몰라도 이름 참 못 짓는다고 생각했다. 혁신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에 파크라는 친숙한 영어단어를 붙였다. 그래서 여기가 뭐하는 곳인데? 이런 작명이야말로 최악의 예시로서 적절하다. 이 넓은 땅은 과거 질병관리본부가 있던 곳이다. 국립보건원이라고 불렀던 적도 있었다. 이곳은 내겐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곳이다. 처음 환경단체 신입 활동가로 일할 당시에 국내에서 생산하는 대부분의 젤라틴은 미국에서 공업용으로 수입한 소가죽이 원료라는 제보를 받았다. 그것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수입된 소가죽을 그냥 쓰는 것도 아니고, 신발 공장이나 가방 공장에서 재단하고 버린 쓰레기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선배 활동가들이 제보자와 함께 젤라틴 공장으로 들어가는 원료를 추적했다. 놀랍게도 제보는 사실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소비자들, 특히 젤라틴이 주로 들어간 과자나 젤리 등을 좋아하는 아이를 둔 엄마들이 무척 화를 냈다. 젤라틴이 들어간 제품 중에 가장 많이 판매되는 것은 아마도 쵸코파이일 것이다. 지금껏 우리 아이가 얼마나 많은 쵸코파이를 먹었는데, 그 재료가 온갖 화학약품으로 처리(미국에서 한국으로 해양 운송하는 수 개월동안 썩지 말라고)해서 긴 시간 항해를 통해 건너온 공업용 소가죽이었다는 것을, 그것도 신발 공장과 가방 공장으로 먼저 가서 각자 필요한 만큼 가위로 재단한 후에 쓰레기로 버려진 것들을 주워다가 만든다는 사실을 알면 누가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오래 전에 이 건으로 식약청, 국립보건원 등과 싸웠다는 사실을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면 다들 엄청나게 놀라며 어떻게 그런 일이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느냐고 묻는다. 더 놀라운 사실은 결국 그 싸움은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잊혀졌고, 지금도 여전히 국내에서 생산하는 젤라틴은 그런 방식으로 만들고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젤라틴이 들어갔을거라고 추정되는 과자나 젤리 등을 먹지 못하게 했다. 해외에서는 식품으로 소비될 수 있는 깨끗하고 안전한 재료로 젤라틴을 만든다. 특히 유럽에서는. 그래서 젤리는 무조건 해외 제품을 사줬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냐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뼈를 긴시간 우려내서 먹는다. 그래서 소뼈도 비싸다. 해외에서는 젤라틴을 만들 때 주로 소뼈를 이용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비싼 소뼈를 이용하면 수지가 안 맞으니 소가죽을 끓여서 만다는 것이다. 게다가 과거엔 신발공장과 가죽공장에서 버려지는 쓰레기를 공짜로 가져다 만들었기 때문에 원료비가 들지 않았다. 젤라틴 공장이 신발공장과 가방공장에서 적은 금액일지라도 쓰레기를 돈을 주고 산 일 자체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제보자에게 듣기도 했다.


자, 여기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질문이 있다. 당신이 저 사실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어차피 오래 전에 환경단체에서 싸웠는데 아무것도 바꾸지 못 했다며? 그럼 내가 뭘 더 할 수 있겠어?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하고 가만히 있을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식품의 재료가 공업용으로 수입된 원료라는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 상황이 잘못이라고 목소리를 내볼 것인가? 적어도 쓰레기로 버려졌던 자투리 소가죽으로 우리 아이들 입에 들어가는 먹거리를 만들지는 말자고 얘기하는 것은 과연 잘못일까?


엊그제는 서울시장이 서울혁신파크 부지의 대부분을 민간 기업에 팔아먹겠다고 설명회를 열었다. 앞서 내가 최악의 작명이라고 했던 그 서울혁신파크는 그간 참 말이 많은 곳이었다. 소위 사회혁신의 실험실이라고, 공적서비스와 사회적경제를 키우는 요람이라고 했던 공간이었는데, 정작 시민들에게는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그래서 우리 사회가 뭐가 어떻게 좋아지는지 와닿을 수 없었던 곳이었다. 일단 그래서 정말 그 공간이 소위 말하는 혁신적 실험을 제대로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에 제대로 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과연 그랬을가 하는 의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공간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과거 서울시는(즉 불명예스러운 성폭력 사건으로 자살한 과거의 서울시장은) 혁신파크라고 이름붙인 이 곳에 마을공동체 지원센터, 협동조합지원센터, 50플러스 지원센터 등 다양한 공적 서비스를 중계하는 조직들을 잔뜩 집어넣었다. 흔히 중간지원조직이라 불렀던, 이 역시도 그냥 들어서는 잘 감이 오지 않는 모호한 이름의 이 조직들은 공무원들이 조직적인 한계로 잘 하지 못하는 일들, 시민들은 사람과 자원을 모으지 못해서 하기 어려웠던 일들을 도맡아 하면서 시민들을 혹은 공동체를 돕는 일을 하는 곳들이었다. 이 여러 중간지원조직들이 혁신파크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서울시민들의 삶을 위해 노력하는 공적 서비스를 제공했던 것은 사실이다.


서울혁신파크의 또 하나의 의의는 공원으로서의 기능이다. 이름 끝에 파크라는 영어단어가 괜히 붙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엔 100여그루의 오래된 나무들과 그 나무들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다양한 생명들이 서식하고 있다. 그리고 넓다면 넓고 좁다면 좁게 볼 수 있는 이 공간들을 산책로 삼아 걷고, 반려동물들을 산책 시키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다. 달리기 열풍이 불었던 최근에는 산책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달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 역시 동네 언니들과 여기서 달리기 모임을 이어오기도 했었다. 시민들은 저 건물들 안에서 무슨 혁신이 일어나는지, 무슨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무슨 사회적경제가 성장하는지는 잘 몰라도 일단 이 공간 자체를 공원으로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서울시 업적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은 현재의 서울시는(즉 급식 공약에 무리하게 직위를 걸어 쫓겨났다가 나중에 공석이 된 서울시장으로 다시 돌아온 현재 서울시장은) 시민들이 갖고 있는 서울혁신파크에 대한 반감과 넓은 땅에 대한 개발 심리를 부추겨 이 곳을 폐쇄하고 재개발하겠다고 선언했다. 60층짜리 초호화 빌딩을 짓겠다는 황당한 조감도를 들이밀었다. 여기에 입주했던 다양한 중간지원조직들, 사회적경제 기업들 모두 쫓겨났다. 시민들이 긴시간 자발적으로 만들고 운영해 온 아름다운 공간들도 모두 폐쇄되었다. 한평책방은 말 그대로 작은 공간에서 책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행사를 작은 규모로 시민들이 직접 열고 참여할 수 있도록 운영했던 멋진 곳이었다. 양천리 갤러리는 평범한 시민들이 직접 배운 솜씨로 그린 작품들을 전시하고 관람객인 시민들과 소통하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많은 시민들이 땀흘려 농사를 체험했던 텃밭도 없어졌고, 여기저기 소소하게 존재했던 여러 의미있는 공간들이 차례로 사라졌다.


서울시는 입주기관 및 기업들을 모두 쫓아내더니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를 내세워 민간자본을 유치해 개발하겠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막상 거대한 개발 구상을 실현할 자본을 유치하기가 어려워지니 구체적인 개발 계획도 없이 먼저 일부 건물들을 철거하겠다고 나섰다. 시민들이 매일 이용해온 공원은 이제 철거공사를 위한 울타리가 쳐진 흉물스럽고 위험하고 불안한 공간으로 변했다. 많은 시민들은 이 공원을 그대로 공공의 공간으로 두라고 요구했다. 수백억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유치해 개발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 물론 일부 시민들은 이 공간이 개발되면 땅값이 올라갈 것이라는 심리를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은 절대 서울시의 황당한 조감도 한 장처럼 개발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대규모 개발 후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수많은 선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촌민자역사, 세운상가 공중보행로, 세빛둥둥섬,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등 그냥 떠올려봐도 몇 가지 예가 나온다. 게다가 은평구에는 이미 방치된 대규모 상업시설이 있다. 그것도 혁신파크 바로 근처에 있다. 현재 NC백화점으로 불리는 건물은 한때 무슨 아울렛이었다가 팜스퀘어로 바뀌었다가 다시 백화점이 되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정도 규모의 상권이 형성되기 어렵다는 이유다. 팜스퀘어 시절에도 건물 중간 층들 일부는 거의 대다수 매장이 폐업 상태로 텅텅 비어있었다. 지금은? 최근에 올라가 본적은 없지만, 몇 해 전에도 중간 층 대다수 매장이 비어있었다. 여기에 60층 상업 빌딩을 짓겠다고? 어느 기업이 그걸 투자해서 얼마나 수익을 가져갈 수 있을까?


그래서 현재의 서울시는 아마도 민자유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예 땅을 민간기업에 팔아먹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그 설명회가 열렸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땅이 서울시의 소유라고, 서울시장이 원한다고 마음대로 팔아먹을 수 있을까? 서울시장은 겨우 임기는 겨우 4년이고, 지금 이 땅을 매각해도 이 땅의 실제 개발은 4년보다 훨씬 후에 이뤄질 것이다. 게다가 우리 시민들은 시장에게 이 땅을 팔아먹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공공의 영역에 속한 땅을 누구 허락을 받고 마음대로 기업에 팔아버리겠다는 건가? 


엊그제 해당 설명회에 참석한 일부 시민들이 이 설명회가 왜 문제가 있는지를 주장하다가 억지로 끌려나왔다. 해당 장면이 사진과 영상으로 퍼지며 또 다시 많은 시민들이 분노했다. 익숙한 장면이다. 국가나 지자체가 개발 사업의 설명회를 열면 생업으로 바쁜 많은 시민들은 관심도 없고, 그런 설명회의 개최 여부 자체를 잘 알 수 없다. 그럼 누가 참여하는가? 두 종류의 사람들이다. 그런 개발 계획이 자신들의 재산을 불리는 데(즉 땅값을 올리는데) 유리하다고 판단한 일부 사람들과 해당 개발 계획이 수십년 동안 일군 자신들의 생활 터전을 박살내버려 삶 자체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절박한 시민들이다. 이 시민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달라고, 개발 계획의 수립 과정에 당사자의 목소리를 반영해달라고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이지만, 권력은 결국 이들을 설명회장에서 폭력적으로 끌어낸다. 왜 21세기 법치국가이자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이런 상식적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어제 보니 혁신파크의 일부 건물들을 철거하는 작업이 이미 시작되었다. 혁신파크의 민간 매각을 반대하고 무계획한 개발과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들은 지난 8월 말부터 농성장을 꾸렸다. 매일 당번을 정해 농성장을 통해 시민들에게 이 내용을 알리고 서울시에 항의하고 있다.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몇 차례 농상장 야간 지킴이로 참여했다. 밤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길 위에 펼친 작은 천막에서 보내는 것인데, 교통 소음과 여러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쉬운 일이 아니다. 시민들과 전혀 소통할 마음이 없는 서울시의 태도, 이미 철거가 들어간 시점에서의 농성의 의미, 민간 매각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기업들, 위험하고 불안한 공간으로 변했음에도 여전히 반려동물과 산책하고 달리기를 하러 이용하는 시민들. 농성장에서 맞은 오늘 아침에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어제는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공청회가 열렸다. 이번 11차 기본계획은 정말 문제가 심각한데, 오늘은 거기까지 쓸 여력이 없으니, 이 건은 다음에 풀어보겠다. 문제는 어제 이 공청회에 참여했던 18명의 활동가를 수갑을 채워 연행했다는 점이다. 이 활동가들은 시민이다. 시민이면 누구나 정부 정책을 논의하는 공청회에서 의견을 낼 수 있다. 더구나 이들은 지난 9월 7일 열렸던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약 3만명 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경찰은 18명을 체포한 것이 아니라 3만명의 시민을 체포한 것이나 다름없다.


어제 체포된 활동가들의 SNS를 보니 너무 참담하고 어이가 없었다. 어떤 분들은 앞으로 수갑이 채워져 연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어떤 분들은 뒤로 팔을 꺾어 수갑을 채워서 심각한 고통과 인격 모독이 이뤄졌다. 연행 과정에서 미란다 원칙 고지가 제각각 이뤄졌겠지만, 누군가는 정작 가장 중요한 연행의 죄목을 듣지 못했다고도 했다. 체포되는 당사자가 제대로 듣지도 못하는 고지는 무슨 의미가 있나. 이들이 무슨 범죄를 저지른 범법자도 아닌데 경찰은 폭력을 휘두르며 사지를 들고 끌거 나갔다. 퇴거불응죄. 연행 이후 조사 과정에서 들은 죄목이라고 한다. 애초에 국민들 의견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황당하고 어이없는 정책을 만들어 놓고는, 이제와서 퇴거하라는 명령에 불응했다고 연행을 한다. 왜 정부 관료라는 인간들은 수개월간 수천명이 요구한 것들을 무시하고, 말을 안 들어 쳐먹어도 괜찮고, 국민들은 경찰이 한 마디 했다고 그냥 네, 알겠습니다. 하고 내려와야 하나? 


해야할 일들도 많고, 읽어야 할 책들도 많은데 이런 몰상식한 일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뺏기는 것이 아쉽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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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4-09-27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구 담담책방 목사님도 책방을 지켜야 하는데, 정부와 대구시청이 일으킨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나서느라 동분서주 애를 쓰고 있습니다. ㅠㅠ

감은빛 2024-10-08 00:00   좋아요 0 | URL
오늘도 농성장 야간 지킴이를 하고 있어요. 지금 농성장에서 이 댓글을 씁니다. 여기저기 참 문제가 많은 시대예요.

잉크냄새 2024-09-28 2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야만의 시대로 희귀하는것 같군요.

감은빛 2024-10-08 00:01   좋아요 0 | URL
정작 이 문제를 일으킨 인간들만 왜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것 같아요. ㅠㅠ

희선 2024-10-01 0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라는 거기 사람이 살기 좋아야 하는데... 서울뿐 아니라 여기 저기에서 개발은 사라지지 않네요 지금도 잘 안 되는 곳에 60층 짜리 빌딩을 짓겠다니... 시민과 이야기를 하고 뭔가 하면 좋을 텐데, 그런 건 어느 곳이나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지방도 그럴 듯... 관심을 갖고 살지 못하지만 그럴 듯합니다


희선

감은빛 2024-10-08 00:02   좋아요 0 | URL
개발은 무조건 좋은 거라는 환상에서 좀 벗어나야 하는데, 그걸 모르니 답답합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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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매한 건 우연히 본 어떤 장면 때문이었다. 친한 선후배 활동가들과 여름에 어느 계곡에 놀러 갔을 때였다. 수영을 못 하기도 하고, 계곡에 발 담그고 있는 것 외엔 별로 할 일도 없다 느껴서 나는 물가에 앉아 긴 시간 책을 읽고 있었다. 대부분 물놀이를 즐겼고, 일부는 조금 놀다가 책을 읽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창 신나게 물놀이를 즐기던 한 사람이 내 옆에서 책을 읽던 다른 동료 활동가가 잠시 놓아둔 이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읽었던 책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그 순간 물놀이도 잊고 책에 빠져서 정신없이 읽고 있는 그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그 기억은 아마 평생 잊기 어려울 것이다. 당시엔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많이 재미있고, 많이 팔린다는 정도만 알았다. 이 소설의 지은이가 [빨치산의 딸]을 쓴 그 정지아라는 것도 몰랐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통해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평생을 돌아보는 내용이라는 것도 몰랐다.


나중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후에야 그때 그 선배가 왜 그렇게 이 책에 몰입할 수 있었는지 조금 알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여겼다. 그건 그 선배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그가 담담하게 들려준 몇 가지 이야기들 덕분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여름 시점에서 비교적 최근의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내용이라는 점이 하나의 몰입 포인트가 되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 들은 기억은 없지만, 일단 그는 운동권이었고, 활동가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좌익과 진보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 당사자로서의 공감도 컸을 것이다. 또 딸과 아버지의 이야기라는 측면에서의 동질감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그 당시 그는 장례식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다가 이런 이야기도 꺼냈었다. 딸인 자신이 아픈 아버지의 대소변을 치우다보니 자연히 아버지의 성기를 보았던 것이고, 자신의 존재의 기원인 그곳을 본 것이 참 묘한 기분이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만, 이 소설 안에서도 주인공인 딸이 아버지의 성기를 보고 처음으로 자신과 아버지가 성별이 다르다고 느낀 날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극적인 기억이 남아있을지 혹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우리 딸들도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나와 같은 여성이지만, 아빠는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는 어떤 순간이.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빨치산의 딸] 1권과 2권을 다 읽었다. 이것도 참 우연한 기회였다. 사실 [빨치산의 딸]을 읽지 않았다면 곧바로 이 책을 찾아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에어컨 없이 선풍기 두 대만으로 열대야를 견디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에어컨이 있는, 혼자 사는 친한 지인들의 집으로 피서를 다녔다. 그 중 한 친구 집에 며칠 연속 머물 때였다. 주말 낮에 책을 읽으러 카페에 가자고 하길래 따라 나서려는데, 자기 집 책장에서 책을 꺼내오라고 했다. 음, 뭐가 좋을까 생각하면서 눈으로 책장을 훑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이 책 읽었어요? 물으며 꺼낸 것이 [빨치산의 딸] 1권이었다. 당연히 그 옆엔 2권도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읽지는 못했었고 그의 권유대로 그 책을 들고 나갔다. 그리고 삼일만에 2권까지 다 읽었다. 정지아 작가가 부모님의 기억을 바탕으로 썼을 [빨치산의 딸]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역사책에 가깝다 느꼈고, 제목엔 딸이 들어가지만, 프롤로그를 제외하고 본격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각각의 삶을 담고 있는 본문에는 딸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사실 나는 각각 다른 조직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만나 결혼하고 딸을 낳았는지 궁금했지만, 그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 모두 산에서 내려오게 된 부분에서 끝난다. 이 궁금증은 이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야 풀린다. [빨치산의 딸]을 읽을 때 전투와 생존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는 강인한 의지와 열망 등을 읽으며 흥분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아버지 편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몇몇 여성 동지들 중 누가 어머니인가가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어머니 편을 읽으면서는 또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고, 두 사람의 접점이 거의 없어서 의아했었다.


앞서 [빨치산의 딸]이 소설이 아닌 역사책에 가까운 것이라고 썼다. 그에 비해 이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소설로서 훨씬 더 짜임새를 잘 갖춘 훌륭한 작품이라 느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그 장례를 치르는 3일 동안 겪는 이야기들 속에 아버지 평생의 인간관계와 신념과 소탈한 모습 등을 잘 담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점점 이야기가 뒤로 가면 갈수록 과거 회상들이 더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조금 답답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애초에 이 소설은 그것을 위해 쓴 것이기 때문에 그 답답함은 감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이 이렇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은 주인공인 딸을 제외한 거의 대다수가 사용하는 전라도 사투리의 힘이 크다고 느낀다. 말맛이라는 것을 어쩌면 이렇게 잘 살릴 수 있을까 감탄을 하며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충청도 사투리의 맛을 정말 잘 살리는 작가가 이시백 선생이라면, 전라도 사투리는 단연 정지아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전라도 사투리를 잘 알지 못해서 멋진 대사들을 감칠맛 나게 읽지 못해 너무나도 아쉬웠다. 이 책을 읽는 순간만 고향을 구례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조금 의아하기도 하고 조금 아쉽기도 한 점은 어머니의 비중이 너무 적었다는 것이다. [빨치산의 딸] 프롤로그를 읽었을 때 그려지는 어머니의 어떤 냉철하고 강인한 이미지가 참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정지아 작가가 어머니를 주로 그리는 이야기를 꼭 쓰시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빨치산의 딸]과 [아버지의 해방일지]까지 주욱 읽으면서 반성을 많이 했다. 나는 참 부모님들께 잘 못하고 살았구나. 이제부터라도 좀 달라져야지 이런 생각들을 했지만, 현실은 또 언제나 생각처럼 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자주 연락이라도 드려야지 생각하고 실천하고 있다. 또 한 편으로는 아빠로서 우리 딸들에게 나는 어떤 아버지인가 하는 점에서 또 많은 좌절과 후회를 하게 된다. 


나는 과거부터 최근까지 내가 이렇게 평범하지 않은, 활동가라는 삶을 살아온 이유로 아버지를 들고 있다. 아버지는 노동조합 조합장으로서 노동운동을 하셨고, 독재에 저항해 싸운 민주화 운동가이기도 하셨다. 비록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어 다른 곳을 바라보고 계시지만, 과거의 아버지는 그랬다. 나는 그 과거의 아버지가 참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고 여겼다. 내 비록 평생 노력해도 그 발끝만큼도 따라가지 못하겠지만, 나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은 운동가, 활동가가 되겠다고 다짐하곤 했었다. 한때 같이 일했던 후배 활동가는 나의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나를 '성골 빨갱이'라고 부르곤 했었다. 근데 엄밀히 말하면 성골은 양친이 모두 왕족이어야 하니, 진골 빨갱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뒤늦게 해본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지인들의 부모님 부고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모님의 부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 부모님도 돌아가실테고, 나도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예전에는 이게 이렇게 생각하거나 말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다시 한번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더 잘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돌아간다. 평생을 속만 썩이며 살았는데, 뭐 얼마나 달라지겠느냐마는 그래도 노력이라도 해봐야겠지.


이 책은 조만간 큰 아이 책상 위에 말없이 두고 올 생각이다. 아이가 흥미를 느끼고 펼쳐볼 확률은 높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관심을 가지면 엄청 기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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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리고 어떤 기다림

간 밤엔 비가 왔다. 아침에 잠시 그쳤다가 다시 또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내리고 있다. 빗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있으면 여러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제일 처음 생각나는 건, 담배 연기다. 아마 15년 쯤 전부터 약 10년 전까지 일했던 출판사에 있을 당시 기억이다. 처음 그 출판사에 들어갔을 때에는 그 건물 5층에 사무실이 있었다. 당시엔 잡지 기자들이 다수였고, 단행본은 아직 없던 시절이라 나 혼자 단행본 일을 했었다. 그러다 잡지 비중을 줄이고 점점 단행본 중심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같은 건물 2층으로 사무실 규모를 줄여 이사했다. 원래 그 건물 1층과 지하에는 큰 인쇄소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2층 맨 안쪽 사무실 뒤쪽 유리문을 열면 건물 뒤쪽 주차장이 내려다보이는 베란다 같은 아주 좁은 공간이 나온다. 인쇄소가 있던 시절에 여기에 큰 도르레가 걸려있어서 지하에서 찍은 책 더미를 주차장으로 끌어올렸다고 들었다.

그 뒷문 앞 아주 좁은 콘크리트 바닥 공간(이걸 베란다나 테라스라 부르기도 애매하고 다른 마땅한 이름을 찾지 못하겠으니, 그냥 좁은 공간이라 부르자.)은 골초인 사장이 흡연 공간으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다. 나는 그 좁은 곳에서, 게다가 그 뒷문으로 가려면 자연스레 사장 책상 앞을 지나야 하는데, 일하다 말고 담배 피우러 가면서 대놓고 사장 앞으로 지나가길 원하는 노동자는 없지 않을까 싶다. 암튼 그래서 나는 그 좁은 공간에서 담배를 즐겨 피우지는 않았다. 간혹 사장이 없는 날에 이용하거나 비가 제법 와서 아예 밖에 나가기 곤란한 날에 거기서 담배를 피웠다. 비가 오는 날이면 문을 여닫는 공간을 제외하면 딱 두 사람, 억지로 서면 겨우 세 사람이 설 수 있는 그 공간에서 흡연자들이 모여 담배를 피워댔다.

내가 기억하는 바로 그 순간은 아마도 전날 제법 술을 많이 마신 후의 다음날 오후였다. 아침부터 계속 비가 왔고, 제법 많이 왔다. 사장과 기자들은 오전에 회의를 하고 오후엔 자리에 없었다. 덕분에 나는 오후에 사장 눈치를 보지 않고 그 공간에서 천천히 담배를 음미했다. 빗소리와 함께 담배가 타들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어떤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엔 아마도 폭우를 함께 맞으며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만난 작은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에서 잠시 비를 피하며 꼭 껴안고 있었던 어떤 여성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때 이미 삼십대 중반이 넘어섰던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청춘의 순간들을 담배 연기로 태우고 또 태우며 줄 담배를 피웠던 것 같다.

두 번째 떠오르는 것은 바로 앞에 얘기한 그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에 피해있을 당시에 등을 기대고 있었던 미끄럼틀 쇠기둥의 질감이다. 맨들맨들하게 둥근 기둥이었지만 페인트 자국이라고 해야하나? 아주 작게 물방울 처럼 돋아오른 돌기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게 금속처럼 날카롭거나 딱딱하지는 않아서 기대어 있어도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 살짝 돋아오른 만큼의 질감이 고스란히 젖은 내 반팔 셔츠를 통해 내 등으로 전해졌다.

아마 일요일 오후였고,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서너시쯤이 아니었을까? 왜 그랬는지 평소보다 일찍 돌아가겠다고 한 그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나섰을 때는 아직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오리라 예상도 못 해 우산을 챙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음, 아마도 일요일 아침 일찍 그가 내 자취방에 밑반찬 등을 싸온 날이었을 것이다. 같이 밥을 먹고 뒹굴거리다가 다음날 일정 때문에 일찍 가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버스 맨 뒷 자리에 손을 잡고 나란히 앉아, 산복도로를 휘휘 돌아 올랐다가 다시 내려가는 어지러운 도로를 지났다. 재잘재잘 그는 내게 끊임없이 어떤 이야기들을 했고 나는 웃으며 듣고 있었다.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또 먼 거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그가 사는 동네에 도착해 그냥 헤어지기 아쉬운 마음에 커피숍에 앉았었다. 한참 떠들다고 이젠 들어가야 한다고 그가 일어섰고, 나는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함께 골목을 걸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그렇게 짧은 순간 갑자기 그렇게 많이 비가 그렇게 사정없이 쏟아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어버린 우리는 손을 잡고 뛰었는데, 그의 집까지는 골목을 따라 한참을 더 가야했다. 중간에 만난 작은 놀이터를 보자 그가 내 손을 당겨 미끄럼틀 아래로 이끌었고, 완전히 젖은 채 덜덜 떨고 있던 그를 꼭 끌어안아줬다.

그 미끄럼틀 아래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중에 비가 많이 잦아든 후에 가족들 몰래 그의 집에 살금살금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그의 남동생 옷을 빌려 입었던 것은 기억난다.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드디어 다 읽었다. 몇 번째 시도인지, 몇 년만인지는 기억나지도 않고 따지기 어려울 것 같다. 적어도 10년 가까이 되었으리라 하고 막연하게 추정해 볼 뿐. 늘 앞부분은 흥미롭게 읽었다. 포기했다가 다시 시도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앞부분은 계속 기억에 남아있어서 더 쉽게 읽히기도 했다. 마치 성문기본영어나 수학의 정석 같은 기본 참고서들이 책의 앞쪽만 공부한 흔적이 가득하고 중간 이후로는 깨끗한데,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고 또 맨 앞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매번 그렇게 앞부분을 가볍게 시작했다가 뒷부분에서 다시 책을 내던지고 말았다.

늘 막혔던 곳은 세번째 수기의 뒷부분이었다. 왜 이 부분을 읽어서 뒤로 넘어가는 것이 내게 그렇게 힘든 일이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 다 읽어보니 그 즈음에서 이미 이야기는 거의 끝나있었다. 마지막은 후기로 맨 앞의 서문을 쓴 가상의 인물이 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글이었다. 겨우 이 분량을 다 못 읽어서 그 긴 시간 이 책을 마음 한 켠에 계속 쌓아두고 있었던 것 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에 소설을 끝내고, 그 뒤에 수록된 짧은 [직소]도 얼른 읽어버리고 번역자가 쓴 작품해설 부분을 꼼꼼하게 읽으며 작가에 대해 생각했다.

다자이 오사무, 본명 쓰시마 슈지. 아오모리 현 쓰가루의 부유한 집안 11명의 자녀 중 열번째로 태어난 사람. 세심하고 예민했으며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공부 머리는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그런 사람이 서른 아홉살이라는 아직 채 마흔도 되기 전에 다섯번째 자살시도 끝에 생을 마감했다. 이 소설 [인간 실격]은 쓰다가 죽은 미완의 유작 [굿바이]를 제외하면 마직막 작품으로 실제적인 유작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주요한 경험들이 많이 투영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본문과 뒤쪽 작품해설에 계속 등장하는 정사(情死)라는 단어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워 사전을 찾아봤다.
˝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함께 자살함˝이라고 나왔다. 소설 속 요조와 쓰네코의 자살시도는 이 사전 속 뜻이라고 보기는 살짝 어렵다고 느낀다. 분명 어떤 의미로든 사랑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함께 자살을 시도했겠지. 하지만 그 자살의 이유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쓰네코는 남편일을 비롯해 주점에서의 생활 등 다양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수기의 주인공 유지 역시 쓰네코를 향한 이루지 못할 사랑 때문이 아니라 훨씬 더 심각한 여러 이유가 있었다.

작가의 삶에서 시도한 두번째와 네번째 그리고 다섯번째 자살 시도 역시 단순히 저 사전의 뜻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은 똑같다. 작품해설에서 번역자 김춘미 선생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듯이 두번째 시도는 쓰시마 가문에서 내쫓긴 것 처럼 되어버린 상황에 대한 감정과 그 원인이 된 여성이 주 원인이었을 것이고, 앞서 첫 자살시도의 원인이었을 개인적인, 사회적인 이유들 역시 여전히 유효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때 함께 자살을 시도했던 여성은 안지 얼마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네번째 시도는 두번째 자살시도에 원인을 제공했던, 그리고 자신을 정신병원에 넣어버려서 또 한번 배신감을 느꼈을 아내 하쓰야와 함께였다. 이 두 건에서 사랑을 주요 이유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끝내 성공해버려서 마지막 시도가 되어버린 다섯번째는 그 이면에 사전의 뜻이 어느 정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함께 죽은 야마자키 도미에 라는 여성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작가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곁을 지킨 사람이라는 문구 외에 다른 설명이 없다.

어쨌거나 총 다섯번의 자살 시도 중 세 번을 여성과 함께 시도했고, 그 모두 여성은 죽었다. 마지막엔 함께 죽었으니, 그 앞의 두 번은 모두 여성만 죽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그냥 단순히 이 사실만 접했다면 어느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이야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아주 오랜만에 반가운 이름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기다리는 동안 이 글을 폰으로 두드리고 있었는데, 이제 거의 도착했다고 한다. 감기 몸살 기운에 썩 몸이 좋지 않으니 저녁을 간단히 먹고 가볍게 차를 마실 예정이다. 막걸리에 파전이 땡기는 날이지만, 참아야지.

아, 원래는 길거리 농성장 텐트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잔 이야기도 쓰려고 했는데, 그건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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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9-13 19: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13일의 금요일이군요!!
저도 오늘 해물파전 너무 먹고싶었어요. 날씨 때문인가 봐요 ㅠㅠ

감은빛 2024-09-22 13:54   좋아요 0 | URL
해물파전은 비가 와도, 비가 안 와도 늘 먹고 싶은 음식인가봐요.
오늘은 비도 안 오는데, 막걸리에 파전이 땡기네요. ㅎㅎㅎㅎ

바람돌이 2024-09-13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우리 동네 해물파전 인생맛집 있어요. 저녁 먹어서 배 빵빵한데 이 글 보니 그 파전 먹으러 가고싶어진다는...
올 여름은 비가 너무 안와서 한번쯤 쏟아졌으면 하네요. 이놈의 더위도 좀 가라앉게 말이죠

감은빛 2024-09-22 13:57   좋아요 1 | URL
그 인생 맛집 정말 궁금하네요.
바람돌이님 댁이 제 고향인 부산인 걸로 알고 있는데, 맞죠?
정말 더운 추석과 9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또 기온이 확 떨어지네요.
참, 부산엔 비가 엄청 많이 왔다고 하던데, 혹시 피해는 없었나요?
비가 오는 건 좋은데, 자꾸 이렇게 폭우가 와서 피해가 생기니 큰일이네요.

바람돌이 2024-09-22 14:11   좋아요 1 | URL
동래지하철역 앞에 있는 동래산장1988이라는 집입니다. 달달한 지평막걸리 하나 시켜서 해물부추전 하나 시켜먹으면 천국입니다. 아 파전 아니고 부추전이에요. ㅎㅎ 혹시 부산 와서 이 근처 오시면 추천합니다. 부추전이 진짜 바삭해요. 제가 주인장한테 비결이 뭐냐고 물어봤는데 특별한거 없다고 그냥 불조절이 제일 중요하다더군요. ㅠㅠ 비법탈취 실패했습니다. ㅎㅎ
부산은 사실 올해 처음으로 비가 좀 왔습니다. 피해만 없다면 다행인 비였는데 피해가 없을수는 없네요. 부디 비 피해ㅜ입으신분들이 빨리 회복할 수 있기를 기원할뿐요

감은빛 2024-09-26 19:08   좋아요 1 | URL
아하! 꼭 기억해둘게요.
동래 전철역이 이래저래 거리가 살짝 애매하긴 한데,
언젠가는 갈 날이 생길지도 모르고,
어쩌면 금방 거길 찾아갈지도 모르고. ㅎㅎㅎㅎ

저도 한때는 전을 좀 잘 굽는 편이었는데요.
한동안 안 하다보니 이젠 자신이 별로 없네요.
동네 사람들이나 친구들이나
다들 제가 막 구운 김치전, 파전, 부추전 등을 엄청 좋아했었는데요.

cyrus 2024-09-14 08: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구는 여전히 여름입니다. 가끔 예상치 못한 소나기가 내리긴 해요. 저는 새벽에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읽어보려고 해요.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

감은빛 2024-09-22 14:00   좋아요 0 | URL
이번 주말은 대구도 기온이 좀 떨어지지 않았나요?
어제는 낮에도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아주 오랜만에 한낮에 달리기를 해봤어요.
그렇게 덥다가 갑자기 또 이렇게 기온이 떨어지니
참 이런 비정상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자각이 다시 드네요.

페크pek0501 2024-09-21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간 실격, 을 오디오북으로 몇 번이나 듣다가 완독이 되지 않아, 이건 종이책으로 읽어야 돼, 하면서 미루고 있어요. 물론 종이책도 갖고 있지요. 오디오북으론 단편소설을 듣는 정도가 알맞은 것 같아요. 인간 실격, 언젠가는 완독해 보겠어요.
두 분이 비 맞는 모습과 비를 피하기 위해 미끄럼틀 아래에 있던 모습은 어느 드라마 못지않은 장면이었을 듯해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은빛 2024-09-22 14:03   좋아요 0 | URL
페크님은 오디오북으로 들으시다가 다 못 들으셨군요.
오디오북은 한번도 안 들어봤는데, 왠지 저는 못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책을 누군가 읽어준다는 것을 못 견딜 것 같아요.
글에 쓴 것처럼 저는 꼭 세번째 수기의 중간쯤에서 멈췄던 것 같아요.
이번에 다 읽고 나니 속이 시원합니다. ㅎㅎㅎㅎ
 

어떤 새벽

친구집 이층 침대에서 눈을 뜬 건 새벽 3시쯤이었다. 11시쯤 잠들었으니 딱 4시간 정도 잤다. 화장실을 다녀와 물을 한 잔 마시고 다시 이층 침대에 올라 눈을 감고 누웠다. 1시간만 더 자려고 했다.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녀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 뒤척이다 시간을 보니 벌써 4시를 훌쩍 넘어있었다. 4시 40분쯤 짐을 챙겨 나와 우리집으로 걸었다.

무릎도 아프고 발목도 아팠다. 달리기 대회에 출전해야하는 당일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얼른 집에 가서 짐을 챙겨 6시에 전철역 근처에서 마라톤 대회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했다. 집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언덕길에 접어들기 직전에 어떤 덩치 큰 아저씨가 내려오고 있었다. 내 바로 근처에 한 아주머니가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가 그 아주머니에게 약간 거리를 두고 인사를 했다. 이모님 어디 가세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인사를 받고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저씨는 나를 스쳐지나 가 버렸고, 아주머니는 천천히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뭐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던 건가? 이 새벽에 사람도 거의 없는 골목에서 참 기묘한 상황이라 여겼다. 아, 난 얼른 집에 가서 짐을 챙겨야지. 서둘러 등산하듯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

지각

집에 도착해 화장실에서 속을 비우고, 면도를 꼼꼼하게 했다. 그리고 짐을 챙겼다. 서두른다고 했는데 시계를 보니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아차! 싶어서 얼른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을 관절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조심조심 뛰어 내려가며 시간 계산을 해봤다. 딱 6시 정각에 도착할 것 같았다. 5분 전에 도착하도록 나왔어야 했는데, 아니 안 뛰고 걸어도 되도록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다 문득 버스 위치를 확인 안 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분명 문자를 보긴 했었는데, 몇 번 출구였더라? 뛰어가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뛰어가면서 조금 속도를 늦춰 가방에서 폰을 꺼냈다. 이 대회에 같아 참가하자고 나를 꼬신 친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같은 2호차에 배정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버스에 타 있다고 했다. 전철역 출구 위치를 물었는데 애매하게 대답했다. 나는 지금 시간이 없었다. 불광천 쪽이죠? 급하게 내가 묻자, 어. 하고 답이 돌아왔다. 저 한 삼사분 걸려요. 서둘러 갈게요. 하고 전화를 끊고 보니 딱 56분이었다. 전철역 사거리 횡단보도 신호만 잘 받으면 6시 정각에 떨어질 수 있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막판에 거의 전력질주를 해서 횡단보도 앞에 닿았을 때 정각 6시였다. 신호등은 빨간불이었다. 설마 정각에 출발하지는 않겠지? 다시 그 형에게 전화를 걸어, 대기하고 있는 버스 두 대 중에 2호차가 뒤에 있는 버스냐고 물었다. 상식적으로 보통 그럴 것이고 버스 앞에 적혀있긴 할텐데, 마음이 급했다. 이럴 때 신호는 왜 이렇게 안 바뀌는지. 앞차는 빨간 버스였고, 뒷차는 하얀 버스였는데, 그 형은 이번엔 본인이 탄 버스 색깔을 몰랐다. 빨간 버스라고 하면서 뒷차라고 했다. 일단 전화를 끊었다. 마침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뛰기 시작했다. 역시 앞차가 1호차였다. 뒷차에 도착해 버스 계단을 오르는데, 숨이 턱에 차있었다. 6시 1분에서 막 2분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맨 앞자리에 타있는 아는 얼굴이 나를 보더니, 숨 셔. 숨. 이라고 말했다. 아, 이 분도 가시는 구나. 고개만 숙여 인사를 하고 나에게 배정된 맨 뒷좌석으로 가는데 아까 통화했던 그 형이 내게 말했다. 워! 워! 릴랙스. 릴랙스. 양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같이 하며 진정하라는 말이었다. 나도 진정하고 싶었지만, 진정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걸어서 25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약 8분 아니 9분만에 달려왔고, 막판엔 전력질주를 했다. 버스 맨 뒷자리 4칸 중에 우측 두 자리는 이미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내 자리는 좌에서 두 번째 자리. 좌석 배정표에 적힌 이름으로 봐서 맨 좌측 자리는 여성인 듯 했는데, 비어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고, 에어컨 바람 송출구를 내 몸 쪽으로 조정했다. 한참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6시 7분이 되자 기사님께서 출발한다고 말씀하셨다. 아직 빈자리가 좀 있었다. 내 왼쪽 자리도 아직 사람이 안 왔다. 기사님께서 간단한 안내말씀을 해주시고는 운적석에 앉으셨다. 잠시후 1호차가 먼저 출발하고 우리 2호차가 뒤를 따랐다. 나는 조금 더 호흡을 고르다가 맨 왼쪽 빈 자리로 옮겨 앉았다. 내 오른쪽 두 분은 부부인지, 지인인지 암튼 작은 목소리로 계속 대화를 나누셨다.

버스가 출발하고 한동안 숨을 고르고, 물을 마시고 땀을 닦다가 조금 안정이 될 무렵 버스는 내부순환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저 멀리 아파트 단지 건물들 사이로 빨갛게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평소 워낙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편이라 이렇게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본 기억이 별로 없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이 되는 아침에 술에 잔뜩 취해 해운대 백사장에서 아침해를 본 기억은 아마도 20년 아니 25년 이상 된 것이었다. 친구 집을 나섰을 때에는 분명 시간 여유가 있었는데, 결국 지각을 한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양쪽 무릎과 오른쪽 발목 통증이 있었음에도 이 버스를 타기 위해 달려온 것, 전력질주까지 한 것에 대해 생각했다. 조금 반성한 다음 달리기 위밍업을 충분히 잘 한 것으로 자기 합리화를 했다. 어쩌면 이 최악의 컨디션에도 10킬로미터를 목표대로 완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붉게 타오르는 해를 보니 그런 희망이 생겼다.

대회 준비

철원DMZ국제평화 마라톤 대회 10킬로미터 코스를 신청한 것은 6월 말이었다. 그때까지 10킬로를 뛰어본 적도 없었지만, 아직 2달 넘게 남았으니, 연습하고 준비하면 되리라 여겼다. 그러고 약 한 달 동안 쉬엄쉬엄 달렸다. 적으면 2킬로, 많으면 5킬로. 평소에 내가 해왔던 대로 했다. 그러다 7월 말이 가까워지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준비해서는 안 되겠구나. 일단 거리를 늘려서 10킬로를 뛸 수 있는 몸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까지 평생 뛰어본 가장 긴 거리는 아마 6킬로 정도였다. 그날 7킬로를 뛰었는데, 중간에 걷기도 하고 좀 쉬기도 했다. 평소 5킬로를 뛰는 날에도 중간에 걷거나 쉬곤 했었다. 이삼일 지나서 8킬로를 뛰었다. 걷는 시간은 좀 줄였는데 중간에 쉬는 시간을 줄이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8월 초부터 매일 9킬로를 달렸다. 반환점인 4.5킬로 지점에서 좀 오래 쉬었다. 그때 당시 생각에는 남은 한 달 동안 이 추세대로 운동을 하면 무난히 10킬로를 1시간 안에 들어오리라 예상했다. 8월 말까지 거리를 10킬로로 늘리고, 중간에 쉬는 시간 없이 뛰어보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관절 통증

이쯤에서 오래된 내 관절 통증 이야기를 해야겠다. 아마 7년 혹은 8년쯤 되었겠다. 어느날 갑자기 손가락 관절이 뻗뻗하게 굳으며 통증이 느껴지고,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느날엔 한 손가락만 그러더니 어느 날엔 다른 손의 다른 손가락도 그랬다. 갑자기 그렇게 아프더니 또 며칠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았다. 한동안은 손가락만 그랬는데, 시간이 지나니 손목, 무릎, 발목으로 통증 관절이 늘어났다. 특히 무릎이 심했는데, 나는 군대에 있던 시절부터 양쪽 무릎 모두 부상으로 긴 시간 고생을 했었기에 이런 통증도 더 심하게 느껴졌다. 통증이 심한 날엔 관절이 붓고 잘 굽혀지지가 않았다. 발목도 심하게 아픈 날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언제 왜 아픈 건지 알수가 없었다. 분명 며칠 아프다가 괜찮아지기는 하는데, 그 아픈 동안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정형외과를 갔었다. 의사는 내 증상이 류마티스 관절염인 것 같다고 했다. 통증을 잘 관찰하면서 증상을 많이 찾아봤을 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비급여 항목인 류마티스 인자 검사를 받았다. 10일쯤 지나서 결과가 나왔는데, 나는 류마티스 인자가 없다고 했다. 즉, 류마티스 관절염은 아니라는 것. 여기서부터 참 힘들고 답답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다른 병원들을 찾아다녔는데, 의사들마다 진단이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는 퇴행성 관절염이라 진단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증상이 너무나도 달랐다. 며칠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끊질기게 질문을 했는데, 그 의사를 결국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다른 병원에서는 통풍이라고도 했다. 이건 더 맞지 않는 것이 통풍은 바람만 스쳐도 아프다고 할 정도로 해당 부위 피부에도 통증이 심하다고 하는데, 나는 관절 부근 연골이나 인대 쪽에 통증이 있고, 피부 통증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게다가 통풍은 엄지 발가락에서 통증이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는 발가락 통증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그렇게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보고, 주위 사람들 권유로 한의원도 여러 곳에 다녀봤다. 물리치료를 받아도, 침을 맞아도 어느 것도 소용이 없었다. 병명도 모르고, 근본적인 치료도 못 하고 시간이 계속 흘렀고, 나는 계속 답답하고 우울했다. 언제 또 통증이 나타나 걷지도 못하는 상황이 될지 몰라서 불안했다. 분명 증상만 보면 류마티스 관절염인데, 아니라고 하니 치료를 시작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7년 이상 시간이 흘렀고, 한동안 통증이 없어서 편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8월 중순에 발목이 심하게 아파 발을 디딜수가 없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어느 아침에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집안에서도 걷지 못해 화장실 한 번 다녀오는 일이 너무 아프고 힘들었다. 당시 열대야 때문에 너무 더워서 친구 집으로 피난 가있었는데, 내가 꼼짝도 못하고 앉아만 있어야 해서 너무 곤란하고 힘들었다. 그 발목 통증이 며칠이 지나도 낫지 않고 계속 꼼짝할 수 없는 날들이 늘어나자 절망감을 느꼈다. 당장 화장실 오가는 것부터, 뭔가 먹으려고 주방을 드나드는 일도 힘들었다. 게다가 겨우 페이스를 잡아가던 달리기 훈련이 중단되어 속이 상했다. 아무리 더워도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겨우 관절 통증 때문에 못 달리는 상황이 너무 짜증이 났다.

8월 말에는 10킬로를 뛰어보고 조금이라도 걷거나 쉬는 시간을 줄여 대회 전에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못 하고 9월이 되어버렸다.

정확한 병명과 마지막 훈련

발목 통증이 낫지 않고 계속 시간만 지나가고 나는 달리기를 못 해 초조해하고 있을 무렵, 내 증상에 대해 여러 사람들에게 설명을 해야 할 일이 자꾸 생겼다. 매번 사람들은 내게 물었다. 왜 자꾸 아프냐고? 설명을 해줘도 이해를 못 했고(하긴 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니까) 매번 다시 묻곤 했다. 암튼 한 선배와 대화하는 중에 갑자기 그 선배가 이거 들어본 적 있다고 했다. 류마티스 관절염인줄 알았는데, 검사해보니 류마티스 인자가 없는 것. 이게 류마티스 관절염이랑 다른 병이라고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한참 있다가 링크를 하나 보내주셨는데, 재발성 류마티즘이란 병에 대한 정보였다. 어! 이거 내 증상이랑 완전히 똑같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관절 여기저기 아프다가 또 시간이 지나면 깨끗하게 낫고, 며칠이나 몇달씩 증상이 없다가도 하루 아침에 또 아프기도 한 이 증상. 이게 의사들도 잘 모르는 질병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 선배가 주신 정보를 바탕으로 나도 추가로 더 찾아봤다. 류마티스 내과 의사가 아니면 다른 의사들은 잘 알기 어려운 병명이라는 내용이 류마티스 내과 학회 홈페이지에 나와있었다. 그래서 정형외과와 한의원 예닐곱 곳 이상을 다녔어도 아무도 설명해주지 못하고, 아무도 정확한 병명을 진단하지 못했던 거였다. 또 학회 홈페이지엔 이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방법은 없다고 했다. 현재로선 원인도 불명이라 했다. 다만 관절 통증이 생겼을 때 소염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이 거의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라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원인도 병명도 몰랐던 관절 통증의 정확한 병명을 알게 된 것이 마라톤 대회를 나흘 정도 앞둔 날이었다. 여전히 발목 통증이 있었고, 무릎도 조금 불편했다. 그런데 신기하게 병명을 알고 지금까지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편해지고 나니 그 다음날 아침에 통증이 많이 나았다. 그날 나는 런닝화를 사고 마지막 훈련을 했다. 아직 발목과 무릎이 완전 회복된 것은 아니어서 6킬로미터만 가볍게 뛰려고 했는데, 런닝화를 추천해주고 같이 뛰어준 선배가 속도를 자꾸 올리는 바람에 좀 많이 힘들었다.

10킬로미터 경기

마라톤이 열리는 철원 고석정 주차장에 도착하니, 정말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서둘러 탈의실에 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배번호표를 부착하고, 기록용 칩을 운동화에 붙였다. 그리고 무릎 통증을 버티기 위해 소염진통제를 두 알 먹었다. 같이 간 일행들 중에 50대 언니들은 걷기 코스를 신청했었고, 10킬로 달리기를 신청한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 여성 두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하프 코스를 신청한 형님 한 분과 풀코스를 신청한 형님 두 분. 걷기 코스 언니들은 마음 편히 수다를 떨고 계셨지만, 나는 좀 긴장한 상태였다. 무릎도 아프고,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았다. 게다가 결국 10킬로를 한번도 달려보지 못하고 대회에 와버렸다. 과연 얼마 정도의 페이스를 가져가야 할지, 완주는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사람들은 제각각 각자의 코스로 흩어졌다. 10킬로를 선택한 여성 두 분은 어디 있는지 안 보였다. 나는 혼자 구석에서 다리 쪽 스트레칭을 하면서 긴장을 풀려고 애썼다. 드디어 9시가 조금 넘어 풀코스 참가자들이 달려나갔다. 그 다음 출발이 10킬로 코스였다. 처음부터 뒤로 처지면 나중에 더 불리할 것 같아서 되도록 앞쪽에서 출발하고 싶었는데, 앞쪽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적당히 전체 대오에서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다. 잘 할 수 있다 라고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고 있는데, 뒤에 있던 남성 참가자 한 분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내가 새로 산 런닝화 브랜드가 써코니 인가 그랬는데, 이 신발이 나름 유명한 상표였나보다. 좋은 신발 신으셨으니, 잘 달리실거라고 내게 덕담을 해주셨다. 나는 감사 인사를 전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신발은 좋을지 몰라도 그 신발을 신은 사람이 실력이 별로라서요. 아마 잘 달리기는 어려울 거예요.

드디어 카운트다운 후에 출발 신호가 떨어졌다. 나는 폰에서 런닝 앱을 켜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출발했다가 앞쪽 사람들이 뛰어서 흩어지기 시작하자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시작하자마자 속력을 내어 뛰쳐나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천천히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내가 생각했던 전략은 1시간에 들어오는 페이스 메이커를 찾아서 그 사람만 쫓아가는 것이었다. 만약 못 쫓아가겠으면 뭐 그건 어쩔수 없는 것이고, 그래도 중반 이후까지 비슷하게 뛰면 내 목표인 1시간에서 그리 많이 뒤쳐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페이스 메이커가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앞에 있는 것인지, 뒤에 있는 것이지 모르겠지만, 내 주위엔 없었다. 앞으로 나가며 찾아보려니 시작부터 오버페이스가 될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손목에 찬 갤럭시 핏을 계속 체크하면서 심박수와 페이스를 조절하며 뛰었다. 첫 1킬로는 거의 6분 페이스에 맞췄고, 그 다음 2킬로째는 5분 40초에 맞췄다. 그 다음 3킬로째는 5분 50초. 이대로만 가면 무난하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슬슬 폐활량이 딸리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는 무거웠고, 날은 또 너무 더웠다. 진통제의 영향으로 무릎 통증은 거의 안 느껴져서 다행이었지만,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체력 싸움이 시작이었다.

아니나다를까 4킬로미터 지점을 지나 5킬로미터로 가는 사이에서 급격하게 피로감을 느끼며 숨이 차서 뛰기가 힘들었다. 어떻게든 더 버텨보려고 했는데, 앞서 가던 몇몇 사람들이 걷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걷고 있더라. 조금 걸으며 호흡을 좀 회복하고 다시 뛰려고 했는데, 저 앞에 음수대가 나타났다. 자원봉사자들이 종이컵에 차가운 물을 따라주고 있었다. 물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반쯤은 마시고 반은 입에 머금고 있다가 뱉았다. 또 컵 하나를 더 받아서 뒷 목에 부었다. 햇빛 때문에 뒷 목이 따가워서 손목에 감아뒀던 손수건을 목에 감았다.

반환점을 지나 6킬로와 7킬로를 가는 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다. 너무 더웠고, 너무 지쳤다는 생각에 그냥 이대로 기록따위 포기해버리고 걸어갈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동네에서 같이 온 여성 한 분이 저 앞쪽에 보였다. 내 원래 전략이었던, 페이스 메이커를 쫓아가려던 건 페이스 메이커를 찾지 못해 소용이 없어졌는데, 문득 머리속에서 저 분을 나만의 페이스 메이커로 삼아 쫓아가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포기하려던 순간 다시 힘을 내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8킬로 지점까지 어떻게든 왔다. 또 한 번 음수대를 만나 가볍게 목을 축이고 뒷목에 물을 붓고 다시 달렸다. 이제 점점 남은 거리는 줄어들고 있었지만, 나는 매 순간 그만 뛰고 걷고 싶다는 유혹과 싸우고 있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걷고 있었고, 걸으며 충분히 호흡을 회복하고 다시 뛰다보면 또 걷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너무 더웠다. 이 더위에 이 아스팔트 위를 이렇게 달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기쯤 와서 보니 시간을 더 계산할 것도 없이 내 목표였던 1시간은 어렵다고 느꼈다. 내가 페이스 메이커로 삼고 따라갔던 여성분도 이제 많이 지쳤는지 계속 걷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막판에 조금이라도 더 뛰어야지 하는 마음에 그 분을 추월해서 앞서 나갔다. 물론 그리 멀리 가지 못하고 다시 걸었지만, 조금 호흡을 회복하고 다시 뛰고 또 걷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9킬로미터 지점을 지나고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니 조금은 힘이 났다. 막판에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뛰었다. 그렇게 결승선을 통과하면서 시간을 보니 1시간 7분대 기록이 나왔다. 드디어 끝났구나. 너무 힘들었는데, 결국 완주했구나. 음수대를 찾아가 찬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도저히 발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지쳤지만, 일부러 좀 더 걸었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대회장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다가 간식과 완주메달을 수령했다. 달릴 때에는 빨리 돌아가서 얼른 샤워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오고 나니 씻으러 가기가 너무 귀찮았다. 간식으로 바나나와 쵸코파이 그리고 음료수를 받았는데, 입맛이 없어서 음료수만 마셨다. 아까 맡겨두었던 가방을 찾아 갈아입을 옷들을 챙겨 샤워장으로 향했다. 샤워장이라고 설치한 텐트 속은 너무 열악한 상황이었다. 샤워기의 물은 너무 찔끔찔끔 나왔고, 옷을 벗고 갈아입을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뭐, 대충 땀만 닦아내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땀에 흠뻑 젖은 옷들은 비닐에 넣어 가방에 담았다.

이제 하프 코스와 풀코스 참가자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록이 나오는 벽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려고 줄을 서 있었다. 나도 저기서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누구 찍어줄 사람이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 같이 온 여성 분들께 전화를 걸었다. 그 분들은 줄 서서 기다리기도 싫고 사진은 안 찍고 싶다고 하셨다. 그냥 그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그 분들이 쉬고 계시는 곳을 향했다. 우리는 완주메달을 목에 걸고 우리끼리 기념촬영을 했다. 너무 더웠고,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부터 계속 포기하고 싶었다는 이야기 등을 나누다가 점심을 먹으러 갔다.

다음 대회

첫 대회였고, 첫 완주 메달을 받아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준비 부족과 관절 통증 등 여러 이유로 기록은 기대에 못 미쳤지만, 이 날씨에 이 상황에 그만하면 선방했다고 자기합리화를 했다. 아이들을 비롯해 친한 지인들에게 메달 사진을 보내며 자랑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안에 다시 10킬로 대회를 한번 더 뛰어서 이번엔 꼭 1시간 안쪽으로, 그러니까 5분대 페이스로 들어오리라 다짐을 했다. 가을이면 날씨도 선선해서 뛰기도 좋으리라. 올해 남은 마라톤 대회 일정들을 찾아보았는데, 큰 대회들은 벌써 마감한지 오래고, 지역에서 열리는 대회들은 교통편과 일정을 맞추기가 애매했다. 어지간한 대회들은 거의 다 신청이 끝난 상태였다. 꽤 긴 시간을 뒤져서 11월 말에 열리는 대회 하나를 찾았다. 다행히 아직 신청을 받고 있었다. 나는 얼른 신청을 해놓고 주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렸다. 혼자 참여해도 상관은 없지만, 이왕이면 여러 명이 같이 가야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11월 말까지 두 달 조금 넘게 남았으니, 이제부턴 정말 꾸준히 달려서 충분히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몸을 만들어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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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9-15 18: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키로 마라톤 완주 축하드려요^^*
11월에는 1시간 목표 달성하시길~
무리는 하지 마시고요
감은빛님이 쓰시는 글 전부는 못보지만 보게 되면 집중하게 되서 잘보고 있어요
추석 명절 잘보내세요^^*

감은빛 2024-09-22 14:06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루피닷님.
축하 인사 남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루피닷님의 응원 덕분에 11월 대회에서는 꼭 목표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아주 가끔 들어오는 알라딘에서 루피닷님께서 올려주시는 시와 글들을 잘 읽고 있어요. 고맙습니다!
 

불면

그제, 그러니까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었다. 덥기도 했고, 요즘 머리 속이 복잡하기도 했고, 여기저기 관절 통증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들이 불쑥 불쑥 방해하기도 했다. 그 전날 밤에도 제대로 잠을 못 자서 무척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제 밤은 기절한 듯 깨지않고 잘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확히 잠든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밤에 기절하듯 잠이 든 것은 맞는데, 자정을 넘어 그리 한 시도 되기 전에 깨버렸다. 아마 세 시간도 자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일요일은 오전부터 할 일이 많았다. 제대로 그 일들을 하려면 꼭 지금 잠을 자야했다. 후유증도 관절 통증들도 모두 잠을 자고 나면 조금은 나을지도 모를 터였다.(물론 자고 일어나서 더 심해지는 경우들도 많지만) 암튼, 나는 반드시 다시 잠들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화장실을 다녀온 후에 다시 반듯이 누워 눈을 감았다. 이제 곧 잠이 올 것이다. 언제 잠든지도 모르고 스르륵 잠에 빠질 것이다. 아주 조금씩 의식이 심연으로 침잠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면 너무나도 좋았겠지만, 눈을 감은 채로 오래 가만히 심호흡을 하며 무의식의 상태에 들어가보려 애썼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의식은 또렸해졌다.

예전에 정신건강의학과 상담도 받아보았었고, 책도 읽었었고, 이런저런 영상들도 보았는데, 이런 때에는 차라리 그냥 침대에서 벗어나 잠시 뭔가 다른 일에 집중하여 마음을 환기하는 것이 좋다고 했었다. 몸을 일으켜 불을 켜고 거울 앞으로 가서 아주 가벼운 맨몸운동과 스트레칭을 잠시 했다. 조금 땀이 날만큼 몸을 움직인 후에 샤워를 하면 아예 정신이 또렸해질 것 같아서 수건을 적셔 몸을 닦았다. 젖은 수건을 빨래비누로 빨아서 세번 가량 헹궈 빨랫대에 걸어두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불을 끄고 반듯이 누웠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잠아 어서 와라.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있으니 최근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들과 고민들이 머리 속에서 뒤엉켰다. 돈 걱정, 잘 안 풀리는 일들, 왜 저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사람들, 그 사람들 때문에 힘들고 괴롭다며 나를 찾는 또 다른 사람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고질적인 조직 문제들, 어둡기만한 장기적인 전망들. 어떤 문서나 글씨나 어떤 얼굴들이 머릿 속을 떠다녔고, 어떤 소리들이 핀볼 게임처럼 이리저로 튕겨다녔다. 아, 일대로 더 누워있다가는 머릿속만 더 복잡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몸을 일으키고 불을 켰다. 이쯤되면 지금 상태로는 잠드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예전에는 이렇게 잠을 못 잘 때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버리면 잠들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또 바람직한 방법은 절대 아니니 그러지 말자고 마음을 먹은 후로는 안 그러려고 노력 중이다. 다른 선택은 수면제와 진통제가 있다. 예전에 처방 받아놓고 안 먹은 수면제들이 제법 있어서 아주 가끔 잠을 자지 못해 괴로운 날에 먹곤 한다. 그런데 그 시점엔 술 뿐 아니라 약에도 의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 선택이 남았다. 책 혹은 영상. 평생 긴 불면의 밤을 지내온 경험에서 둘 중 더 나은 선택은 무조건 영상이었다. 책은 한번 집중하면 더 몰입하고 빠져들어 아예 밤을 새는 날이 더 많았지만, 영상은 보다보면 어느새 졸다가 잠들곤 했다. 스탠드의 조도를 좀 낮춰놓고 유튜브를 켜서 몇 가지 영상을 찾아 틀었다. 조금 후엔 클래식 음악 공연 영상을 켜놓고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난 클래식을 거의 들어보지 못하고 살았으므로 당연히 클래식을 몰랐고, 클래식이라는 음악은 내게 낯설고 졸린 것이었다. 이러면 잠들 수 있을거야.

운이 나빴던 것일까 이번에는 클래식도 통하지 않았다. 머리와 몸은 무척 피곤했는데, 아무리 애써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얼른 잠이 들어야 통증도 좀 잊을텐데. 피로와 통증 때문에 나는 너무 지치고 짜증이 났다. 여기서 설사 바로 잠이 들지 못하더라도 그냥 눈을 감고 누워 쉬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나는 조바심에 최악의 선택을 해버렸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책을 집어들고 스탠드의 조도를 다시 올렸다. 침대 주위엔 대략 열권 남짓 책들이 널부러져 있었는데, 내 손에 잡힌 것은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이 책이 최근 침대 근처에 자리를 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에 어쩌다 일본 여성과 메신저 앱으로 꾸준히 대화를 나눴는데, 그가 내게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봤냐고 물었다. 내 기억에 떠오른 것이 저 책 하나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루키의 책들에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암튼 그렇게 답을 하니 그 여성도 저 책을 언급했다. 그 다음순간 나는 의심이 들었다. 가만, 나 저 유명한 책을 다 읽었던 것이 맞았던가? 아니었다. 워낙 많은 얘기를 들어서 읽었던 것 처럼 여겨졌지만, 사실 저 책조차도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번 기회에 읽어야지 하고 중고책을 뒤져 구매했고, 곧 읽어야지 하고 읽다가 말다가 하는 책들이 주로 쌓이는 침대 맡에 둔 것이었다.

독서

처음 책을 집어들었을 때에는 조금 읽다가 다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늘, 언제나 그랬다. 한참 책에 빠져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시간이 휙 지나서 네 시가 넘어 있었다. 주인공이 나오코의 생일을 축하하고, 첫 관계를 갖는 장면 근처였을 것이다. 가름끈을 책장에 끼워 책을 딱 덮고 누웠다. 불을 끄고 잠이 오길 기다렸다. 아니 잠을 불렀다. 잠아 어서 오라. 제발 와다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저 사건 이후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지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졌다. 책을 읽지 않았어도 대략 내용은 알고 있었다. 나오코는 어딘가 숲과 초원이 있는 요양원 같은 곳에서 생활할 것이고, 주인공은 대학생활을 성실히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 방탕한 생활을 한다고 알고 있었다. 아니 직접 읽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아직 막연한 짐작이고, 직접 결말까지 확인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니 아직은 알고 있었다고 표현하면 안 되었다. 암튼 그렇게 이번에는 자꾸 이후 이야기가 궁금해서 잠을 자지 못했다. 이렇게 잠을 자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괴로웠다. 오히려 아까 책에 집중했을 때는 온갖 고민과 잡생각들을 다 잊고, 심지어 통증들도 잊었다.

다시 불을 켜고 일어났다. 결심을 해야했다. 일요일 일정을 포기하더라도 일단은 그냥 책을 읽는다. 혹시 아침이 되어 잠을 못 잤어도 충분히 일정을 소화할 만하다 싶으면 나가고, 그렇지 못하다 여겨지면 그냥 계속 책을 읽고, 책을 읽다가 지치면 그때 잠을 자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쭈욱 책을 읽었다. 이때 사실 눈이 좀 피곤해서 불편했는데, 다시 책에 몰입을 하니 또 괜찮아졌다.

짧은 잠

다시 책 속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것은 알람 소리 덕분이었다. 지금쯤 일어나 씻어야 시간 맞춰 나갈 수 있다고 알람을 맞춰두었었다. 책을 덮어두고 냉정하게 내 상태를 살폈다. 도저히 외출해서 일정을 소화할 수 없다고 여겼다. 당장 무릎과 발목의 통증 때문에 제대로 걷기도 어려웠다. 일정을 함께하기로 한 사람들과의 단톡방에 진심을 담아 사과의 말씀을 올렸다. 결국 약속을 못 지킨 것에 대한 죄책감과 책에서 벗어나자마자 느껴지는 통증들 때문에 몸과 마음이 괴롭고 힘들었다. 진통제를 먹기로 했다. 이 약은 효과가 꽤 좋은데, 먹고 나면 엄청 졸려서 한동안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잠들도록 만들어준다.

다시 독서

평소엔 저 진통제를 먹으면 꽤 긴 시간 잠을 자곤 하는데, 어제는 그렇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오후에 정신이 들었다. 여러 통증들은 별로 나아지지 않고 거의 그대로였다. 통증으로부터 도피하기위해 다시 책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다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배가 고파서 정신이 들었다. 시간은 저녁 7시였다. 책 속 주인공이 음식과 술을 먹는 장면이 계속 나와서 더 배가 고프게 느껴졌다. 냉장고를 뒤져 먹을 걸 찾았다. 정상적으로 일정을 소화했다면 점심과 저녁을 밖에서 먹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집엔 바로 먹을 거리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먹을거리를 사러 나가기엔 무릎과 발목 상태가 너무 안좋았다. 정말 다행히 냉동실엔 몇가지 먹을 것들이 있었지만, 우리집엔 전자레이지가 없어서 자연해동을 해야 하는데, 그럼 또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간단히 먹을 것들을 냉동실에서 꺼내 바가지에 물을 받아놓고 그 안에 던져넣었다. 여러 통증들과 배고픔을 잊기 위해 다시 책에 집중했다.

한 시간정도 지나 이젠 도저히 배고픔을 참기 어렵겠다고 느낄 즈음 아까 던져둔 음식들을 보니 거의 녹았지만,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였다. 이번엔 냄비에 물을 조금 넣고 끓이면서 찜기를 넣고 그 위에 음식을 올리고 뚜껑을 닫았다. 배가 고픈 상태를 비교적 잘 견디는 편인데, 이번엔 거의 한계 직전에 음식 준비가 끝났다. 유튜브로 야구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을 찾아보면서 먹었다. 롯데는 4연승을 올려 가을야구 진출에 한 발 더 다가갔다. 어쩌면 정말 올해 아주 오랜만에 롯데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것을 볼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설레었다. 먹은 것을 치우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폰을 열어 하루종일 연락 온 것을 확인했다. 아침에 일정을 못 나가 죄송하다고 말씀을 남긴 것에 대한 답으로 몸 조리 잘 하고 얼른 회복하라는 연락이 와 있었다. 또 한번 죄송한 마음에 다음에는 두 배로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다시 책을 읽었다. 남은 책장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자정즈음에 마칠것 같았다. 후반부 이야기는 좀 늘어지는 감이 있었다. 개인적인 성향으로 좀 이해하기 어려운 흐름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책을 다 읽은 시간은 자정을 4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마지막 부분에서 공감이 되지 않아서 몰입이 확 깨져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이 부분은 따로 글을 써서 남길 생각이다.

어떤 축하

자정을 넘기자마자 폰 진동이 여러 차려 울렸다. 날짜를 보는 순간 어떤 내용인지 바로 짐작할 수 있어서 일부러 내용 확인은 하지 않았다. 자정을 넘겨 오늘, 그러니까 구월 이일이 되면서 전처, 그러니까 애들 엄마의 생일이 되었고, 아이들이 엄마 아빠랑 따로 소통하기 귀찮다고 멋대로 만든 가족 단톡방에 아이들이 엄마 생신 축하 메시지와 이모티콘들을 올린 것이다.

나는 이혼 후에 아이들과 관련한 이야기 외에는 전혀 애들 엄마와 소통하지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더는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없는 관계가 되었으니까. 이 가족 단톡방도 실은 아이들이 본인들의 필요로 만든 것이라 주 내용은 모두 아이들 이야기이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 속에서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엄마한테 축하 안 해요? 물론 아이가 내게 직접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다. 그저 작은 아이의 성격상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래서 아이의 목소리가 머리 속에 들린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이지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몰래 한숨이 나왔다. 방금 다 읽은 책의 주인공 상황이 어찌보면 나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여겼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면 또 많이 다르지만. 암튼 주인공의 답답하고 슬픈 상황이 내 마음을 건드려, 과거의 여러 추억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연애시절과 결혼 초기 좋았던 기억들은 지금 떠올리면 너무 아프고 힘들기만 하다. 그나마 내가 지금 이 삶을 버티고 있는 것은 그 사람과의 감정적인 교류를 완전히 끊고, 아이들과의 소통만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갑자기 이런 감정이 솟구치면 견디기가 어렵다. 몇 해전이었던가 캘린더 앱이 결혼기념일 알림을 보냈었다. 전혀 기억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막 자정을 넘긴 시간으로 자려고 누워있을 때였다. 갑자기 수많은 기억들이 필름처럼 머리속을 스쳐 지났고 다음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폭발하듯 뿜어져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엎드려 울기 시작했고, 점점 감정 폭발이 격해지면서 울음 소리도 더 커졌다. 살면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처럼 느껴져 오히려 내 이성이 당황하며 내 감정을 지켜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슬픔이‘가 오열하는데, 옆에서 ‘기쁨이‘가 당황하며 어쩔줄 몰라하는 상황 같았다.

그러니까 간밤에 자정을 약 한 시간쯤 지난 상황에서도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다가 갑자기 감정이 폭주하여 그때처럼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하필이면 딱 그 시점에 다 읽은 책의 내용 때문에 더욱 그럴 확률이 높았다. 다행히 거기까지 가기 전에 나의 뇌는 어떤 감정의 통로를 차단한 것 같았다. 나는 한순간 차갑고 냉정한 상태가 되었다. 과거는 지나간 일일 뿐이고, 나는 끝없이 현재를 살아야 한다.

다시 머리속에서 작은 아이가 물었다. 아빠는 축하했어? 다음 순간 나는 그 사람에게 직접 표현하지 않고 그냥 혼자 작게 축하해요! 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머릿속의 아이에게 답했다. 그럼! 아빠도 축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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