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
그제, 그러니까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밤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었다. 덥기도 했고, 요즘 머리 속이 복잡하기도 했고, 여기저기 관절 통증과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들이 불쑥 불쑥 방해하기도 했다. 그 전날 밤에도 제대로 잠을 못 자서 무척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제 밤은 기절한 듯 깨지않고 잘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확히 잠든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밤에 기절하듯 잠이 든 것은 맞는데, 자정을 넘어 그리 한 시도 되기 전에 깨버렸다. 아마 세 시간도 자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일요일은 오전부터 할 일이 많았다. 제대로 그 일들을 하려면 꼭 지금 잠을 자야했다. 후유증도 관절 통증들도 모두 잠을 자고 나면 조금은 나을지도 모를 터였다.(물론 자고 일어나서 더 심해지는 경우들도 많지만) 암튼, 나는 반드시 다시 잠들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화장실을 다녀온 후에 다시 반듯이 누워 눈을 감았다. 이제 곧 잠이 올 것이다. 언제 잠든지도 모르고 스르륵 잠에 빠질 것이다. 아주 조금씩 의식이 심연으로 침잠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면 너무나도 좋았겠지만, 눈을 감은 채로 오래 가만히 심호흡을 하며 무의식의 상태에 들어가보려 애썼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의식은 또렸해졌다.
예전에 정신건강의학과 상담도 받아보았었고, 책도 읽었었고, 이런저런 영상들도 보았는데, 이런 때에는 차라리 그냥 침대에서 벗어나 잠시 뭔가 다른 일에 집중하여 마음을 환기하는 것이 좋다고 했었다. 몸을 일으켜 불을 켜고 거울 앞으로 가서 아주 가벼운 맨몸운동과 스트레칭을 잠시 했다. 조금 땀이 날만큼 몸을 움직인 후에 샤워를 하면 아예 정신이 또렸해질 것 같아서 수건을 적셔 몸을 닦았다. 젖은 수건을 빨래비누로 빨아서 세번 가량 헹궈 빨랫대에 걸어두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불을 끄고 반듯이 누웠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다시 잠을 청했다. 잠아 어서 와라. 이렇게 기다리고 있잖니.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눈을 감고 있으니 최근 여러가지 복잡한 상황들과 고민들이 머리 속에서 뒤엉켰다. 돈 걱정, 잘 안 풀리는 일들, 왜 저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사람들, 그 사람들 때문에 힘들고 괴롭다며 나를 찾는 또 다른 사람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고질적인 조직 문제들, 어둡기만한 장기적인 전망들. 어떤 문서나 글씨나 어떤 얼굴들이 머릿 속을 떠다녔고, 어떤 소리들이 핀볼 게임처럼 이리저로 튕겨다녔다. 아, 일대로 더 누워있다가는 머릿속만 더 복잡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다시 몸을 일으키고 불을 켰다. 이쯤되면 지금 상태로는 잠드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예전에는 이렇게 잠을 못 잘 때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버리면 잠들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또 바람직한 방법은 절대 아니니 그러지 말자고 마음을 먹은 후로는 안 그러려고 노력 중이다. 다른 선택은 수면제와 진통제가 있다. 예전에 처방 받아놓고 안 먹은 수면제들이 제법 있어서 아주 가끔 잠을 자지 못해 괴로운 날에 먹곤 한다. 그런데 그 시점엔 술 뿐 아니라 약에도 의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 선택이 남았다. 책 혹은 영상. 평생 긴 불면의 밤을 지내온 경험에서 둘 중 더 나은 선택은 무조건 영상이었다. 책은 한번 집중하면 더 몰입하고 빠져들어 아예 밤을 새는 날이 더 많았지만, 영상은 보다보면 어느새 졸다가 잠들곤 했다. 스탠드의 조도를 좀 낮춰놓고 유튜브를 켜서 몇 가지 영상을 찾아 틀었다. 조금 후엔 클래식 음악 공연 영상을 켜놓고 다시 누워 눈을 감았다. 난 클래식을 거의 들어보지 못하고 살았으므로 당연히 클래식을 몰랐고, 클래식이라는 음악은 내게 낯설고 졸린 것이었다. 이러면 잠들 수 있을거야.
운이 나빴던 것일까 이번에는 클래식도 통하지 않았다. 머리와 몸은 무척 피곤했는데, 아무리 애써도 잠이 오지 않았다. 얼른 잠이 들어야 통증도 좀 잊을텐데. 피로와 통증 때문에 나는 너무 지치고 짜증이 났다. 여기서 설사 바로 잠이 들지 못하더라도 그냥 눈을 감고 누워 쉬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나는 조바심에 최악의 선택을 해버렸다.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책을 집어들고 스탠드의 조도를 다시 올렸다. 침대 주위엔 대략 열권 남짓 책들이 널부러져 있었는데, 내 손에 잡힌 것은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이 책이 최근 침대 근처에 자리를 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에 어쩌다 일본 여성과 메신저 앱으로 꾸준히 대화를 나눴는데, 그가 내게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봤냐고 물었다. 내 기억에 떠오른 것이 저 책 하나였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하루키의 책들에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암튼 그렇게 답을 하니 그 여성도 저 책을 언급했다. 그 다음순간 나는 의심이 들었다. 가만, 나 저 유명한 책을 다 읽었던 것이 맞았던가? 아니었다. 워낙 많은 얘기를 들어서 읽었던 것 처럼 여겨졌지만, 사실 저 책조차도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번 기회에 읽어야지 하고 중고책을 뒤져 구매했고, 곧 읽어야지 하고 읽다가 말다가 하는 책들이 주로 쌓이는 침대 맡에 둔 것이었다.
독서
처음 책을 집어들었을 때에는 조금 읽다가 다시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늘, 언제나 그랬다. 한참 책에 빠져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시간이 휙 지나서 네 시가 넘어 있었다. 주인공이 나오코의 생일을 축하하고, 첫 관계를 갖는 장면 근처였을 것이다. 가름끈을 책장에 끼워 책을 딱 덮고 누웠다. 불을 끄고 잠이 오길 기다렸다. 아니 잠을 불렀다. 잠아 어서 오라. 제발 와다오. 그러나 잠은 오지 않고 저 사건 이후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인지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졌다. 책을 읽지 않았어도 대략 내용은 알고 있었다. 나오코는 어딘가 숲과 초원이 있는 요양원 같은 곳에서 생활할 것이고, 주인공은 대학생활을 성실히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 방탕한 생활을 한다고 알고 있었다. 아니 직접 읽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아직 막연한 짐작이고, 직접 결말까지 확인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니 아직은 알고 있었다고 표현하면 안 되었다. 암튼 그렇게 이번에는 자꾸 이후 이야기가 궁금해서 잠을 자지 못했다. 이렇게 잠을 자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괴로웠다. 오히려 아까 책에 집중했을 때는 온갖 고민과 잡생각들을 다 잊고, 심지어 통증들도 잊었다.
다시 불을 켜고 일어났다. 결심을 해야했다. 일요일 일정을 포기하더라도 일단은 그냥 책을 읽는다. 혹시 아침이 되어 잠을 못 잤어도 충분히 일정을 소화할 만하다 싶으면 나가고, 그렇지 못하다 여겨지면 그냥 계속 책을 읽고, 책을 읽다가 지치면 그때 잠을 자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쭈욱 책을 읽었다. 이때 사실 눈이 좀 피곤해서 불편했는데, 다시 책에 몰입을 하니 또 괜찮아졌다.
짧은 잠
다시 책 속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온 것은 알람 소리 덕분이었다. 지금쯤 일어나 씻어야 시간 맞춰 나갈 수 있다고 알람을 맞춰두었었다. 책을 덮어두고 냉정하게 내 상태를 살폈다. 도저히 외출해서 일정을 소화할 수 없다고 여겼다. 당장 무릎과 발목의 통증 때문에 제대로 걷기도 어려웠다. 일정을 함께하기로 한 사람들과의 단톡방에 진심을 담아 사과의 말씀을 올렸다. 결국 약속을 못 지킨 것에 대한 죄책감과 책에서 벗어나자마자 느껴지는 통증들 때문에 몸과 마음이 괴롭고 힘들었다. 진통제를 먹기로 했다. 이 약은 효과가 꽤 좋은데, 먹고 나면 엄청 졸려서 한동안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잠들도록 만들어준다.
다시 독서
평소엔 저 진통제를 먹으면 꽤 긴 시간 잠을 자곤 하는데, 어제는 그렇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오후에 정신이 들었다. 여러 통증들은 별로 나아지지 않고 거의 그대로였다. 통증으로부터 도피하기위해 다시 책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다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배가 고파서 정신이 들었다. 시간은 저녁 7시였다. 책 속 주인공이 음식과 술을 먹는 장면이 계속 나와서 더 배가 고프게 느껴졌다. 냉장고를 뒤져 먹을 걸 찾았다. 정상적으로 일정을 소화했다면 점심과 저녁을 밖에서 먹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집엔 바로 먹을 거리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먹을거리를 사러 나가기엔 무릎과 발목 상태가 너무 안좋았다. 정말 다행히 냉동실엔 몇가지 먹을 것들이 있었지만, 우리집엔 전자레이지가 없어서 자연해동을 해야 하는데, 그럼 또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간단히 먹을 것들을 냉동실에서 꺼내 바가지에 물을 받아놓고 그 안에 던져넣었다. 여러 통증들과 배고픔을 잊기 위해 다시 책에 집중했다.
한 시간정도 지나 이젠 도저히 배고픔을 참기 어렵겠다고 느낄 즈음 아까 던져둔 음식들을 보니 거의 녹았지만, 아직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였다. 이번엔 냄비에 물을 조금 넣고 끓이면서 찜기를 넣고 그 위에 음식을 올리고 뚜껑을 닫았다. 배가 고픈 상태를 비교적 잘 견디는 편인데, 이번엔 거의 한계 직전에 음식 준비가 끝났다. 유튜브로 야구 경기 하이라이트 영상을 찾아보면서 먹었다. 롯데는 4연승을 올려 가을야구 진출에 한 발 더 다가갔다. 어쩌면 정말 올해 아주 오랜만에 롯데가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것을 볼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설레었다. 먹은 것을 치우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폰을 열어 하루종일 연락 온 것을 확인했다. 아침에 일정을 못 나가 죄송하다고 말씀을 남긴 것에 대한 답으로 몸 조리 잘 하고 얼른 회복하라는 연락이 와 있었다. 또 한번 죄송한 마음에 다음에는 두 배로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다시 책을 읽었다. 남은 책장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자정즈음에 마칠것 같았다. 후반부 이야기는 좀 늘어지는 감이 있었다. 개인적인 성향으로 좀 이해하기 어려운 흐름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책을 다 읽은 시간은 자정을 4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마지막 부분에서 공감이 되지 않아서 몰입이 확 깨져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이 부분은 따로 글을 써서 남길 생각이다.
어떤 축하
자정을 넘기자마자 폰 진동이 여러 차려 울렸다. 날짜를 보는 순간 어떤 내용인지 바로 짐작할 수 있어서 일부러 내용 확인은 하지 않았다. 자정을 넘겨 오늘, 그러니까 구월 이일이 되면서 전처, 그러니까 애들 엄마의 생일이 되었고, 아이들이 엄마 아빠랑 따로 소통하기 귀찮다고 멋대로 만든 가족 단톡방에 아이들이 엄마 생신 축하 메시지와 이모티콘들을 올린 것이다.
나는 이혼 후에 아이들과 관련한 이야기 외에는 전혀 애들 엄마와 소통하지 않았다. 당연히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더는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없는 관계가 되었으니까. 이 가족 단톡방도 실은 아이들이 본인들의 필요로 만든 것이라 주 내용은 모두 아이들 이야기이기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 속에서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엄마한테 축하 안 해요? 물론 아이가 내게 직접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다. 그저 작은 아이의 성격상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래서 아이의 목소리가 머리 속에 들린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이지 난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몰래 한숨이 나왔다. 방금 다 읽은 책의 주인공 상황이 어찌보면 나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여겼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지면 또 많이 다르지만. 암튼 주인공의 답답하고 슬픈 상황이 내 마음을 건드려, 과거의 여러 추억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연애시절과 결혼 초기 좋았던 기억들은 지금 떠올리면 너무 아프고 힘들기만 하다. 그나마 내가 지금 이 삶을 버티고 있는 것은 그 사람과의 감정적인 교류를 완전히 끊고, 아이들과의 소통만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갑자기 이런 감정이 솟구치면 견디기가 어렵다. 몇 해전이었던가 캘린더 앱이 결혼기념일 알림을 보냈었다. 전혀 기억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막 자정을 넘긴 시간으로 자려고 누워있을 때였다. 갑자기 수많은 기억들이 필름처럼 머리속을 스쳐 지났고 다음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폭발하듯 뿜어져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엎드려 울기 시작했고, 점점 감정 폭발이 격해지면서 울음 소리도 더 커졌다. 살면서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처럼 느껴져 오히려 내 이성이 당황하며 내 감정을 지켜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슬픔이‘가 오열하는데, 옆에서 ‘기쁨이‘가 당황하며 어쩔줄 몰라하는 상황 같았다.
그러니까 간밤에 자정을 약 한 시간쯤 지난 상황에서도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다가 갑자기 감정이 폭주하여 그때처럼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하필이면 딱 그 시점에 다 읽은 책의 내용 때문에 더욱 그럴 확률이 높았다. 다행히 거기까지 가기 전에 나의 뇌는 어떤 감정의 통로를 차단한 것 같았다. 나는 한순간 차갑고 냉정한 상태가 되었다. 과거는 지나간 일일 뿐이고, 나는 끝없이 현재를 살아야 한다.
다시 머리속에서 작은 아이가 물었다. 아빠는 축하했어? 다음 순간 나는 그 사람에게 직접 표현하지 않고 그냥 혼자 작게 축하해요! 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 머릿속의 아이에게 답했다. 그럼! 아빠도 축하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