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사회적 글쓰기' 강의를 들었다. 활동가로서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해 글을 써야 할 일이 많지만, 어렵고 복잡한 여러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가 어렵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재밌게 쓰기도 어렵다. 게다가 내가 가진 문제의식을 잘 전달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최근 그런 고민을 계속하던 차였기 때문에 이 강의가 무척 반가웠다. 물론 강의 한번 듣는다고 이 고민이 해결되리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이건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경험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잘 깨닫지 못했던 어떤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었다.
그런데 강의는 내 생각과는 달랐다.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실망스러운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시간만 지나갔다. 공자도 3명이 지나가면 적어도 1명은 스승이 있다고 했건만, 아무리 모자라는 강의라도 반면교사로 삼을 내용이라도 있건만, 이 강의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 딱 하나 있다면 나는 저런 강의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글쓰기에 대해 뭘 얻은 것이 아니라, 강의 준비하면서 어떤 준비를 어떻게 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강의에서 하나 거슬렸던 것은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으로 '필사'를 하는데, 강사는 그 필사에 대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안 그래도 별 내용이 없어서 실망하고 있었는데, 이 발언을 듣고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들어 발언 신청을 하고, 한번 호흡을 고르고 의견을 말했다. "좋은 글을 필사하면, 자신도 모르게 그 좋은 글이 가진 다양한 요소들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올바른 맞춤법, 문장력, 문체, 글의 흐름, 구조 등에 대해 저절로 공부하는 효과를 얻는다. 필사를 해본 사람은 글을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서 아주 기본적인 부분에서 실수하지 않는다. 그래서 글쓰기 공부를 하는 사람이 필사를 한번이라도 해보는 것은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하게 위와 같이 말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 이런 내용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강사가 뭔가 반론을 제기할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렸다. 어떤 반론이 나올지 궁금해하면서, 거기에 대한 재반론을 어떻게 펼칠 것인지를 머릿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사는 그저 나의 필사 경험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는 그냥 다른 내용으로 넘어가 버렸다. 내 의견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잔뜩 긴장하고 기다렸는데, 반론이 없었으므로 맥이 빠졌다.
내 필사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난 사실 필사라는 행위에 대해 배우거나 인지하고 글을 베껴 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좋은 글을 따라 쓰면서 필사를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을 거라고 본다. 내가 좋아하는 시, 문장, 글귀 등을 공책에 베껴 쓰는 사람들. 첫 시작은 아주 실용적인 동기 때문이었다. 단편소설을 쓰려고 몇 가지 줄거리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글의 첫 부분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가 고민이었다. 나도 그렇고 다른 대부분의 독자들도 첫머리에서 확 휘어잡지 못하면 그 글을 더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재밌게 읽었던, 감동적이었던, 작품들의 첫 부분을 베껴 쓰기 시작했다. 어떤 작품에선 단 한 줄, 어떤 작품에선 몇 문장, 어떤 작품에선 아예 몇 페이지를 베껴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점차 단편 하나를 다 베껴 쓰기도 했고, 어느 작가의 단편집을 베껴 쓰기도 했다. (얇은 책이었는데, 2/3 정도를 필사했다.)
나중에 이렇게 좋은 글을 베껴 쓰는 걸 필사라고 부르고, 필사가 글쓰기 공부의 아주 좋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훨씬 나중에 신경숙 작가가 '난쏘공'을 필사했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었다. 사실 신경숙 작가는 내 인생의 아주 중요한 시점에서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아니 그 작가가 아니라 그 작가의 작품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한때 아주 좋아했던 아이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신경숙의 데뷔작이었다. 아마 앞서 말한 첫 머리 베껴 쓰기에 포함된 작품 중에 신경숙의 단편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두 세 개의 작품 첫머리를 필사한 기억이 난다. 거기엔 90년대 대표적인 단편소설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많은 작품이 포함된 작가가 아마 윤대녕, 은희경, 김형경, 하성란이었을 것이다.
나는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파는 편이다. 한 작가에게 빠지면 다른 건 안 읽고 그 사람 작품만 다 찾아 읽는 편이다. 작가로서 신경숙을 좋아한 기억은 없다. 그래서 초기 작품 몇 개, 단편 몇 개를 읽었을 뿐이다. 이렇게 작가로서는 나에게 큰 의미가 없지만, 신경숙이란 이름은 나에게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의 아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귀밑머리를 넘기며 수줍은 듯 나를 바라보던 아이, 무어라 날 놀려대고 나서 깔깔 웃던 그 아이와 보낸 시간들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되곤 했다. 나에게 신경숙이란 이름은 나의 뇌를 향해 그 아이와의 추억을 쏘는 방아쇠인 셈이다. 다만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어느 날부터는 그런 연상작용도 차츰 없어지기 시작하더라. [엄마를 부탁해]라는 베스트셀러 덕분에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이름을 읽거나 듣던 시절에는 이미 그 연상이 거의 사라진 후여서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만약 그때까지도 그 연상이 자주 일어났다면 아마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아이를 떠올리며 담배 몇 가치를 태웠으리라.
이번 신경숙 표절 사태를 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그 아이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뭐 표절에 대한 신경숙과 창비의 변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 기사를 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옛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와 동갑이니 이젠 중년의 여성이 되어있을 그이는 내 기억 속에서는 영원히 여고생으로 남아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흩날리며 나를 뒤돌아보고 웃는 그 아이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