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비와 이별
차창 밖으로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야말로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지구의 살갗을 파헤쳤다. 얇은 철판과 조금 두꺼운 유리에 사정없이 떨어져 내리는 비는 청각을 마비시켜 정신을 멍하게 만든다.
온 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 볼륨을 최대한 올려놓고 담배불을 당긴다. 어김없이 비에 대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부활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 한때 제법 좋아했던 노래지만, 하필 지금 이 순간 이 노래가 나오다니!
매캐한 담배 연기가 좁은 차 안을 가득 메운다. 창문을 조금 열었더니, 곧바로 비가 들이쳐 얼굴을 때린다. 이마를 쓰윽 닦아내고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후욱 하고 내뱉은 연기는 열린 창문 틈으로 빨려나간다.
노래가 절정에 다다른다. 작게 따라불러보지만, 역시 고음에서 삑사리가 난다.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다. 창문을 다시 올리고 얼굴에 묻은 빗물을 또 한번 닦아낸다. 코와 입 언저리를 닦아내던 손이 입술에 닿는 순간 흠칫 동작을 멈춘다. 나도 몰래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불과 이십여분 전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을 느꼈던 입술. 그 느낌을 다시 한번 되살려보고 싶은 마음에 가만히 더듬어보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매몰차게 문을 닫고, 저 빗속으로 걸어나간 그 여성을 아마 다시는 볼수 없을 것이다. 입술의 촉각따위 기억해보려해도 부질없는 짓이다!
둘. 만남
민방위 대원은 4년차까지 일년에 4시간 교육훈련을 받는다. 올해 4년차, 마지막 교육훈련이다. 내년부터는 1년에 1시간 소집훈련이면 끝난다던가. 하필 가장 바쁜 시기에 민방위 훈련이 떨어졌다. 뒤로 미룰까 어쩔까 고민을 했지만, 이것저것 행정절차가 귀찮을 것 같아서 그냥 받았다.
바쁜 아침, 한창 바쁜 사람들을 불러놓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어를 뱉어내는 사람들. 어떤 유용한 정보도 없고, 어떤 합리적인 이론도 없다. 그저 시간낭비일 뿐! 그렇게 헛된 시간을 보내게 만든 댓가로 너희는 내가 낸 세금에서 강의료를 받아 챙기겠지.
두번째 시간이었던가 말투가 어눌한 강사가 프레젠테이션 도중에 노사연의 '만남' 노래를 들려줬다. 자신과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며, 소중한 인연이라는 뜻'을 전달하는 의도였던 것 같다. 그 강사는 어눌한 말투로 이것도 인연이니, 다음에는 꼭 아는 척이라도 하고, 같이 커피라도 한잔 하는 사이가 되자고 지껄인다. 순간 우엑! 구토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냈다.
시대에 뒤떨어진 안보교육과 화생방 교육 따위로 인해 내 아까운 인생의 한 순간이 낭비되었다.
구역질나는 민방위 강사와의 만남 말고, 미치도록 가슴이 뛰는 어떤 만남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