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밥
삼남매가 평상의
반상에 둘러앉아
볼이 미어져라
상추쌈을 우겨넣는 근경을
열댓 발치에서
묵묵히 바라다보며
오져해하고 있는데
난데없는 큰 손 하나가
가만히 어깨를 짚었다
어머니였다
조성국 / 슬그머니 / 실천문학사
이등병 시절, 처음 자대배치를 받은 곳은 최전방 철책선이었다. 연대본부에서 다른 동기들은 다들 군용 포차나 육공트럭을 타고 자대로 떠났는데, 우리는 인솔장교와 함께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어딘가에서 내려서 그곳에서 비로소 포차를 타게 되는데, 인솔장교가 전방에는 한번 들어가면 전화도 할 수 없게 되니까 미리 전화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한 사람당 2통의 전화를 쓰게 해줬다. 물론 전화카드나 동전은 각자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동기들이 각각 부모님이나 여자친구 혹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집에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 아직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어서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친하게 지냈던 동기네 집으로 전화를 했다. 다행히 그는 전화를 받았다. 우리 부모님께 대신 전해달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냥 삼켰다. 왠 여자애가 전화해서 내 소식을 전하면 그것으로 더 놀랄 양반들이었다. 그냥 전방으로 간다고 잘 지내라는 말을 하고 끊었다.
대대본부를 거치고, 중대 본부를 거쳐 다시 소초로 이동하는데 며칠이 걸렸다. 소초에서는 앞으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진짜 고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대에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을 다 만나는데,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는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도 있었지만, 왠지 기억에 남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내가 처음 소초에 들어갔을때, 가장 고참은 부산 사람이었고, 그 바로 밑에 있던 고참이 광주사람이었다. 왕고인 부산 사람은 내가 들어가고 오래지 않아 제대했다. 나는 화기분대 기관총 탄약수로 들어갔는데, 화기분대장이 바로 두번째 왕고였던 광주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무척 잘해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사람이 나와 마주치면 매일같이 했던 말이 바로 '낮밥문냐?' 였다. 난 전라도 사투리를 하나도 몰라서 '낮밥'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다. 안그래도 어리버리하던 이등병시절, 천천히 또박또박 잘 말해줘도 긴장해서 두세번은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소리지른 후에야 비로소 고참이 무슨 말은 하는지 알아들었던 시기였다. 그가 내게 다가와 '낮밥문냐?'라고 말하는데, 도무지 무슨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조건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세번째였던가 네번째였던가 계속 내가 못알아듣자, 결국 그는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퍽 치고는 '낮밥 무긋냐고?'라며 언성을 높였다. 그래도 '낮밥'이 뭔지 몰랐던 나는 계속 '잘 못들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숙인 나를 내버려둔채 그냥 가버렸고, 나중에 다른 고참이 '낮밥'이 점심이라고 말해주었다. 낮밥, 이 쉬운 말을 왜 못알아들었을까? 이 시를 읽는 순간 그 고참의 얼굴과 목소리가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