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 마라톤

작년에 여성 연예인들의 철인삼종경기 참가 과정을 담은 예능 프로그램 무쇠소녀단을 열심히 봤었다. 그때 마침 나도 막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라 그들의 도전이 내게도 꽤나 자극이 되었고, 또 한편으로 자전거도 못타고, 수영도 못하는 내 입장에서 자전거를 못타는 유이와 수영을 못하는 진서연의 도전이 또 엄청난 자극이 되기도 했다. 짧은 기간 연예인이라는 바쁜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결국 전원 철인삼종경기 완주라는 엄청난 결말을 보여줬다.

이 프로그램을 볼 때 꽤나 재미있게 지켜본 것이 잠실 롯데타워 계단을 오르는 장면이었다. 비교적 초반에 나왔었는데, 실제로 열리는 대회를 보고 만든 내용이라고 했다. 와! 이거 실제로 참여해보면 엄청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요즘은 무릎이 아픈 날이 자주 있어서 예전만큼 계단을 오르지 못하지만, 몇 해전까지 계단 오르기를 운동 삼아 열심히 했었다. 내가 계단 오르기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평택의 농사짓는 마을 빈집에 들어가 살면서 환경단체 활동가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옆마을에 친하게 지내면서 잘 챙겨주시던 형님이 계셨다. 당시 나는 20대 후반, 이 형님은 40대 초반. 큰 딸이 그해에 대학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사실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의 나이차 라는 생각이 들수 있는데, 당시 전국적으로 친했던 활동가 형들이 대체로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까지 있었기 때문에 나이 차이에 대한 감각이 좀 없었다. 암튼 그시절 그 형님과 친하게 지내면서 이것저것 많이 받으며 살았다. 당시 형님은 어떤 이유로 내가 참 마음에 드셨던 것인지, 자신의 큰 딸과 사귀어보라는 권유도 하셨다. 사위로 삼고 싶으시다고. 한창 새내기로 청춘의 봄날을 만끽하고 있을 그 큰 딸이 나같은 사람에게 눈길을 줄 이유도 없지만, 나도 당시에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암튼 그렇게 친했던 형님이 나에게 자주 추천한 운동이 계단 오르기였다.

결혼을 하고 서울에 자리를 잡으면서 늘 달동네라고 불리는 언덕 위에 살았고, 전철 역까지 꽤 거리가 있는 곳에 살았기 때문에 일단 출퇴근 만으로도 충분히 하체 운동이 될만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결혼 생활 거의 대부분 등산하듯 오르막을 올라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이 형님의 충고를 받아서 나는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거의 타지않고 늘 계단을 올랐다. 주로 이용하는 노선이 6호선이나 5호선이었는데, 알다시피 4호선 이후 뒤쪽 호선들은 승강장이 매우 깊은 곳에 있었고 긴 계단을 올라야 했다. 그 계단을 실제로 걸어서 올라가는 사람은 나 외에는 거의 없었다. 한동안 계단 오르기를 즐기면서 점점 익숙해지고 나서 동시에 전철에서 내리면 맨 먼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거기서도 걸어 올라가는 사람과 나 혼자 대결을 벌이곤 했다. 어느 젊은 남성이 가장 먼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걸어오르기 시작했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비슷한 속도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해서 마지막에 누가 먼저 끝까지 올라가나 하는 대결을 혼자 머리 속으로 벌였던 것이다. 그렇게 매일 계단을 오르다보니 나중에는 조금 느긋하게 계단을 올라도 에스컬레이터로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절대 지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한때 일터가 9층에 있었던 기간이 있었다. 아마 4년 정도었던가. 그때 나는 매일 집에서 일터까지 약 30분을 걸어가서 마지막에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걸어서 출근했다. 9층은 생각보다 힘들기는 했다. 초기에는 한 6층 정도에서부터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했고, 늘 8층에서 숨이 차서 헉헉 대며 마지막 한 개층을 오르곤 했다. 이걸 몇 년 꾸준히 해서 나중에는 7층까지는 덜 지치고 오를 수 있게 되기는 했었다. 이때 매일 계단을 오르면서 20대 대학생 시절에 아파트 단지에서 쌀배달을 했던 시절 생각을 많이 했다. 이 서재에도 두어번 쓴 적이 있는 엘리베이터 점검하는 동에 계단으로 쌀을 배달했던 날을 떠올리며 계단을 오르곤 했다.

계단 오르기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기억은 작년에 보문사 마애불을 만나러 가는 길의 긴 계단을 오른 일이었다. 보문사는 강화도 서쪽 작은 섬인 석모도에 있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석모도로 들어갔었는데, 언젠가 다리가 놓였다. 친한 지인이 주말에 심심한데 강화도나 갈까요 해서 그냥 따라나섰던 건데, 그가 보문사로 향했다. 이 당시에는 몰랐고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 마애불을 만나러 오르는 길이 소원을 비는 소원계단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계단이 총 419개 있다는 정보도 봤다. 가을이었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천천히 계단을 오르다가 갑자기 전철역 계단이나 예전 9층 사무실 계단을 올랐던 리듬으로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빠르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이게 무척 즐거웠다. 한동안 전철을 탈 일이 자주 없었고, 고층으로 계단을 오를 일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자주 무릎이 아파서 어쩌다 계단을 마주해도 오르지 못하는 날들도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계단을 빠르게 오르는 것이 무척 좋았다. 같이 오르던 지인은 처음에는 따라오는 듯 숨소리가 들렀지만, 중간쯤 올라서 잠시 숨을 고르며 내려다보니 어디쯤 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이미 중간쯤 올랐을 때부터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정말 멋졌다. 땀으로 옷이 흠뻑 젖었지만, 바람이 땀을 식혀주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잠시 숨을 좀 고르고 다시 출발했다. 대략 3분의 2정도 오른 시점에서 나도 많이 지쳤다. 긴팔 상의는 땀에 흠뻑 젖었고, 속옷도 다 젖었다. 다리가 무거워졌지만, 멈추지 않고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헉헉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 들고 다리는 질질 끌리는 느낌이었다. 결국 끝까지 올라왔을 때의 나는 허리가 완전히 꺽인 채로 거의 기어오르는 것처럼 자세가 무너진 채로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너무나도 갈증이 났는데 마실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까지 오른 사람들은 다들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시원한 물을 판다면 아무리 비싸도 사 마실거라고 함께 쉬고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중간에 있는 벤치에서 쉬기도 하고 천천히 올라온 경우가 대부분이었겠지만, 나는 일부러 운동하려고 빠른 속도로 올라왔기 때문에 갈증이 더 심했다. 하지만 뭐 방법이 없었다. 함께 온 지인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내려간 후에 절 아래에서 물이나 음료수가를 사거나 구할 수 밖에. 한참을 기다려도 이 친구는 올라오지 않았다. 중간에 뭔 일이 생겼나 걱정이 들 정도로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저 아래에 그 친구가 보였고, 이미 지친 그는 거기서부터 나에게 오기까지 다시 한참이 더 걸렸다.

자, 이제 다시 원래 하던 수직 마라톤, 잠실 롯데타워 계단 오르기 대회 이야기로 돌아가자. 작년에 이 대회의 존재를 알고 나서 내년에 참여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무릎이 걱정이었다. 거리를 달리는 대회는 무릎이 조금 안 좋아도 진통제 먹고 달리면 크게 문제가 없지만, 계단은 무릎이 조금만 상태가 나빠도 오르기 어렵다. 대회 당일 무릎이 아플지 괜찮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니 이걸 신청하기가 망설여질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게다가 신청하는 일 자체가 또 쉽지 않다. 요즘은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엄청 많고, 각종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정말 많아서 매번 대회 서버가 열리는 시간 5분전에 알람을 맞춰두고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정시에 들어가도 단번에 신청에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3월 말에 열리는 불광천 대회는 그렇게 유명한 대회도 아닌데, 서버가 열리는 시간에 동시에 접속자가 몰려서 잠시 오류 메시지가 뜨기도 했었고 나는 간신히 신청 성공했지만, 달리기 모임 구성원들 중 다수는 결국 신청을 못했다고 전했다. 버튼을 누르고 정보를 입력하고 나니 이미 마감되었다고.

저 수직마라톤은 신청 서버가 열리고 채 5분도 되지않아 마감되었다는 글을 봤었다. 그럴만하다고 여겼다. 유명하지않은 대회들도 금방 마감이 되는데, 이건 독특하기도 하고, 한번쯤 도전하고픈 대회라 사람이 몰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이 수직마라톤 올해 대회 신청 일이 어제였다. 나는 어차피 신청하려고 시도해도 성공률이 높지 않을 거라는 생각과 무릎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망설이다가 그냥 포기했다. 그런데 오늘 문득 그냥 그렇게 포기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한번쯤은 꼭 해보고 싶은 대회인데, 신청이라도 해볼걸. 안 되더라도 시도라도 해볼걸. 높이 555미터, 총 123층, 2,917개의 계단을 오르는 이 대회 내년에는 꼭 도전해보리라. 올해 달리기를 꾸준히 하면서 무릎 컨디션에 따라 계단 오르기도 꾸준히 훈련해야겠다.

원래는 아산에서 열린 여자농구 챔피언 결정전 1, 2차전 결과 이야기도 하려고 했는데, 그건 다음에 써야겠다. 마지막으로 온라인으로 예매나 신청하는 각종 대회나 경기 등에 대해 짧게 얘기해보자. 사실 해마다 두 번 있는 명절을 앞두고는 부산으로 가는 열차표를 구하는 것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때에는 열차표를 구하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 매번 버스를 탔고 대개는 10시간 남짓, 좀 심한 경우엔 12시간에서 15시간, 그리고 가장 오래 걸렸던 폭설이 왔던 설날의 경우에는 17시간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렇게 몇 해를 지나면서 나는 앞으로 절대 버스는 안 타기로 마음 먹었고, 그즈음부터 코레일 앱을 통해 예매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명절 예매는 미리 예고한 특정한 날 오전 6시에 열리고, 몇 분이 지나지않아 모든 표가 사라진다. 허탈했다.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정시에 접속해도 대기번호 숫자 혹은 오류 메세지 등만 보다가 표를 구하지 못하는 헛수고를 해야 했다. 몇 번 그런 일을 겪은 이후로는 이제 그 새벽에 일어나 준비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그 시간에 표를 구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까. 나중에 막상 명절이 코앞에 다가오면 무더기로 나오는 취소표를 노리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이것도 혼자는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하기도 하는데, 아이들과 함께는 또 난이도가 엄청나게 올라간다.

작년에 야구장에 총 6번 갔다. 고척돔 1번, 잠실 2번, 문학 2번, 사직 1번. 나는 롯데 팬이라 서울과 인천의 3개 구장은 모두 원정팀이고 부산 사직구장이 홈이다. 원정 5번은 모두 롯데가 졌고, 홈에서 본 날만 유일하게 그리고 아주 감동적으로 승리했다. 이 이야기도 작년에 쓴 적이 있는데, 어렸을 때와 청소년기에 야구장을 자주 갔었다. 당시 사직구장은 7회가 되면 문을 열어줬기 때문에 돈이 없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도 야구장 근처에서 소리만 듣다가 7회에 들어가서 보곤 했다. 마지막으로 야구장에 갔던 건 아마도 대학생이었던 95년이었다. 그리고 거의 30년만에 작년에 야구장을 다시 간 것이다. 꽤 오랫동안 야구를 좋아하는 마음과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마음을 그저 마음속에 품고 야구에 관심을 두지 못하고 바쁘게 살아왔던 것이다. 작년에 비로소 여유가 생겨 처음엔 중계 방송을 챙겨보기 시작했고, 그러다 야구장에 가보고 싶어져서 롯데의 원정경기 일정을 찾아서 예매를 했던 것이다. 프로야구는 구장에 따라 예매하는 앱이 각각 다르고, 구장의 크기와 좌석 상황도 그리고 가격도 저마다 다르다. 미리 예고된 예매 시작 시간에 들어가면 괜찮은 자리 표가 있을줄 알았던 나는 물정을 몰랐다. 각 구단마다 시즌권이라고 부르는 선예매가 가능한 등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즉, 일반 예매가 시작되기 전에 시즌권 구매자들이 먼저 좋은 자리를 모두 선점한다는 이야기. 그런데 작년의 나는 여기까지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그 위에 다시 프리미엄 등급 같은, 구단마다 이름도 다르고 혜택도 다르겠지만, 돈을 더 주고 사야하는 등급이 있었고 이들이 선선예매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 본 뉴스에서는 선선선예매가 가능한 제도를 만든 구단들이 있다고 한다. 참, 영화 [1승]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며칠 전에 곧 있을 프로야구 개막전 암표가 엄청 기승이라는 소식을 봤다. 한 2만원 정도 하는 썩 좋지 않은 자리의 표를 10만원 가까이 팔아도 없어서 못구한다고. 게다가 좋은 자리는 20만원이 훌쩍 넘어간다고 했다. 아, 진짜! 이게 뭐하는 짓인지. 작년 연말인가 암튼 최근에 큰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공연을 처음으로 보러 갔었다. 꼭 보고 싶은 마음에 암표를 거의 3배 가량 주고 샀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암표를 사면 안 된다고, 우리가, 누군가가 결국 사니까 그들이 그렇게 비열한 짓을 계속 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마라톤 대회도 온갖 일들이 벌어지는 것 같다. 알고 싶지 않아서 찾아본 적은 없지만, 여기도 찾아보면 뭔가 잔뜩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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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3-21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건강이 안좋아서 한때 계단 오르기를 한 적이 있어요.아무래도 살고 있는 건물에서 하면 다른 분들께 폐가되니 집 근처 육교를 이용했는데 오르락 내리락 한 시긴정도씩 몇달을 한 기억이 납니다.고층 건물의 계단 오르기 보다는 아무래도 쉽긴한데 이것도 매일 하니 무릎등이 너무 아파서 한동안 안했는데 육교마자 철거되어 이젠 할 수 없네요ㅡ.ㅡ

감은빛 2025-03-21 21:23   좋아요 0 | URL
오호! 육교를 오르내리는 방법도 있군요.
그 생각은 못 했네요.
언젠가 뉴스에서 계단 오르기를 위해 계단만 있는 건물이 있다고 본 적이 있어요.
아파트 단지 거주자들을 위한 건물이라고 하더라구요.

카스피님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