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바지 입고서 회사를 가도


"나이 사십이 넘은 사람이 반바지를 입고 다니나?"

순간 귀를 의심했다. 환경 운동 그 중에 에너지 운동하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인가? 내가 여기 일터에 들어온 후에 서울시에서 여는 쿨 패션쇼에 모델로도 초청(에너지 활동에 종사하는 시민이 모델을 맡아 달라는 취지) 받아서 나갔을 만큼 여름에 시원하게 입고 그만큼 냉방 에너지를 덜 쓰는 것이 중요한데, 한여름에 반바지를 입었다고 지적하다니! 사실 그 분에게 예전에도 여러 번 옷차림과 외모 지적을 받았다. 늘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나에게 공적으로 중요한 자리에는 옷을 좀 갖춰 입어 달라는 지적을 몇 해 전에 받았었다. 그 분이 몰라서 그렇지 나도 나름 어디 앞에 나서서 뭘 해야 하는 자리들, 이를테면 강의나 발표나 토론 등에 임할 때에는 그래도 좀 포멀한 느낌을 옷을 입고 다닌다. 정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진 옷 중에서 가장 괜찮은 옷으로 맞춰 입는다. 그래서 그 지적을 받았을 때는 좀 억울했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외모 지적이 있었다. 특히 재작년 교통사고로 7개월을 휴직 했다가 다시 복직했을 당시에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러서 나타났다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여러 번 지적을 했다. 작년 가을 쯤부터 얼굴 흉터들이 좀 옅어져 가까이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티가 나지 않게 된 후로 더는 수염을 기르지는 않고 있다. 그때부터 조금 태도가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잊을만하면 한번씩 머리는 언제까지 기를 거냐고 묻곤 한다. 한번만 물었으면 그러려니 할텐데, 여러 번 묻고 또 물으니 이건 '보기 싫으니 얼른 잘라라.' 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느낀다.


작년 가을 중요한 시상식에서 일터를 대표해 내가 상을 받으러 나갈 일이 있었다. 당시는 긴 머리카락을 묶고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고 있었다. 난 두상이 예쁘지 않은데, 모자를 쓰지 않고 그냥 머리칼을 묶은 상태에서는 예쁘지 않은 머리 형태가 고스란히 드러나서 늘 모자를 썼다. 그리고 그 시상식에는 기자들도 많이 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서 이뤄지는 행사라 모자를 쓰지 않고 그냥 나가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머리카락을 묶지 않고 풀고 다니기에도 좀 문제가 있었다. 처음 머리카락을 기를 당시부터 한번도 머리카락을 다듬지 않고 길러서 길이가 제멋대로였고, 반곱슬이라 여기저기 뻗쳐서 보기에 예쁘지 않았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임원들 중에 누군가가 시상식에서 상을 받아주길 원했지만, 다들 그날은 시간이 안 된다며, 나보고 나가라고 했다. 이래저래 고민을 거듭하다가 나는 결국 모자를 눌러 쓴 채로 시상대에 섰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분명 누군가는 그 장면을 보고 속으로 욕을 했을지도 모른다. 예의도 없이 모자를 눌러쓰고 상을 받으러 나왔다고. 


올해 봄 단발로 머리카락을 자른 후에는 그 고민은 사라졌다. 결코 잘 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얼굴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단발머리가 내 길쭉한 얼굴형에는 나름 어울리는 느낌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럭저럭 괜찮다고 느낀다. 여기저기 뻗치는 반곱슬도 단발에는 그럭저럭 잘 어울리는 듯하다. 단발로 머리스타일을 바꾼 후에는 별다른 고민 없이 강의도, 발표도, 토론도 나가고 있다. 우연히 마주치는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놀란 반응을 보인다. 그렇다면 그 분은 적어도 2년 동안은 나랑 만나지 못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 아, 작년에 묶은 머리스타일을 보고 올해 단발을 본 사람들 중 일부가 놀라긴 했었다.


암튼 반바지 얘기하다가 수염과 머리카락 이야기로 넘어왔는데, 다시 반바지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처음 일했던 환경단체에서 좀 황당한 경험을 했다. 나이가 많은 선배 활동가에게 청바지를 입고 다닌다고 잔소리를 들었던 거였다. 정장바지나 기지바지를 입고 다니라고 했다. 정장은 아예 입지 않고, 기지바지도 전혀 없었다. 그 선배 활동가가 뭐라고 하던 말던 나는 계속 청바지를 입고 다녔지만, 그래도 좀 눈치가 보이는 자리에는 면바지를 입고 다녔다. 어떤 토론회 자리에 청바지를 입고 나갔다가 나중에 누군가에게 "네가 유시민이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유시민은 청바지가 아닌 백바지를 입고 국회에 출근했었다. 그러니 청바지 자체를 비난했다기 보다는 정장이 아닌 캐주얼한 옷차림에 대해 지적한 것이겠지.


그해 그 환경단체에 있을 때에도 여름에는 반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다음 해 다른 단체에서 일할 때에도 여름에는 반바지를 입고 다녔다. 하루는 시청에 방문해 간부급 공무원과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늘어진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등장했기 때문에 그 간부급 공무원과 그 아래 주무관들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마치 학생 다루듯 내게 반말로 말을 하길래, 내가 정색을 하고 그들의 태도를 문제삼았던 적이 있었다. 특히 그들의 주장에 헛점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조곤조곤 짚었던 지적들에 그들은 변명도 하지 못했었다.


앞서 잠시 언급했었던 서울시가 주최한 쿨 패션쇼 당시에도 반바지에 얽힌 이야기가 있었다. 서울시 공무원이었는지 아니면 외주로 그 패션쇼를 맡은 업체 직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행사 담당자였던 여성이 패션쇼에 내가 가진 반팔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올 것을 요구하면서 적절한 옷인지 판단해야 하니 집에서 반팔셔츠와 반바지를 놓고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반팔과 반바지여도 나름 포멀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참, 반팔 반바지인데 포멀한 느낌을 요구하다니. 아주 다행스럽게도 학원 강사였던 시절에 입던 반팔 와이셔츠가 두세벌 남아 있어서 상의는 오케이 판정을 받았는데 반바지는 둘 다 캐주얼 느낌이라 곤란하다는 답을 받았다. 나는 속으로 쿨 패션인데 뭐 그런 걸 다 따지나 싶어서 좀 기분이 상했다. 암튼 이것 때문에 반바지를 새로 사고 싶지도 않았고, 사러 갈 시간 여유도 없다고 전달했다. 결국 담당자는 둘 중 하나를 입으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그러고 나중에 쿨 패션쇼 당일 현장에서 다른 모델들의 옷차림을 보니 그 담당자가 말했던 것과는 달랐다. 내 반바지 보다 더 캐주얼한 반바지들을 전문 모델들이 입고 다니는 걸 봤으니. 당일 또 하나의 불만은 키가 크고 늘씬한 전문 모델들이 여러명 있어서 우리처럼 평범한 시민들은 같은 무대에 서기가 많이 불편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워킹을 보여줬으나, 우리는 그냥 평범하게 걸었을 뿐이니 누가 보더라도 비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또 현장에서 즉석으로 나와 대학생 한 명을 연인 컨셉으로 묶어서 무대에 내 보내는 상황을 연출했는데, 당시에는 그래도 지금보다는 훨씬 어려 보이기는 했지만, 30대 후반의 아저씨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을 연인이라고 했으니, 그 여성이 얼마나 기분이 나빴을까 싶다. 물론 그분은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표정 연기를 펼쳤고, 연인이라는 컨셉을 강조하기 위한 몇 가지 동작들(얼굴의 땀을 닦아준다거나, 팔짱을 끼거나 등)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어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한 이삼주 정도 전이었는데, 점심무렵 엄청 더운 날에 정장을 입고 길을 걷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그냥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만 입고 있는 나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였는데, 그 분들은 정장 재킷을 벗으면 속에 입은 와이셔츠와 속옷은 다 젖어 있지 않았을까? 제발 한 여름에는 좀 시원하게 입고 다니면 좋겠다. 그렇게 정장 재킷까지 차려 입고 에어컨을 켜는 것보다는 모두가 같이 반팔, 반바지 입고 선풍기 켜면 좋지 않은가.


DJ DOC의 [DOC와 춤을] 이란 노래는 1997년에 나왔다. 노래 가사 중 “청바지 입고서 회사에 가도 깔끔하기만 하면 괜찮을 텐데. 여름 교복이 반바지라면 깔끔하고 시원해 괜찮을 텐데.” 라는 부분이 있었는데, 사실 당시로선 반바지 입고 일터에 출근하는 건 상상도 못할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은 2022년이고, 이렇게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가 심각한 상황이라면 일터에 청바지 뿐 아니라 반바지 입고 출근해도 괜찮지 않을까?


















파친코 번역본을 기다리다가 그냥 원서로 읽자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장바구니에 넣었는데, 계속 결제를 미루다가 지난 주에야 결제하고 책을 받았다. 매일 조금씩 읽어야지 라는 생각은 역시 지키기가 쉽지 않다. 주말 동안 다른 책을 읽느라 이 책은 펼쳐보지 못했다. 원서의 한계는 역시 독해시간이다. 한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느라 시간이 엄청 오래 걸린다. 나중에 모르는 단어들을 찾아보기도 해야 하고. 역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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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2-07-25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엔 가볍게 입을 수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에어컨 더 틀어야 하고, 출퇴근길 힘들고, 옷 쓰레기 늘고... 여전히 관성에 젖어서 진짜 중요한 게 무엇인지 놓치는 건 그들인 것 같아요. 특히나 환경을 생각한다면 더 더욱 말이죠!! 반바지랑 얇은 반팔 티셔츠가 얼마나 시원하고 편한데... 게다가 요즘은 살짝 격식 차린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말이죠. 옷 사줄 것도 아니면서 함부로 지적질이네요ㅠㅠ

감은빛 2022-08-09 18:15   좋아요 1 | URL
답이 많이 늦었네요. 꼬마요정님.
정말 상식인데, 왜 다들 반바지를 못 입게 할까요?
너무나 안타깝네요.
말씀처럼 자기가 옷을 사줄 것도 아니면서. ㅎㅎㅎㅎ

건강 조심하세요. 꼬마요정님

미미 2022-07-25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족이라면 모를까 아니, 가족간에도 계속 그러면 힘들어지거든요. 매번 대거리할 수도 없고 황당하셨겠네요. 더구나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분이 그러셨다는게 신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스스로의 오류를 발견하는게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고 또 그래서 꾸준히 찾아내야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은빛 2022-08-09 18:15   좋아요 1 | URL
네, 미미님. 가족이라도 힘들죠.
그래서 저도 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답이 좀 늦었네요. 더위에 건강 조심하세요.

레삭매냐 2022-07-2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도 회사에서 반바지를 입는답니다.

긴 바지 입고 이 여름을 어케 날지
생각만 해도 답답합니다.

감은빛 2022-08-09 18:1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반바지가 절대 필요합니다.
저는 이제 긴바지 입고 출근을 못 하겠어요.
물론 글에도 적었듯이 발표나 강의 등이 있는 날엔
제일 얇은 옷으로 긴바지 입습니다.

레삭매냐님. 답이 좀 늦었네요.
더위에 건강 조심하세요!

yamoo 2022-07-27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에 반바지를 입고 가면 한 소리 들어요.

그래서 출근할 때와 퇴근할 때 반바지 입고 긴바지는 사무실에서만 입는다는...ㅎㅎ

파친코...이거 절판되기 직전에 구매해서 읽으려고 했는데, 책이 어디가서 쳐박혀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요..ㅠㅠ

감은빛 2022-08-09 18:18   좋아요 0 | URL
허! 야무님 회사도 그러는 군요. ㅠㅠ
그럼 반바지 입고 가셔서 화장실에거 갈아입으시는 건가요?
에휴, 진짜 너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파친코, 절판되기 전에 구해놓으셨군요.
저는 영어판을 사놓고 조금 읽다가 미뤄두고 있어요. ㅎㅎ
당연히 사기 전에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ㅎㅎ

얄라알라 2022-09-12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이 말씀하신 그 분, 지적질에 결코 게으름이 없으신 그 분, 이 글을 읽기만 했어도 불쾌감과 그분을 향한 반감이 올라옵니다

저는 파친코 원서로 몇 번 반복해서 읽었어요^^
챕터 마다 정리하다가 나중에는 쉬엄했지만 참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감은빛님께서도 완독하시기를 화이팅

감은빛 2022-09-15 13:12   좋아요 1 | URL
얄라알라님. 안녕하세요.
원서로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으셨다니! 대단하시네요!
저는 조금씩 야금야금 읽다가 최근에는 다른 책 읽느라 잠시 중단했네요.
확실히 원서를 읽는 것은 쉽지가 않네요.
한번에 오래 읽지를 못하겠어요.
얄라알라님의 응원을 받았으니 꼭 완독해야겠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