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효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핑계로 이번 설 명절은 부산에 내려가지 않고 집에 있었다. 작년에도 설에도 역시 코로나19 핑계로 내려가지 않았고, 추석에는 교통사고 후 회복중이란 핑계로 내려가지 않았으니, 벌써 3번째 명절을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고 그냥 보냈다. 우리 부모님께서 내게 뭐 바라는 게 있으시겠나? 그저 몸 건강하고 명절에 내려와서 얼굴 보여주길 바라실 뿐일텐데, 그것 조차 못하고 계속 불효를 저지르고 있다. 작년에 교통사고를 당해 이미 큰 불효를 저질렀는데, 불효는 계속되고 있다.

아이들을 일주일에 두세번 만나긴 하지만,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니, 가끔 전화할 때라도 아이들과 재밌게 이야기 하고 싶은데, 사춘기 아이가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거나, 아직 어린 아이가 뭔가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듣지 않으면 그게 섭섭하더라. 그런데 나는 정작 내 부모님께 어땠던가? 무뚝뚝한 경상도 아저씨라는 핑계로 부모님께조차 퉁명스럽게 대하거나 일하는 중이라고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가. 아이들을 만나지 않는 날 밤이면, 아이들이 아빠 보고 싶다고 먼저 전화해주길 바라면서, 정작 나는 얼마나 자주 부모님께 연락드리던가? 생각하면 할수록 나같은 불효자도 없는 것 같다. 늘 반성은 하지만 이놈의 경상도 남자라는 이름으로 내 몸에 딱 붙어버린 행동양식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실은 마지막까지도 고민하긴 했다. 전화로는 정부 방역지침을 핑계로 댔지만, 그래도 내려갈까 어쩔까를 계속 고민했는데, 연휴 직전에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6개월을 넘게 쉬다가 복귀한 상황에서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다시 일을 시작한 후로 쉽게 지치고 피로를 느꼈다. 출근했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죽을 것처럼 피곤해서 뻗어버리곤 했다. 그래서 이번 설 명절이 내겐 그냥 며칠 푹 쉴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부모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좀 쉬어야겠다고 마음 속으로 사죄드리며 코레일 앱을 닫았다.

벌써 토요일 밤

집에서 쉬는 내내 나는 시간 감각이 없이 살았다. 하루에도 서너개의 회의와 야근으로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 김밥을 사서 길을 걸으며 씹으며 살던 나는 시간에 쫓겼다. 회의 시간, 업무 마감 시간, 원고 마감 시간 항상 분 단위로 일정을 체크해도 일정이 어긋나거나 마감을 못 지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반작용으로 쉬는 동안에는 아예 시간을 보지 않고 휴대폰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런 삶에 익숙해졌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겨우 며칠 시간에 매여 살았더니 그 자쳬로 피곤함을 느꼈다. 이번 연휴엔 시계 따위 들여다보지 않고 그냥 먹고 자고만 반복하려고 했다. 그런데 정말 먹고 자고 숨만 쉬었을 뿐인데 토요일 밤이 되어버렸다. 이제 연휴는 겨우 하루 남았다.

물론 나는 책도 읽었고, 영화도 봤고, 아이들과 맛있는 밥도 먹었고, 운동하며 땀도 흘렸으며, 4개의 외국어(중국어, 일본어, 인도네시아어, 터키어)를 조금씩 익혓다. 그냥 숨만 쉬었던 건 아니긴 한데, 뭔가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느낌. 나는 아무것도 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연휴가 끝나간다는 우울감과 조급함이 들었다.

이건 어쩌면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정작 내가 원하는대로 뭔가가 이뤄지지는 않으니 자꾸 조급해지고 우울해지는 건 아닌가. 그런데 나는 뭘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 걸까? 자꾸만 내가 뒤쳐진 것 같고,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서, 게으른 삶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마음이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닌가. 뭐, 내가 게으른 건 맞는데 그럼 게으른 삶에 적응하고 만족하고 살아야할텐데, 자꾸 부지런해야만 가능한 일들을 머리 속에서 지우지 못하니 현실과 이상 사이에 괴리가 생긴 것이다. 하긴 내가 원하는 걸 다 이루려면 그냥 부지런한 정도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 이룰수 없을 것이다.

운동만이 위안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 풀었는데, 사고 이후 그 둘을 멀리하고 나니 이젠 무엇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물론 쉬는 동안에는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별로 없어서 잠을 잘 자는 것 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는데, 일을 다시 시작한 후로는 조금씩 걱정이 된다. 연휴 시작 전날에는 나도 모르게 후배 활동가에게 담배 한 대 달라고 부탁할 뻔 했다. 아, 나는 앞으로 평생 술, 담배 없이 살 생각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다시 할 수 있고, 이젠 알아서 그 빈도와 양을 조절할 자신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더 뒤로 미뤄보고 싶다.

그래서 대안은 아마 운동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퇴근하고 돌아와 죽을만큼 피곤한 몸을 바닥에 던져 털썩 쓰러져 있다가 옆에 있는 실내철봉과 바벨과 케틀벨과 불가리안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 당장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을 것 같지만, 저 철봉에 매달리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저 바벨을 멋지게 들어올리면 얼마나 짜릿할까 생각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무릎 보호대와 정강이 보호대와 발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신기했다. 아무것도 못 할만큼 지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바벨을 들어보니 점점 더 힘이 났다. 아니 힘은 딸리지만 의욕이 솟구쳤다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다. 기분 좋게 몸을 움직이고 씻고 간단히 먹을 것을 준비해 배를 채우고 나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우울감과 조급증도 조금 진정되었다. 역시 운동만이 위안이었다. 예전처럼 힘을 내지 못하는 근육과 삐걱대는 관절과 굳어버린 몸은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그래도 운동이 답이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타바타 버피를 해봤다. 이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오랜만에 시도해 본 거였다. 예전에는 허리에 보기 싫은 군살을 빼기 위해 자주 했던 운동이었다. 짧은 시간에 이 만큼의 칼로리를 태울 수 있는 운동은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 고강도 운동. 그 효과도 탁월해서 예전에 매일 술과 안주를 밤늦게까지 먹던 시절에도 이 운동 덕분에 복근을 유지할 수 있었다. 누군가 운동이 너무 지겹고 하기 싫다고 말한다면, 다른 운동은 하지 말고 딱 4분 동안 이 동작만 하면 된다고 말하곤 한다. 겨우 4분이지만, 아무 40분 운동한 것보다 더 힘들 것이다. 이건 타바타 방식의 장점이고, 버피의 장점은 맨몸 운도의 종합편이라 할만큼 한번에 여러 동작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편히 선 자세에서 몸을 낮춰 스쿼트 자세로 쪼그리고 앉다가 양손을 바닥을 짚고 양 다리를 뒤로 보내 엎드렸다가 그대로 푸쉬업을 하고 일어나는 동작에서 쪼그려 앉는 동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일어서고 마지막으로 제자리에서 점프하면 된다. 버피만 해도 다른 어지간한 맨몸 운동을 커버할 수 있다는 점이 내가 버피를 좋아하는 이유다.

암튼 오늘 타바타 버피를 해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오래 운동을 쉬었다고 해도 이 정도로 운동능력이 떨어져 있을 줄은 몰랐다. 총 8라운드까지 매 라운드를 전력을 다해 움직여야 하는 타바타 방식의 특성 때문에 아무리 체력이 좋고 운동을 오래한 사람도 적어도 5~6라운드부터는 지친 기색이 드러나게 마련이고, 마지막 7~8라운드는 속도가 확연히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예전에 한창 열심히 할 때에도 5라운드부터는 숨이 가빠지고 7라운드부터는 제대로 동작을 구사하기 어려워지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겨우 3라운드부터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5라운드부터는 완전히 지쳐서 몸을 움직이기 힘들었고, 6라운드부터는 정확한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며 겨우 움직이는 흉내만 내는 수준이 되었다. 이거 보통 심각한 수준이 아니다. 일단은 지금은 버피에 바로 도전할 시기가 아니라고 진단했다. 마치 운동 처음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개별 운동인 푸쉬업과 스쿼트와 제자리점프를 하나씩 차근차근 다시 해야할 것 같다. 체력을 키워서 다시 도전해야지. 예상은 했지만, 예전처럼 돌아가기 위해 가야할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연휴가 이제 겨우 하루 남았다. 남은 하루는 우울해하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느긋하게 즐긴 후 일요일 밤에 기분 좋게 잠들면 좋겠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붕붕툐툐 2021-02-14 01: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잘 살고 계시니 효자라고 생각해요~!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요가를 하지만 할 때마다 몸 컨디션이 달라요. 잘 되던 동작이 안 될 때도 있고, 어떨 땐 생각지도 않았던 동작이 너무 잘되서 스스로 놀랄 때도 있어요~ 꾸준히 하는 운동도 이런데 하물며 사고 후 회복 하시는 감은빛님은 더 하신 건 당연지사. 무리하지 말고 몸을 잘 살펴가며 하시라 원치도 않는 조언을 드리게 되네요! 진솔한 글이라 친한 분같은 느낌이 들어 그만..ㅎㅎ알아서 잘 하시고 계시는데 말이죠~ㅎㅎ

감은빛 2021-02-21 09:53   좋아요 1 | URL
와! 붕붕툐툐님 요가를 하시는 군요. 저도 오래 전에 잠시 배운 적이 있어요.
요가를 꾸준히 하는 것도 아주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물구나무 서는 동작을 가끔 연습해보곤 하는데,
균형감각이 영 꽝이라 안되는 날이 대부분이예요.

말씀대로 무리하지 않고 차근차근 하고 있어요.
남겨주신 말씀 무척 고맙습니다!

저도 친한 느낌이 들어요. 우리 벌써 친해진 거 아닌가요? ㅎㅎ

붕붕툐툐 2021-02-21 10:31   좋아요 0 | URL
와~ 물구나무 서기는 제 꿈의 동작중 하나인데, 되는 날도 있다는 거 아닙니까?👍
저에게는 요가가 잘 맞는 거 같아서 잼나게 하고 있어여~

에헷~ 저만 느끼는 줄 알았는데, 친하다고 해주시니 넘 감사하네욤!🙆

바람돌이 2021-02-14 01: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음 운동용어가 넘사벽이군요. 그냥 걷기와 간단한 스트레칭밖에 모르는 저로서는....
그래서 복근이 제게는 없는거였어요. ^^
감은빛님 휴일 보니 그냥 쉰게 아닌데요. 무척 많은 일을 하셨는데요 뭐.... 뭘하든 휴일은 눈깜박할새에 지나가고, 월요일 되자 마자부터 금요일을 기다리는게 직장인의 숙명이죠. 건강을 회복하는게 제일이니 나머지는 체력이 허용되는 한으로만 하는게 정답일 것 같아요. ^^

감은빛 2021-02-21 10:00   좋아요 1 | URL
아, 바람돌이님께 용어가 어렵게 느껴지셨군요.
예전에는 운동에 대한 글을 쓸 때 동작 이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경우도 있었는데, 운동 이야기를 자주 쓰다보니 설명을 생략하게 되네요.

복근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가려져저 보이지 않을 뿐. ㅎㅎ
저 역시 늘 복근이 잘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아침 공복에 속을 비우고 난 후에 가장 선명하게 잘 보이지만,
밥을 먹고 나면 흐릿해지거나 안 보이기도 합니다.
매체에서 선명한 복근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크게 다르지 않아요.

그렇죠. 월요일 아침부터 금요일을 기다리는 건 모든 직장인의 숙명인거죠?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희선 2021-02-14 01: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해가 오고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2월도 반이 다 갑니다 설 연휴도 다르지 않네요 그런 거랑 별로 상관없지만... 교통사고 났을 때는 부모님이 무척 걱정하셨겠지만, 지금은 감은빛 님이 잘 지내길 바라실 듯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건강하게 살기만 해도 좋지 않을지...

감은빛 님 남은 하루 편안하게 보내세요 그러고 보니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을 못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이번해에는 건강 더 잘 챙기세요


희선

감은빛 2021-02-21 10:02   좋아요 2 | URL
2월은 다른 달보다 겨우 이틀이나 사흘 적을 뿐인데도
유난히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예요.
아마 설 연휴가 끼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희선님께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답이 늦어져 새해 인사도 늦었네요.
고맙습니다!

초딩 2021-02-14 02: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4개 국어엥 운동에
대단하세요~
에효 저는 동생이 코로나로 이번엔도 못 버겠네 하던데
내려놨지만 그래도 좀 야속했었습니다. 물론 저도 잘 한 건 없지만 ㅜㅜ
그래도 서로 열심히 잘 살고 있자 했어요
사실, 전 다음 금요일밤을 점플 할 생각하며 신나해했어요. 지금 토요일이 넘 아쉬워서 ㅜㅜ

감은빛 2021-02-21 10:06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초딩님.
4개 국어를 적어놓긴 했지만,
제가 외국어를 익히는 건 아주 가벼운 수준에서
그냥 단어나 표현을 조금씩 익히는 것이 재밌어서
잠깐씩 들여다 볼 뿐입니다.
외국에 가서 현지인과 대화하겠다 뭐 이런 목표는 없어요. ㅎㅎ

과연 인류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극복할 수 있을지,
우리는 예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입니다.
고맙습니다!

cyrus 2021-02-14 1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 몸의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약속을 취소하거나 일정을 변경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약속과 일정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죄해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

감은빛 2021-02-21 10:09   좋아요 1 | URL
시루스님. 안녕하세요.
네, 말씀처럼 건강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지요.
다만 저는 코로나를 핑계로 3번 연속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어서요.
서울과 부산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자주 가지도 못 하는데 말이죠.
평소에도 아들 노릇 못 하는데, 이럴 때면 더 죄송한 마음이라서 그렇습니다.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