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 연습
레몽 크노 지음, 조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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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고, 핑계였다. 서있는 자도 아니고, 쓰러진 자도 아니고, 앉아서 존재하기를 바라는 자였다. 전날도 아니고, 이튿날도 아니고, 같은 날이었다. 북역도 아니고 리옹역도 아니고, 생라자르역이었다. 부모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어떤 친구였다. 욕설도 아니고, 조롱도 아니고, 의복에 관한 조언이었다. (29쪽 부정해가며)

남자를 생라자르역 앞에서 다시 보았는데 시간이 얼마 지나, 나는 그 조금 올려 달라고 그에게 말하는 그는 자신의 외투 위로 단추를 동료와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89쪽, 어절 단위로 늘려가며 바꾸기)

결국 두 시간 후, 생라자르역 앞에서 의복 개량을 그에게 제안하고 있는 우아한 친구 하나와 동행중인 이 인물이 다시 출현하여 내게 준 인상을 어떻게 진술하면 좋을까? (119쪽, 뭐라 말하면 좋을까?)

문학적이지도 않고, 유달리 흥미를 끈다고 할 수도 없으며, 아슬아슬한 모험담도 아니고, 서스펜스가 가득한 추리들도 아니며, 유머러스한 콩트도 아니고, 삶의 지혜나 심오한 철학이 배어있는 에세이도 아니며, 유려한 시나 웅장한 연설도 아닌, 그저 (중략) 어느 날 오후, 정오 무렵에 벌어진 이야기 하나를 우리는 보고 있다. (154-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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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노년이란 연속적인 상실의 통과의례다. 마흔일곱 살이나 쉰두 살에 죽는 것보다 전체적으로 그게 더 바람직하다. 탄식하고 우울해해 봤자 좋아지는 건 없다. 종일 창가에 앉아 새와 헛간과 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편이 낫다. 나의 일상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기쁨이다.(13-14쪽)  인생사에 좋기만 하나거나 나쁘기만 한 일은 없는 법(49쪽)' 

여든 너머까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노인, 노화를 피할 수 없다면 즐기면 되는 노년, 쓸쓸함과 불편함도 있지만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삶, 실제로 지은이 같은 노인은 많지 않다. 하루하루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노인들도 있다. 개인의 성격, 자라온 환경, 다양한 부분이 노인의 삶을 좌우한다.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정작 늙어가는 노인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일, 기쁘게 글을 쓸 수 있다면, 수십 번 수정하여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라면, 비록 사랑하는 여인은 잃었지만 지금까지 곁에서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늙는다면 암에 걸리더라도 늙는 걱정 안하고 살 수 있을 거 같다. 그래서 당신이 마음대로 말한 살고 싶은 나이가 지나게 되면 안도하게 되는 거지. '노령이라는 세계는 미지의 우주이자 뜻밖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18쪽).' 오직 그때가 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늙어가는 당사자만 알 수 있다. 여든 이후에 쓴 도널드 홀 에세이, 글이 참으로 맑고 담담하다. 관조하며, 진짜 현재를 살고 있는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덕분에 늙어가는 방식을 미리 맛 본, 모범 답(?)을 알았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매일이 똑같고, 이렇게 계속 산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내 몸 하나 잘 건사하여 주변의 도움을 최소로, 늦추게 하는 게 삶의 의미일까. 아직도 하고 싶은 것이 있어, 그것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게 살아가는 의미가 될까.  

어느 순간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게 맞는 말이 된 나이가 되었다. 

건강 검진 결과로 몇 가지 더 검사를 받았고(결과 나오는 시간 동안 지금 죽기에는 아니다 싶은, 별별 생각이 들었다. 매일 눈뜨면 별 볼일 없는 하루를 보내는데도), 설날에는 해랑 열차 여행을 다녀왔다. 아직도 잘못된 선택으로 여기고 있는 결혼한 날이 코앞이다. 그때도 눈이 오고 추운 날씨에 모두가 얼었었다. 아들이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고 초대했다. 맞아, 결혼해서 제일 잘한 일, 자식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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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 여든 이후에 쓴 시인의 에세이
도널드 홀 지음, 조현욱.최희봉 옮김 / 동아시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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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도, 어떤 일이 일어나리란 것을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해도 별수 없다. 노령이라는 세계는 미지의 우주이자 뜻밖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18쪽)

글쓰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고쳐쓰기에 있다. (26쪽)

이혼은 슬펐다. 이혼은 항상 슬프다. (중략) 자라온 환경만큼이나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취향은 달랐다. 내가 꿈꾸는 문학적 성공은 커비가 생각하는 미래를 위한 준비와 거리가 멀었다. 처음에는 이국적이어서 매력으로 느껴졌던 차이점들이 점차 보기 싫어졌고 나중엔 관계를 무너뜨렸다. (66쪽)

계속해서 추락한다는 것은 일종의 불리함이지 불명예는 아니다. (138쪽)

크리스마스나 생일에 물건을 받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책이라도 마찬가지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 좋다. (중략) 어떤 친구들은 죽어버리고, 어떤 친구들은 치매에 걸려버리고, 어떤 친구들은 서로 싸우고, 어떤 친구들은 늙어서 침묵 속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198쪽)

전체적으로 나는 똑같은 하루를 매일매일 산다. 하루의 시작과 끝에 잠깐 지루하다고 느낄 뿐 별로 개의치 않는다. (203쪽)

내겐 언제나 시가 중요했고 다른 건 거의 없었다. (2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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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나", 어떻게,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현재의 내가 진짜로 나인가? 

조만간 현실에서 나올 법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상상을 더 보태자면, 지금도 철이와 같은 이들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으로 인간다움을 알 수 있을까. 

굳이 철이와 구별한다면, 잊는다는 것, 현재와 과거, 미래가 있고, 죽음이 있는 게 아닐까. 

인간이란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고 유일한 실재인 현재는 흘러 보내면서 결국에는 자신까지 잊고 죽음으로 끝나는 것으로 구분되지 않을까.

첫 페이지에 '작별인사'를 대변하는 말이 나온다. 

"머지않아 너는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고, 머지않아 모두가 너를 잊게 될 것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예전에 본 eagle eye 영화가 기억났다. 주변에 보이는 인공지능 로봇들까지... 그런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연초부터 바빴다. 어디서 한달살기 계획이 5월로 미뤄지면서 다시 수정했다. 

-Virginia Woolf 'Blue & Green'도 읽었다. 어려웠다. 하버드생이 가장 많이 읽었다고 하니..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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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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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니 너무나 짧은 이 찰라의 생을 통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도록 분투하고.. (108쪽)

다른 종과는 달리 인간만은 죽음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기에, 죽음 이후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한다. (106쪽)

어떻게 존재하게 됐는지가 아니라 지금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집중하세요.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 집착합니다. (160쪽)

마음은 어떨까요? (164쪽)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움이 깔려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 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느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276쪽)

막상 몸이 사라지고 나니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몸으로 해왔는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몸없이는 감정다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볼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이 없고, 붉게 물든 장엄한 노을도 볼 수가 없고, 손에 와닿는 부드러운 고양이 털의 감촉도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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