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간다고 그 전의 모습과 달라진 건 없다. 모습이란 내면적인 부분이다. 나이가 들었다는 말도 타인에 의해 규정된 말 같다. 마음은 청춘인데 그런말도 있으니까. 조금만 젊었더라면 무엇을 하겠다란 그런 생각은 우스는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다. 그때는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고 지금은 그것을 하면 좋겠다란 생각이 드는 경우이니. 그런데 할 수 없는 늙음에 핑계를 대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언가를 하려면 많은 에너지와 수고가 들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지금 나이가 들었기에, 늙었기에 그 에너지가 더 많이 드는 건 아닌 거같다. 나에게서 노화는 입안에서 먼저 일어나고 있다. 치과를 다니고 있으니까. 수십년 사용해 온 몸을 최소한 가끔씩이라도 돌봐 주는 센스가 아프다는 말을 멀리할 수 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을 '늙어서 그렇다'로 치부해 버린다면 늙은이는 멀리해야 하는, 없어져야 하는 그런 분위기에 보태는 일이 된다.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 내몸이 하나의 짐으로, 그래서 폐기해야 할 짐으로 여겨진다면, 어찌할까 싶다. 아니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관리하고 돌봐야 한다. 적어도 온전한 정신으로 죽고 싶으니까. old/young or new 로 나눌 수 있는 정확한 잣대는 없다. 모든 것은 함께 가고 있는 진행 중에 있다... 이 끝에서 저끝까지가 있다면 그 끝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늙어도 덥긴 마찬가지이다. 기준은 무엇이고 누구일까? 이런저런. 끄적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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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학교 : 나이 드는 법 인생학교 How to 시리즈
앤 카르프 지음, 이은경 옮김 / 프런티어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나이 들수록 편애, 열정, 흥미, 감각, 체력의 한계를 겪을지라도 육체로부터 추방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 이전 정체성의 모든 흔적이 지워진 늙음이라고 불리는 동일한 범주로 내던져지지 않는다는 깨달음, 삶에 대한 열정으로 우리가 살면서 겪는 불가피한 박탈과 사별을 견뎌낼 수 있다는 깨달음들 덕분에 우리는 확실히 나이 듦을 덜 두려워하게 된다. (18쪽)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선의를 지닌 자선단체들이 ‘연세드신 분‘의 외로움을 덜어드리기 위해 여는 행사들을 누가 불평하겠는가. 그러나 대중문화가 각자 서로 다른 노인의 삶을 다양하게 다루지 못할 때 그 같은 행사들은 의도치 않게 노인을 오로지 취약함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보도록 부추기게 된다. (56쪽)

우리는 연장자들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나이 든 사람 역시 젊은이와 우리에게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과 똑같이 풍부한 내면 세계, 열정 및 복잡한 인간관계를 지님을 인정해야 한다. 편견은 학대로 이어진다. 혈육이든 혹은 재택 요양사든, 노인을 돌보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노인의 인간성을 실질적으로 말살하는 고정관념에 노출된 결과 노인을 부주의하거나 함부로 대하기 쉽다. 만약 우리 역시 언젠가는 나이 든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를 돌볼지 모르는 이들에게 후한 보수를 주도록 요구하게 될 것이다. (79-80쪽)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노년에 대해 쓴 논문 [노년에 관하여De Senectute]에서 "자기 안에 바람직하고 행복한 삶을 구축할 자원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어떤 나이라도 힘겹게 느낀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로지 바보들만이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나이 탓으로 돌린다고 믿었다. (95쪽)

물론 세상과 우리 몸의 상태를 불평하는 일이 삶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령자를 ‘심술궂은 늙은 남자/여자‘로 묘사하는 풍자는 우리 문화가 노인을 사회에서 소외하고 피폐시키고 무시하는 방식에 대해 많은 노인들이 느끼는 분노와 건강한 불평을 구별하지 못한다. (100쪽)

우리는 나이 들수록 삶이 위축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은 어쩌면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버리는 일인지도 모른다......가벼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한꺼번에 많은 일을 벌리지 말고, 여러 가지 일을 한 번에 하려고 하기보다는 한 번에 하나씩만 하며, 거절하는 법을 배운다는 뜻일 것이다. (117쪽)

세상에는 나이 듦을 훨씬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이 존재한다. 그 방법이란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이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오히려 더 많이 생각하고 죽음을 일상생활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죽음은 평생을 두고 우리를 쫓아 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행한다. (199족)

나이 들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하는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 죽음이 임박하지 않은 때 죽음과 더 많이 마주할수록 나이 든 사람을 죽음하고만 연관 짓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노령은 더 이상 죽음,혹은 죽어가는 상태와 동의어가 아니라 살아 있음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이 들었을 때 우리는 그 혜택을 거두게 될 것이다. (206쪽)

무엇보다 나이 듦이 인생의 끝에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뤄지는 과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뿌린 씨를 나중에 거두게 된다.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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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하기 전에 읽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지금 재고의 재고를 하는 과정이니, 무척 다행이었다. 번역 예찬이라 얼마나 매력적인 말인가. 그 속에 들어있는 살아있는 수많은 단어를 이해하고 선택하기까지 불면의 시간도 있었고, 하나의 문장과 단어 하나로 애쓴 고민이 이 글을 읽으면서 모두 해소되었다. 끝까지 집중하여 온힘을 다해 적절한 문장을 끄집어 내어 만족감도 맛보았다. 번역을 할 때 원문과의 일치 여부를 어느 정도까지 균형을 이룰건가와 진짜로 번역하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하도록 했다. 출판되어 독자의 손에 들어갔을 때, 그들이 원문을 읽어서 얻을 수 있는 지식뿐 아니라 그 책을 잘 선택한 자신을 뿌듯히 여기고, 책을 읽으면서 즐겁고 행복했으면 하는 욕심까지 내어 본다. 그 사이 아직도 이게 더 적합한 말일까? 이곳에 더 적절한 말이 머리 속에서 추상적으로 맴돌고 있는데, 아직 입과 손끝으로 와야하는 길 위에 있다. 번역하면서 느낀 마음을 다음 문장이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번역은 매력이 있다.

 

 

(80쪽)

-그 살아 숨 쉬는 언어의 단어들은 가변적이고 다면적이며, 사전에 실린 첫 번째 정의, 아니 심지어 네 번째, 다섯 번째 정의를 넘어서는 무수한 함축적 의미의 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개의 언어는 명확하지 않고 역설적이며, 애매모호하고 폭발적입니다. 번역 작품을 창조하기까지 오랜 시간 한 언어를 이해하려다 보며, 그 일의 비잔티움 양식 같은 복잡함이 놀라운, 거의 정신 분열적일 정도로 부각되고 강렬해집니다. 번역 언어도 원문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불분명하고 역동적이며 다루기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며 의미를 전달하고, 동시에 두 언어의 효과와 리듬과 예술성을 들으려고 하며, 그 가운데 두 언어 사이에서 소용돌이치고 비등하는 기호와 의미의 혼돈 속으로 뛰어드는 경험은 환각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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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예찬 - 번역가의 삶과 매혹이 담긴 강의노트
이디스 그로스먼 지음, 공진호 옮김 / 현암사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번역가가 하는 일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글을 쓴다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고쳐 쓰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원래 A라는 언어로 쓰인 문학 작품을 B라는 언어로 쓰는 것입니다. 그럴 때 B언어(제2의 언어)의 독자 즉 번역서의 독자가 정서적으로나 예술적으로 A언어(제1의 언언)의 독자가 맛본 심미적인 경험에 필적하고 상응하는 원문의 맛을 보길 바라는 것입니다. (17쪽)

번역가는 원문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원작자의 음성을 듣는 청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번역문, 즉 제2의 원문을 들려주는 화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번역가가 들은 것을 다른 언어로 재생하는 것입니다. (20쪽)

제2의 작품인 번역을 제1의 작품인 원작의 의도에 최대한 가깝게 만드는 것은, 원작의 느낌과 효과에 대한 번역자의 충실성이라는 관념에 본질적입니다. 유능한 번역가라면 흔들리지 않고 그 목적에 헌신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번역으로 읽는 책은 번역가의 글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잊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42쪽)

문학 번역가는 두 갈래로 나뉘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는 원작자의 의도를 중시해야 한다는 오리지널리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번역문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액티비스트다. 전자는 아주 미세하고 사소한 원문상의 차이까지 존중하여 번역어로 최대한 정확하게 되살리려 힘쓴다. 후자는 자의적 정확성보다는 조옮김한 음악과 같은 새 작품의 매력에 관심을 기울인다. 훌륭한 번역가라면 양쪽을 모두 겸비해야 한다. 번역은 언어와 언어 간 의미의 이동이 아니라 두 언어가 주고받는 문답이라고 페비어는 썼다. (59쪽)

독자에게나 작가에게나,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위협적인 혼선과 폐쇄된 국경을 넘어서 상호이해의 가능성에 들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번역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겁니다.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외면할 수 없는 가능성입니다. (71쪽)

번역에 항상 따라다니는 절대적으로 이상향적인 이상은 충실성입니다. 그러나 충실성을 직역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직역은 어설프고 도움이 되지 않는 개념으로, 번역과 원본의 복잡한 관계를 심히 왜곡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합니다. (79쪽)

하지만 지금 저는 두 언어로 된 동일한 원문을 다루는 일이 아직도 신비롭다는 것을 그리고 번역과 원작의 아리송한 관계를, 은유적인 방법으로밖에 불러일으킬 수 없는 역설적인 상관관계를 표현할 길을 모색했지만 헛수고였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번역하고 개고하며, 특정 원문의 번역본은 원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바보들을 향해 투덜댈 때 머릿속 어느 구석엔가 도사리고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번역을 할 때 나는 정확히 무엇을 쓰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모방일까, 사색일까, 병치일까, 아니면 완전히 다른 무엇일까? 실제로 그 원문은 어떤 언어에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그 원문과 어떤 관계일까? 이런 질문들입니다.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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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가 태어난 모천을 떠나 3년만에 꼭 그 곳으로 돌아와 죽는 이야기, 엄숙하고 장엄하고 고귀하고 무겁다. 연어의 일생으로 한편의 큰 오페라를 보는 것 같다. 인간의 하루가 너무 가벼운 느낌이 들어, 그냥 살아 버릴까 하다가도 아니, 소중하게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야지라는, 두가지 마음이 든다. 그저 태고적부터 주어진 알 수 없는 연어의 회귀를 보면서, 우리도 인생의 코드를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 정해져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살고 있으니, 그 마음이란게 도대체 무엇인지, 하루에도 몇번이나 바뀌는 거 같지만, 들여다 보니 나를 위한 마음이다. 하루를 살아내는 게, 그 누구의 마음을 내 마음에 맞추려는 노력이며, 내 맘을 알아달라는 신호를 부단히 보내고 있는 노고인 거같다. 하루를 살더라도 어떻게 살아야될까...

드디어 번역을 끝내고 에디터 손에 넘겼다.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이제사 조금 알게 된다. 얼마나 내 고집에 잡혀 있는지, 놓치고 싶지 않은 단어와 문장들을 다시 앞뒤에 맞추고 편안하게 둥글게 만드는데 쓸데없이 망설였다... 그리고 책상 서랍을 정리했다. 오래되고 지금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자꾸 머뭇대는 손이다. 그러나 정리했다. 이제는 마음을 정리해야 한다. 누군가가 좋아하고 필요한 것을 주는 것도 좋지만, 그 누군가가 싫어하는 일을 안하는 게 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야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유지라는 말에는 보이지 않는 수고와 노력이 가득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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