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
김형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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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서영은 그동안 자신이 사랑을 해본 적이 없음을 알았다. 연인 역할, 아내 역할은 해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었다. 가슴에 선혈이 맺치도록 뜨거워지다가 석류처럼 가라지고 마는, 태양이 빛나고 파도가 해변을 쓰는 것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 중이었다. 박하 잎을 입에 문듯 온몸이 화사하고, 구름다리를 걷고 있는 듯 속이 울렁거렸다. 그 경험에 놀라 서영은 경호나 인수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그 사실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었다. (101쪽)

어쩌면 수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처음에는 수진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부부 사이의 신뢰를 짓밟고 인간으로서 배덕한 행위를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수진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그 삶 속에 보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을 것이다. 한 남자와 관련된 삶을 다른 남자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자유 의지에 의한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 역시 다른 남자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배려에서였을 것이다. 결혼 생활을 보호하고 한 남자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118쪽)

사랑에는 패자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감정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가면 첫번째 사랑은 두번째 사랑에 대한 패배자일 것이다. 그러나 두변째 사랑은 영원히 그 첫번째라는 자리를 쟁취할 수 없고, 늘 첫번재 사랑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또한 패배자였다. 사랑에서는 모두들 패자가 되는구나...... (138쪽)

그들도 이렇게 사랑했겠구나..... 병실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을 떠올리는 일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상실감이나 열패감, 혹은 자기 비하감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를 보며 나무구나..... 바다를 보며 바다구나...... 말하듯이 그들도 이렇게 사랑했겠구나...... 싶었다. 그들도 이렇게 사랑했겠구나...... (143쪽)

어느날 문득...... 인수는 천천히 참외 껍질을 벗겨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그동안 옳다고 믿었던 가치들이 무가치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가장 소중했던 사물이 쓰레기처럼 여겨지는 일도 있을까. 어느 날 문득 이 세상의 비밀을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또 어느 날 문득 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밑바닥의 힘이 얼마나 단순한 건가를 알게 되면..... 그럼에도, 그날 이후에도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면..... 인수는 다 깎은 참외를 접시 위에서 반으로 갈랐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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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 일곱 권을 쌓아 놓았다. '너를 봤어'에 나오는 글들은 각 문장마다 무게가 있고, 무겁고 진한 감정이 실려 있다. 밑줄긋기를 굳이 하지 않아도 되었다. 책을 펼쳐서 나오는 데로 옮겼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관점, 원가족과 관련된 일들이 지금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 누군가에게 '나가'라고 했을 때도 있었고, '들어와'라고 했을 때도 있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정말로 사랑이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사랑하는 사람관계에서는 예전의 버릇들이 그대로 나온다. 이런 태도는 자랄 때 이미 형성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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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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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면 지상이 노을처럼 출렁이는 거리다. 자유분방한, 남 따위 의식하지 않는 듯한, 실은 매우 의식한 것으로 의심되는 차림의 사람들이 거리를 메운다. 모두가 새로우니 더이상 새로울 게 없어 오히려 고전처럼 느껴진다. (43쪽)

두 사람 호흡이 기막히다. 서로 가장 사랑하면서 가장 자유롭게 놓아둘 사람들, 그러나 언젠가 만나게 될 다른 이성에게는 치명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연인의 사랑과는 다른 모습의 사랑이 연인을 힘들게 할 것이다. 때문에 또다른 사랑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여자가 영재를, 다른 남자가 도하를 대신할 수 없다. 나는 이들이 여전히 함께하고 있을 어느 먼 날을 미리 본다. (76쪽)

싫은 것에 초연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가. 어릴 때 압정도 기억하는데 어떻게 사람을 잊나. 정이라도 붙여보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운 정마저 가지 않았다. 싫은 것도 관심이라는 말, 나는 믿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런 말을 하는 인간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 악의에 찬 관심은 협오다. 너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 하는 관심은 살기다. 싫다면서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좋아하는 거 아냐? 오, 당신 현자시여, 조롱 뛰는 심장에 단검이 꽂히기를. 싫다면 싫은 줄 아는 게 낫다. 굳이 미련이나 긍정적인 관심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싫어서 죽을 수도 있고, 싫어서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내가 환영으로 나타나면 그래서 미안했다. 너무 싫어해서. (99쪽)

"소설 참 재밌다, 할 때 정수현 작가가 있었어요. 나도 쓰고 싶다할 때도, 쓰기 시작할 때도, 정수현 때문에 나도 소설가가 됐을지 몰라요. 선배님 나한테 그런 사람이었어요."
나를 본 날,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떨리는 존재가 있구나 싶어 그대로 좋았다고 한다. 존재 그 자체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한다면 이미 소설 이상의 소명을 해낸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자신의 남자가 되었다. 떨어져 있어도 그가 거기에 있지 생각하면 그새 행복한.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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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와 '닦달'이라는 말이 내내 맴돈다. 자연상태로 있는 그대로 이끌어 나오도록,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기다리면 된다. 본인은 초조해하고 주변인은 닦달한다. 그렇게 살고 있다. 체험하지 않는 말과 글, 행동들로 과시하듯, 아는 채하며 살았다. 나를 멀리까지 밀어낼 수 있는 힘,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 낯선길로 들어 설 수 있는 마음, 다시 보는 시각, 나의 것을 뒤집어서 거꾸로 볼 수 있는 생각, 조금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그렇게 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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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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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철학은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의 정신적 우회이다. 삶을 다시 씹어보는 것, 말 그대로 반추하는 것이다. 지름길이 아니라 에움길로 걷는 것, 눈을 감고 달리지 않고 충분히 주변을 살펴보는 것, 맹목이 아니라 통찰, 그것이 철학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다. (29~30쪽)

세상의 존재들은 서로 비교를 불허하는 독특함을 가졌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덕을 지녔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안다는 것은 바로 그의 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고유한 `힘`을 이해하고 나서여 우리는 그 자체에서 수반될 수 있는 `약점`이나 `곤경`을 아무런 `악의`없이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45쪽)

어떤 학자들은 `소외`란 사람이 사물처럼 되는 것(사물화)이라 말한다. 사람들이 기계처럼 일을 하다 보면 자기 정신을 잃어버리고 사물처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외를 극복하는 것은 사람이 사물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래적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반대로 사물 편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어떨까, 하고 나는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 자연의 사물을 닮는 것은 끔찍한 일일까? 어쩌면 우리는 무턱대고 사물을 끔찍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생명력이 없고 개성 없는 사물들, 도저히 닮고 싶지 않은 끔찍한 사물들로, 소외된 인간 이전에 소외된 사물이 있는 게 아닐까? (89~90쪽)

무엇을 하든, 모든 때는 똑같이 소중하다. 우리 삶에 `각별한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각별한 때`는 우리가 모든 순간을 소중히 생각할 때 찾아온다. 함석헌이 다른 글에서 쓴 역설적 표현을 빌리자면, `각별한 때`를 따로 두지 않고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할 때 `각별한 때`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정말 읻는 사람에게는 `때가 장차 오지만, 지금도 그때`라는 말이 옳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장차의 그때`란 `지금의 이때`이기도 하다는 것,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입니다. (119~120쪽)

교양을 쌓는 호기심이 아니라 `나를 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호기심,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지식욕,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우리가 어디까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비판적 사유, 푸코는 그것을 철학이라 불렀다. (133쪽)

달리 말하면, 우리는 그 말들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나 공자, 예수난 석가의 아름다운 말들을 구경만 했을 뿐, 그것들을 진지하게 체험하지 않아따. 우리가 믿는 것은 그들의 권위였지 그 말들이 아니다. 말을 믿었다면 우리는 벌써 그것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말의 실천이 아니라, 그 말을 한 사람에 대한 숭배로 나타낸다. 즉 우리가 믿는 것은 말들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점이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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