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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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면 지상이 노을처럼 출렁이는 거리다. 자유분방한, 남 따위 의식하지 않는 듯한, 실은 매우 의식한 것으로 의심되는 차림의 사람들이 거리를 메운다. 모두가 새로우니 더이상 새로울 게 없어 오히려 고전처럼 느껴진다. (43쪽)

두 사람 호흡이 기막히다. 서로 가장 사랑하면서 가장 자유롭게 놓아둘 사람들, 그러나 언젠가 만나게 될 다른 이성에게는 치명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연인의 사랑과는 다른 모습의 사랑이 연인을 힘들게 할 것이다. 때문에 또다른 사랑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여자가 영재를, 다른 남자가 도하를 대신할 수 없다. 나는 이들이 여전히 함께하고 있을 어느 먼 날을 미리 본다. (76쪽)

싫은 것에 초연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한가. 어릴 때 압정도 기억하는데 어떻게 사람을 잊나. 정이라도 붙여보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에게는 미운 정마저 가지 않았다. 싫은 것도 관심이라는 말, 나는 믿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런 말을 하는 인간의 선의를 믿지 않는다. 악의에 찬 관심은 협오다. 너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 하는 관심은 살기다. 싫다면서 왜 그렇게 관심이 많아? 좋아하는 거 아냐? 오, 당신 현자시여, 조롱 뛰는 심장에 단검이 꽂히기를. 싫다면 싫은 줄 아는 게 낫다. 굳이 미련이나 긍정적인 관심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싫어서 죽을 수도 있고, 싫어서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내가 환영으로 나타나면 그래서 미안했다. 너무 싫어해서. (99쪽)

"소설 참 재밌다, 할 때 정수현 작가가 있었어요. 나도 쓰고 싶다할 때도, 쓰기 시작할 때도, 정수현 때문에 나도 소설가가 됐을지 몰라요. 선배님 나한테 그런 사람이었어요."
나를 본 날,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떨리는 존재가 있구나 싶어 그대로 좋았다고 한다. 존재 그 자체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한다면 이미 소설 이상의 소명을 해낸 사람이라고. 그런 사람이 자신의 남자가 되었다. 떨어져 있어도 그가 거기에 있지 생각하면 그새 행복한.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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