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서영은 그동안 자신이 사랑을 해본 적이 없음을 알았다. 연인 역할, 아내 역할은 해보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사랑은 아니었다. 가슴에 선혈이 맺치도록 뜨거워지다가 석류처럼 가라지고 마는, 태양이 빛나고 파도가 해변을 쓰는 것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처음 경험 중이었다. 박하 잎을 입에 문듯 온몸이 화사하고, 구름다리를 걷고 있는 듯 속이 울렁거렸다. 그 경험에 놀라 서영은 경호나 인수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그 사실을 제대로 알려줄 수 없었다. (101쪽)
어쩌면 수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처음에는 수진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부부 사이의 신뢰를 짓밟고 인간으로서 배덕한 행위를 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수진은 그저 자신의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그 삶 속에 보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을 것이다. 한 남자와 관련된 삶을 다른 남자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의 자유 의지에 의한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은 이유 역시 다른 남자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배려에서였을 것이다. 결혼 생활을 보호하고 한 남자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 (118쪽)
사랑에는 패자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감정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가면 첫번째 사랑은 두번째 사랑에 대한 패배자일 것이다. 그러나 두변째 사랑은 영원히 그 첫번째라는 자리를 쟁취할 수 없고, 늘 첫번재 사랑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또한 패배자였다. 사랑에서는 모두들 패자가 되는구나...... (138쪽)
그들도 이렇게 사랑했겠구나..... 병실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을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을 떠올리는 일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상실감이나 열패감, 혹은 자기 비하감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를 보며 나무구나..... 바다를 보며 바다구나...... 말하듯이 그들도 이렇게 사랑했겠구나...... 싶었다. 그들도 이렇게 사랑했겠구나...... (143쪽)
어느날 문득...... 인수는 천천히 참외 껍질을 벗겨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그동안 옳다고 믿었던 가치들이 무가치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어느 날 문득 가장 소중했던 사물이 쓰레기처럼 여겨지는 일도 있을까. 어느 날 문득 이 세상의 비밀을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또 어느 날 문득 이 세상을 지배하는 가장 밑바닥의 힘이 얼마나 단순한 건가를 알게 되면..... 그럼에도, 그날 이후에도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면..... 인수는 다 깎은 참외를 접시 위에서 반으로 갈랐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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