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땅으로 가다
권삼윤 지음 / 북폴리오 / 2004년 5월
절판


삶의 방식은 대개 풍토의 차이에 기인한다. 풍토의 차이는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에서부터 건축 방식과 도시 구조, 노동의 방식, 이동의 선호 여부, 나아가서는 신의 존재와 그 양태, 우주의 탄생, 사후 세계의 존재, 시간의 흐름 등을 인식하는 방식에까지 극단적인 차이를 보여 준다. 이에 따라 내가 생각해낸 것이 '농경과 유목'이란 이분법이다.
농경이란 주로 재배식물을 기르면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가꾸고 그 성과물을 취하되, 그것이 끝난 다음에는 자연에 되돌려주는, 그래서 순환과 지속을 중시하는 삶의 방식이다. 농업과 정착을 바탕으로 한 농경적 삶은 범신론과 우주론적 세계관을 키워냈으며 말보다는 행동을, 외향화보다는 내면화를 지향했다. 수신과 자율이 자연스례 중요한 덕목이 됐다. -7쪽

반면, 유목은 메마른 땅에 살기 때문에 농사는 지을 수 없고 무리 지어 사는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게 고작이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전부 조달할 수 없다. 부족한 것들은 대체로 원거리 사람들과의 교환 거래나 약탈을 통해 획득한다. 가축 사육과 상업 그리고 기동성으로 상징되는 유목적 삶은 땅보다는 하늘에 의지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 탓에 유일신 신앙과 창조론적 세계관, 그리고 인간 중심주의를 잉태했으며 행동보다는 말, 내면화보다는 외향화를 중시했다. 그들은 이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으며, 그 같은 이익 지향성은 공격성과 결합하여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지금의 '세계화 시대'까지 도래케 했다.
성서는 히브리인들의 작품이다. 성서의 키워드(중심어)가 떠남 또는 '이동(migration)'인 것은 그들이 유목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동 목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으로 묘사돼 있다. 유목민일지라도 땅은 필요한 것이다. 그들이 두 다리를 펴고 쉴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의 땅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구현되는 그런 공간적 의미에서의 땅도 필요해서이다.-8쪽

사랑은 선언이란 과정을 통해 '창조'되듯이 하나님의 우주 만물 창조도 그와 같았다. 성서는 우주 만물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제 나름의 용도와 기능이 정해져 있다. 하나님의 쓰임에 쓰일 도구로서, 거기에는 우연(chance)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84쪽

성서가 뱀과 출산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면 농경문화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뱀과 여성성을 받들게 된다면 자신들의 생존 근거나 정체성을 흔드는 일이 되므로 유목민인 유대인들이 그걸 우상 숭배라며 금기시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100쪽

음양은 순환구조를 갖는다. 음과 양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음은 양이 되기도 하고 양 또한 음이 되기도 하는 상보적(相補的)인 관계, 순환과 조화의 관계에 있다. 음은 결코 격퇴해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음양은 빛과 어둠과는 달리 가치 술어가 아니라 가치중립적 술어인 것이다. 빛과 어둠의 대결! 이는 사막 문화권이 갖는 정신 구조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풍토에 있는데, 순환구조가 가동되지 않는 데다 무엇보다도 그곳에 쏟아지는 빛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134-135쪽

출애굽기의 히브리어 원 명칭은 '웨일레 셰모트(Weeleh Shemoth)'로 그 뜻은 '이름은 이러하니'이다. 이름은 유대인들에겐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궁극적인 그 무엇이다. 인간의 인식은 비교 또는 대비를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즉 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를 나와 다른 '남'과 비교해야 한다. 그때 얻어지는 것이 정체성, 흔히 말하는 아이덴티티(identity)이다. 정체성이란 생명을 뜻한다. 유대인에게 이름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164쪽

여호와는 영어식 표현이고 히브리어로는 야훼라 표기된다. 야훼란 '나'라는 뜻이다. 처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일러준 "나는 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전에는 "Yahweh asher yihweh"로 기록되어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I am who I am."이고 우리 개역 성경은 "스스로 있는 자"라 번역했다. -198쪽

성전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또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그 곳에서 기도하는 인간의 심령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지붕도 없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통곡의 벽 광장은 기도의 공간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할 것이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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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밤새워 읽었던 책들이 가물되며 그때의 느낌을 또 한번 맛보았다. 마음 속에 즐겁고 아련한 뭔가가 가득차 오른다. 줄그어 가며 읽었던 글귀도 눈에 띄었다. 삼중당 문고도 생각났다. 사람마다 고전의 의미가 다르겠지만 시간이 된다면 다시 한번 손에 잡고 싶은 책들이 '고전탐닉'에 56권이나 들어 있다... 때아닌 무더위가 조금 가라 앉을 때 한권씩 읽어보면 좋으리라. 구월이다...책과 함께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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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탐닉 - 삶의 질문에 답하는 동서양 명저 56 고전 탐닉 1
허연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6월
구판절판


샤르트르 실존주의의 근간은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에서 시작된다. 존재existence는 규정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본질은 규정된 이후다.-63쪽

한 사람을 만들려면 아홉 달이 필요하지만 죽이는 데는 단 하루로 족해. 우리는 그걸 뼈저리게 깨달은 셈이지. 그러나 메이,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는 아홉 달이 아니라 6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해. 그런데 그 인간이 다 만들어졌을 때, 이미 유년기도 청년기도 다 지난 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죽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거란다.-72-73쪽

인간은 하루 중 3분의 1은 일하고, 3분의 1은 잠자고, 3분의 1은 여가로 보낸다. 일하는 3분의 1을 파헤친 사람이 마르크스라면, 여가를 정리한 사람은 피에르 부르디외이고, 나머지 3분의 1을 분석한 사람은 프로이트다. 프로이드의 도전은 위대했다.-115쪽

모든 사람들은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익을 위해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정의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173쪽

사실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문화와 경험, 환경 등에 따라 기준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을 획일화하는 순간 그건 폭력일 뿐이다. -181쪽

[미디어의 이해]라는 책을 이해하기 위해 먼전 만나야 하는 문장이 있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는 인간을 만든다"라는 구절이다. 매클루언은 인간이 주도한 미디어의 발달은 곧 인간의 감각기능을 확장한다고 주장했다. 즉 책은 눈의 확장이고, 바퀴는 다리의 확장이며, 옷은 피부의 확장이고, 전자회로는 중추신경계의 확장이라고 본다. 감각기관의 확장은 곧 감각체계의 변화를 가져오고, 이렇게 변화된 인간의 감각체계는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미디어 자체가 곧 메시지라는 이야기다. -195-196쪽

살아온 환경에 따라 사람들은 각기 다른 문화를 접하고 습득한다. 이 과정을 통해 클래식이 즐거운 사람과 클래식만 들으면 하품이 나오는 사람이 나뉘는 것이다. 그럼 환경은 무엇 때문에 나뉘는가. 결국 돈과 권력이다. 역으로 말해 그 사람의 문화 취향을 보면 그 사람의 정치적, 경제적 환경을 알 수 있는 것이다.-206-207쪽

사람들은 자식을 통해 자신이 더 놓은 계급에 속하는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는 사이 자신의 현재 계급은 점점 낮아진다. 슬픈 현실이다.-208-209쪽

지멜의 방법론은 당시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미시적인 데가 있었다. 그는 사회란 "상호작용에 의해 연결된 수많은 개인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사회 담론이 인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결국 개인은 개인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사회는 그 방식의 총합이라는 주장이었다.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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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높다. 공기는 뽀송하다. 가을이다. 소설을 소설처럼 읽으라는 '소설처럼'을 소설처럼 읽었다. 가끔씩 소리내어 읽었다. 글자가 살아서 움직인다. 아무런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다. 오로지 책속의 글과 나 뿐이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자... 책읽는 아이의 목소리에 귀만 기울이면 된다. 자꾸만 뭔가를 배우게 하고, 익히게 하고, 교육과 어른의 개입이 들어가는 순간, 책은 아이를 괴롭히는 괴물이 된다. 무엇을 어떻게 읽든 아이에게 맡겨라. 아님 책만 읽어줘라. 아무 조건 없이 기다려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기다림의 길이와 깊이와 비례한다는 점을 명심해라. 더더욱 책읽기에 좋은 계절이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줘라.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고, 묻지도 말고, 그냥 책만 큰소리로 읽어줘라. 제발 당부한다. 책에 나오는 글자 이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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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 우리시대의 지성 5-016 (구) 문지 스펙트럼 16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구판절판


교육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을 때, 우리는 얼마나 훌륭한 교사였던가?-23쪽

"자, 지금까지 읽은 내용이 뭐지? 제대로 알아들었냐고?"
하지만 아이에게 이런 식으 질문은 그만두기로 하자. 아니 어떤 식으로도 질문은 금물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 그저 읽어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조금씩 아이의 경계심이 풀어진다(덩달아 우리도 한결 느긋해진다). 아이의 얼굴에는 예전에 저녁 여행길에 오를 때마다 짓곤 하던 예의 그 꿈꾸는 듯한 몰입의 표정이 다시금 떠오른다. 마침내 아이는 예전의 우리를 알아본 것이다. 달라진 우리의 목소리만으로도. -72쪽

즉 언제 어디서나 학교의 역할은 요령과 기술의 습득, 주석 달기의 의무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학교가 읽는 즐거움을 억압시킴으로써 책과 가까워질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인 통로를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101쪽

억수같이 떨어지는 빗소리마저 잦아들게 만드는 책이라는 은신처, 귀를 때릴 듯한 전철의 진동음조차 아득하게 만드는, 책장 속에서 펼쳐지는 그 소리 없는 찬란함을 생각해보라.-106쪽

가까운 이가 우리에게 책을 한 권 읽으라며 주었을 경우, 우리가 책의 행간에서 맨 먼저 찾는 것은 바로 책을 준 그 사람이다. 그의 취향, 그가 굳이 이 책을 우리의 양손에 들러주었던 이유, 그와의 유대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표를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책의 내용에 빠져들어, 정작 책에 빠져들게 만든 장본인은 잊고 만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한 권의 문학 작품이 발하는 막강한 위력일 터이다. 일상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게 만드는......-112쪽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은 어떤 책이든 큰 소리로 읽어주셨다는 사실이에요! 교수님은 이해하고 싶은 우리의 열망에 단숨에 자신감을 심어주었어요. 큰 소리로 책을 읽어주신 덕분에 우리는 책의 높이에 닿을 만큼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책읽기를 가르쳐주신 분이지요!"-122-123쪽

조금이라도 나아질 가능성을 아예 제쳐둠으로써, 노력에 따르는 온갖 불편함을 덜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뿐이랴. 책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 많이 나온다'고 실토해버리면, 어른들이 아예 책을 읽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지 누가 알겠는가?-137쪽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글을 쓰는 시간이나 연애하는 시간처럼 말이다).
대체 어디에서 훔쳐낸단 말인가?
굳이 말하자면,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무의 시간들에서이다.
그 '삶의 의무'의 닳고 닳은 상징물인 지하철이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서관이 된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책을 읽는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이 그렇듯, 삶의 시간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랑도 하루 계획표대로 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랑에 빠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들 사랑할 시간이 나겠는가? 그런데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도 책을 읽을 시간이 좀처럼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일 때문에 좋아하는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독서란 효율적인 시간 운용이라는 사회적 차원과는 거리가 멀다. 독서도 사랑이 그렇듯 그저 존재하는 방식인 것이다.
문제는 내가 책 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그렇다고 아무도 시간을 가져다주지는 않을진대).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160-161쪽

책이란 우리의 아들딸이나 청소년들이 설명하라고 씌여진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들면' 읽으라고 씌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178쪽

어떤 작품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 때까지는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좋은 술과는 달리, 좋은 책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좋은 책들이 책장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나이를 먹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그 책들을 읽어도 좋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여겨질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새로이 시도를 한다. 결과는 둘 중 하나다. 마침내 책과의 해후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그 하나요, 실패를 거듭하는 경우가 또 하나다. 재차 실패했을 경우, 언젠가 다시 시도를 해볼 수도 있고, 거기서 그만 주저앉고 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설사 내가 아직까지 [마의 산]의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건 결코 토마스 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다.-205쪽

독서는 인간의 운명에 대하여 어떤 명쾌한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삶과 인간 사이에 촘촘한 그물망 하나를 은밀히 공모하여 얽어놓을 뿐이다. 그 작고 은밀한 얼개들은 삶의 비극적인 부조리를 드러내면서도 살아간다는 것의 역설적인 행복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만큼이나 불가사의 하다. 그러니 아무도 우리에게 책과의 내밀한 관계에 대해 보고서를 요구할 권리는 없다. -225쪽

[옮긴이의 말]
책읽기는 목적이나 실용을 떠난 무상의 행위일 뿐이라는 것.
.......

글을 읽을 줄 모르던 어린아이였을 때 그랬듯이 다 큰 아이에게도, '소리내어 크게' 읽어주라고. 그것이 책읽기에서 얻는 즐거움의 근원이며 시초였다고.-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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