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탁자 위에 놓인 물잔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설명했다. "이 물만 해도 그래. 우리집은 대수가 보리차 좋아해서 물 끓여 먹거든? 근데 봐봐, 밥상에 물 한잔 올려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절차가 필요한지. 물 끓여야지, 식혀야지, 주전자 씻어놔야지, 물병 소독해야지, 병에다 다시 물 담아야지, 냉장고에 넣어야지...... 근데 그렇게 끓인 물이 또 이틀을 못 가. 예전에 물 마실 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참, 사는 게 보통 일이 나닌 것 같아."-83쪽
고작 열일곱살밖에 안 먹었지만, 내가 이만큼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난 있다면, 세상에 육체적인 고통만큼 철저하게 독자적인 것도 없다는 것였다. 그것은 누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누구와 나눠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마음이 아프려면, 살아 있어야 하니까. -96쪽
어딜 가나 바람소리가 들렸다. 어디서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초록을 자빠뜨린 주황. 주황을 넘어뜨린 빨강. 바람은 조금씩 여름의 색을 벗기며 땅밑의 심을 앗아가고 있었다. -192쪽
가슴 뛰는 날들이 이어졌다. 내가 말하고, 그애가 답하고, 다시 그애가 말하면 내가 답하는. 한 줄의 문장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고, 한 번의 호흡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하루. 딱히 뭐라 이름 부를 수 있는 사이는 아니라도, 그저 얘기를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게 좋았다. 평소에 왜 장씨 할아버지가 나한테 그렇게 또래를 사귀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의미있고, 중요해지는 날들이었다. 그애가 하는 얘기, 그애가 쓰는 단어, 그애가 보낸 노래, 그애가 가른 여백, 그런 것이 전부 암시가 됐다. 나는 이 세계의 주석가가 되고, 번역가가 되고, 해석자가 되어 있었다. 상체를 기울여 뭔가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려 하고 있었다. 내 짐작이 맞았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져버렸다. -232-233쪽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편지를 쓰는 일보단 답장을 기다리는 일이 훨씬 더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신은 혼자 할 수 있는 거지만, 수신은 그렇지가 못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적어도 그렇게 둘 이상이 있어야 하고, 받는 사람이 최소한 자기가 무얼 받았는지 알아차려야만 가능한 일이 바로 '소통'이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도 안 생겼을 것을, 말 그대로 내가 뭔가 '했기'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도 손이나 발이 아니라 '마음'을 사용해서 한 일...... 그게 또 '마음'이라, 처방할 약으로는 상대의 '마음'만한 것이 없는......-251쪽
"에구, 나도 사람이 언제 다 크는지 모르겠구나. 더 자랄 수 없는 사람은 무얼 하는지, 그런 것도 모르겠고." "........." "근데 내가 마흔 넘었을 때 딱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이제 내 몸은 나빠질 일만 남았다, 하는. 몸이 좋아 몸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산 게 지금까지의 삶이었구나, 앞으로는 뭔가 잃어버릴 일만 남았겠구나 하고 말이야." "음" "그래도 그땐 그냥 짐작이었지. 나이란 건 말이다. 진짜 한번 제대로 먹어봐야 느껴볼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거 같아. 내 나이쯤 살다보면......음, 세월이 내 몸에서 기름기 쪽 빼가고 겨우 한줌, 진짜 요만큼, 깨달음이라는 걸 주는데 말이다, 그게 또 대단한 게 아니에요. 가만 봄 내가 이이 한번 들어봤거나 익히 알던 말들이고, 죄다." "그럼 저도 지금 아는 것을 나중에 한번 더 알게 돼요?" "그럼."-298-299쪽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 것은 나무들이 제일 잘 안다. 먼저 알고 가지로 손을 흔들면 안도하고 계절이 뒤따라 온다. 봄이 되고 싶은 봄. 여름이 하고 싶은 여름. 가을 혹은 겨울도 마찬가지다. 바람이 '봄'하기로 마음먹으면 나머지는 나무가 알아서 한다. 자연은 해마다 같은 문제지를 받고, 정답을 모르면서 정답을 쓴다. 계절을 계절이게 하는 건 바람의 가장 좋은 습관 중 하나다. -328쪽
작가의 말
소리없이 기다려준 당신과 나에게
마음이 하늘을 본다. 내몸이 바닥에 붙어 있기 때문이겠지.
바람이 불고 내 마음이 날아 당신 근처까지 갔으면 좋겠다.
이 노래가 씨앗이 될지, 휘파람이 될지, 모르는 얼굴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당신이 오래전 부르고 싶어한 이름과 닮아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inBOIL에게 바친다. 버려진 이름들에게 온기를 불어넣는 법을 나는 그에게서 배웠다.
2011년 6월 김애란-353-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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