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레알? 현실을 꿈이라 여기고 싶다. 먹먹하여 몇번이나 책을 덮었다. 마주하기 싫었다. 그 와중에 자기 삶을 오롯이 살아낸 허정숙은 대단하다. 딸을 있는 그대로 믿어주고 밀어 준 아버지가 있어서 일게다. 그리고 그만큼 받침해 줄 수 있는 지식과 힘, 여유까지... 주세죽, 고명자는 남과 북 어디에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속하지 못한 채 죽었다... 표지의 단발머리 세여자들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갔다... 그런데 근대사를 드려다보면 몇몇 남자들만 있다... 이름없이 사라져간 그녀들을 호명하여 이념의 소용돌이 기간을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로 엮은 작가도 대단한 그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세 여자 2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몽양은 잠시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명자, 이거 너무 늦은 충고인 것 같네만 60년 살아본 경험에서 나오는 얘길세.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 만나지. 그중에 어떤 사람은 지나가버리고 어떤 사람은 머무르네. 한때 자기 몸처럼 소중했던 사람이 짧은 인연으로 끝나기도 하고 금석처럼 굳세고 단단할 것 같은 관계가 어이없이 깨지기도 하네. 사람들은 각기 자기만의 인생 사이클이 있게 마련이니까. 저 스스로도 어찌 못 하는 것인데 남이 어찌할 수 있겠나. 억지로 어찌하려다 보면 집착이 되고 그게 우리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도둑질해가버린다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두고 머무는 사람은 머무르게 두게." (166쪽)

분할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단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면 그건 여운형이었을 것이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정의로, 타인을 불의로 설정하는 지점에서 역사의 비극이 싹튼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점령한 것은 분단의 시작일 뿐이었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174-175쪽)

임시정부 시절의 백범은 오른손으로 정치를 하고 왼손으로 테러를 했고 그것으로 항일투쟁의 별이 되었지만 해방 후에는 두 손을 동시에 쓰고 있었다. 이제는 동족들, 자신의 정적들을 상대로 말이다. (182쪽)

사흘 간의 속전속결은 일찍이 글러버렸고 압록강 두만강 이북으로 축출당하는 처지를 간신히 면했지만 중국과 유엔이 붙어버렸으니 전쟁은 어느 세월에 끝날지 예측불허가 되어버렸다. 무수한 인민을 희생시키고 북반부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든 책임을 누구가는 져야 할 것이다. 전쟁을 발의한 것도, 밀어붙인 것도 수상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또한 전쟁은 단기간에 끝날 것이며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스탈린과 모택동을 설득했지만 수상의 예견은 어긋났다. 스탈린이 시골 청년 하나를 발탁해 국가권력을 안겨놓았더니 이 젊은이가 기고만장한 나머지 전쟁을 벌여 파국을 자초한 셈이다. 정숙은 수상이 마흔만 넘었어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267쪽)

패전 책임이란 나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저가 책임을 모두 뒤집어쓰고 어쩌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게임이라 이것도 하나의 전쟁이었다. (290쪽)

누가 잡든 권력의 속성은 똑같다는 생각, 어느 개인이 더 현명하든 덜 현명하든 집단이 되면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렇다면 권력을 포식한 집단이 권력에 굶주인 집단보다 낫지 않을까. 굶주린 이리떼보다 배부른 사자 떼가 낫지 않을끼. 이건 가장 저급하고 비겁한 보수주의자의 사고방식인데 자신이 어느 결에 이토록 회의주의자가 되었던가, 하고 정숙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9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 여자 1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헌영이 발제를 했는데 그가 ‘반드시‘, ‘절대‘라는 단어들을 말할 때 세죽은 저도 모르게 몸이 저릿저릿했다. 그는 논리 정연했지만 그녀가 헌영에게 끌린 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확신에 찬 문장들 사이사이 잠시 침묵할 때 그의 얼굴에 내려앉는 고독의 그림자, 거기서 세죽은 동질감을 느꼈다. 강인함과 단호함에는 어떤 서글픔과 외로움이 깃들어 있었는데 그걸 엿본 사람은 그날 그 자리에서 그녀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47쪽)

그런데 명색이 사회주의자라는 사람이 비싼 축음기를 사들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다니. 유학생 처지에 커피를 입에 달고 사는 것도 그렇소.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했소. 정숙 씨는 솔직하고 명석하고 장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부르주아의 한계를 결코 벗어나지 못할 거요. 하루만 굶으면 혁명도 동지도 팽개칠 수밖에 없는 게 부르주아의 생리요. 언제든 자산계급의 물적 토대로 돌아갈 수 있는데 왜 위험이나 희생을 감수하겠고. 모르긴 몰라도 정숙 씨는 서대문형무소 사흘이면 [자본론]을 철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말거요. 쉽게 말해서 우리하고는 계급적 속성이 다른 살마이오. 갈 데 없는 부잣집 외동딸이란 말이요. (62쪽)

정숙은 일본 역사를 칼잡이 역사라고 놀려왔다. 하지만 수백 년 문과 체질로 살아온 조선의 엘리트들이 지역, 학파, 족벌로 편을 갈라서는 끈질기게 옳으네 그르네 말로 물고 늘어지는 것도 지겨웠다. (149쪽)

1920년대는 해방된 여자들을 받쳐줄 경제적, 문화적 토대가 없던 시대였다. 신여성은 너무 일찍 핀 꽃이었다. 성적, 사상적 모험을 즐긴 신여성이라면 혹독한 응징을 당하면서 인생의 쓴맛을 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허정숙이라는 신여성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너그러운 환경을 갖고 있었다. (158쪽)

1926년은 한 해 내내 공산당 사건으로 누가 검거됐다는 뉴스와 소문 속에 해가 뜨고 졌다. 정당이라는 근대적 개념으로 이 단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세 개의 일간지를 읽는 몇만 명의 인텔리 정도였고, 들은풍월과 소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옛날 옛적 구월산이나 율도국에 있었다던 녹림당이나 활빈당 같은 어떤 것이 요사이 경성에 출몰했다는 얘기인가 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 무렵 ‘공산당‘이란 어딘가 유럽산 장미의 향기를 풍기는 고급지고 이국적인 무엇이었다. 공산, ‘함께 만들어 함께 가진다‘는 말은 또 얼마나 근사한가. (161쪽)

그녀는 자신이 스캔들이나 정치적 탄압이나 경제적 파산이 아니라 육체의 기습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33쪽)

세죽은 단야와 함께 잠자리에 들 때 문든 헌영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그녀는 단야의 얼굴에 겹쳐지는 헌영의 기억을 떨쳐내려 애썼다. 하지만 기억은 지운다고 지워지는 게 아니다. 아니, 머리가 그의 이름을 잊는다 해도 몸에 새겨진 체취, 마음 밑바닥에 무늬져 있는 연민은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그녀에겐 영영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292쪽)

혁명이 완료되면 달라질 거다, 라는 생각이 바로 이상주의라는 것 아니겠소. 나는 그런 이상주의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버렸소. 정치란 양의 얼굴을 한 늑대요. 어떤 정치에도 최선은 없소. 진보는 상대적인 것이고 더 나은 쪽을 택한다는 것뿐이오. (395쪽)

하지만 세상은 드러나는 것과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세상의 부조리는 개인뿐 아니라 역사도 비켜가지 않았다. (39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럽다. 부러우면 지는건데. 그 나이가 부럽다. 단 하루의 여행도 어려웠던 그 때가 떠오른다. 지금의 일상은 당연하게 나의 것이 된 지 오래이고, 웬만해서는 마음이 미동조차 않는다. 점점점 더 큰 자극이 필요하다... 일단 이번 주말은 동해로 가는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와의 연락 - 유지혜, 스물다섯의 여행기
유지혜 지음 / 북노마드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몬드리안은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파악‘했다.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하고 ‘제시‘했다. 우리라 머리로만 알았던 철학에 숨을 불어넣어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그에게 ‘실력‘이 좋다는 칭찬은 온당치 않다. 그것은 마치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에게 벨소리의 종류를 운운하는 것처럼 어리석다. 명목 없고 허세 있는 예술은 실력이 좋은 아름다운 부품일 뿐, 탄생 자체가 되지 못한다. 평탄한 연대기를 원하는 젊음은 한 번에 모든 것을 하려 한다. 초기작도, 과정도 없다. 첫 순간에 모든 것을 보여주고 완벽해지려 한다. 그토록 어리석은 과감함을 몬드리안은 거부하고 있었다. 우리 세대의 가벼운 잘못을, 느린 과정없이 멋들어진 결과만을 원하는 시대를, 아무 의미 없는 색만 덧칠하고 과장하는 껍질에 분노하는 듯했다. 몬드리안의 그림 앞에서 다짐했다. 매일매일이 예술이 될 수는 없겠지만 ‘기다림‘을 실천하며 살아가겠다고, 하루하루 내 밖으로 내 안의 진심을 떨구겠다고, 나의 의미를 증명하는 모든 과정을 살아내겠다고. (69-70쪽)

삶이라는 제안을 더는 튕기지 않기로 했다. 매일같이 배달되는 핑계에 자물쇠를 채우고 ‘나‘만 챙겨 떠난다. (77쪽)

맥주 한 잔 이전의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담백했다가, 한 잔 그 이후에는 안쓰러운 과거 이야기도 주저 없이 꺼내들 수 있었다. (117쪽)

마음이 맞는 무언가를 만나는 순간을 일탈이자 탈출이다. 그중에서는 마음에 맞는 동갑내기를 찾는 것은 평생을 채워갈 일탈의 목록에서 가장 어렵고 향기로운 항목을 성취하는 것이다. 일일 다이어리, 수웨터, 버스 자리와는 비교할 수 없다. (121쪽)

이곳이 일상인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을 누르며 커피를 마신다. 분위기에 젖어 비행기를 처음 탄 사람이 느낄법한 두근거림을 빌렸다. 분위기의 표본이 되어주는 카페가 존재하는 것이 고맙다. 여러 만남이 기웃거리는 장소, 복작거리는 다정함의 상징, 수다가 안착하는 곳, 눈을 맞추는 곳, 혼자만의 무표정이 집중으로 소비되는 곳, 감성을 수용하는 곳, 진심이 투여된 대화가 가능한 곳, 최상의 감정이 한꺼번에 모여드는 사건은 좋은 분위기에서 비롯된다. 부누이기의 정서고가도 같은 카페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일을 떠나서 마음이 갖고 있던 모든 증세를 낫게 했다. (124쪽)

1월 1일이 지나고 똑같은 하루가 이어질 것이다. 단지 한 해의 시작이라는 그럴싸함으로 포장된 날을 통과하고 다시 무뎌질 것이다. 기대한 것이 이루어지기보다 실망하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이제는 잘안다. 덜 익은 고기와 냉동만두로 할 말을 잃게 했던 식당처럼. 바라고, 당하고, 잊히고, 흩어지고, 부대끼면서 한 해를 살 것이다. 출근길에 급하게 아이라인을 그리고, 주말을 기다리고, 크고 작은 사건에 절망하거나 열광하며, 에축할 수 없는 고약한 365개의 날들 앞에 서 있다. (214쪽)

1990년대 대표 팝송이 줄곧 나오는 이곳은 지난 추억거리를 살살 불러 모아 대화를 자주 잘랐다. 찻잔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앞에 두고 딱딱한 날들을 토로했다. 어쩔 수 없는 계산과 슬픈 오해, 깊이에 대한 허무한 착각, 툭 건드리면 무너져버릴 쓸모없는 일들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서로 말했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순화시키지 않고 툭툭 내뱉는 솔직한 얘기들. 서로의 힘든 일은 이기적이게도 가장 큰 위로가 됐다. 무엇이 그리 어려웠느냐고 묻는 친구의 표정은 삐걱대던 마음에 목공질을 했다. (222쪽)

화려한 말만 앞선다면 실천은 뒤따라갈 기력이 없이 넘어지고 만다. 하지만 원하는 것으로 서서히 다가가면 몰랐던 힘이 발휘된다. 아득했던 목표는 상상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291쪽)

요즘 시대에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진실로 자유하기란 가능한 걸까? 관심없다고 던지는 말의 진심을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프랑스 여자들의 쿨함은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자기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그 밖으 떠들썩한 이야기들은 로그아웃시켰다. 남에게 간섭하지 않는 말투는 실제로 관심이 없다기보다 자기주장을 똑바로 전달하고 그 밖의 것들에 신경을 끈다는 말이겠다. 쿨함은 나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진정한 자존감은 그들의 태도에 필수조건으로 대접 받는다. 무심하게 지키는 품위, 도도하고 꼿꼿한 지조는 꾸며낸 얼굴이 탐낼 수 없는 진실한 아름다움이다. (317쪽)

사랑을 필수로 쥐어주는 치명적인 매력은 화려하고 큰 움직임이 아니라 민낯 같은 말투와 자연스러움에서 온다......자연스러운 여자는 가장 예쁘다. 묶었던 머리를 갑자기 풀어버릴 때도 일말의 어색함이 없는. (331쪽)

‘가끔‘이어서 좋았던 것들 앞에 이제 ‘자주‘라는 말이 붙었지만 비싼 가능성만 늘어났을 뿐, 다채로운 감정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지금의 여행은 아주 가끔 이렇게 변하곤 했다. 종종 감격은 한도 초과된 카드처럼 쓸모없어졌다. 좋은 장소에서 큰 몫을 지불하기 위해 마음을 내밀지만 소모된 억지만이 긁혔다.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했다. 좋은 것을 봐도 허무함으로 답할 때도 있었다. 어쩌만 조금 더 넉넉해진 여행에 자꾸만 값비싼 구멍이 뚫리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자극을 탐하려 드는 것은, 익숙한 것을 보고 더이상 동요하지 않는 내 자신 때문이 아닐까? (33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