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여자 2 - 20세기의 봄
조선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몽양은 잠시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명자, 이거 너무 늦은 충고인 것 같네만 60년 살아본 경험에서 나오는 얘길세.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 만나지. 그중에 어떤 사람은 지나가버리고 어떤 사람은 머무르네. 한때 자기 몸처럼 소중했던 사람이 짧은 인연으로 끝나기도 하고 금석처럼 굳세고 단단할 것 같은 관계가 어이없이 깨지기도 하네. 사람들은 각기 자기만의 인생 사이클이 있게 마련이니까. 저 스스로도 어찌 못 하는 것인데 남이 어찌할 수 있겠나. 억지로 어찌하려다 보면 집착이 되고 그게 우리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도둑질해가버린다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두고 머무는 사람은 머무르게 두게." (166쪽)

분할점령이 영구 분단으로 흘러가는 와중에 분단을 피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들이 주어졌지만 불발의 역사에 그치고 만 것은 남북을 통틀어 그것을 현실화시킬 능력을 가진 정치지도자가 없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다만 가장 근접한 인물이라면 그건 여운형이었을 것이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정의로, 타인을 불의로 설정하는 지점에서 역사의 비극이 싹튼다. 미국과 소련이 남과 북을 점령한 것은 분단의 시작일 뿐이었다. 분단을 완성한 것은 어리석음과 아집과 독선이었다. 극악한 식민지 상태에서 갓 벗어난 사람들에게 대화와 타협의 매너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관대함과 현명함의 미덕은 굶주림과 인권유린이 없는 환경에서 훈련되는 것이다. (174-175쪽)

임시정부 시절의 백범은 오른손으로 정치를 하고 왼손으로 테러를 했고 그것으로 항일투쟁의 별이 되었지만 해방 후에는 두 손을 동시에 쓰고 있었다. 이제는 동족들, 자신의 정적들을 상대로 말이다. (182쪽)

사흘 간의 속전속결은 일찍이 글러버렸고 압록강 두만강 이북으로 축출당하는 처지를 간신히 면했지만 중국과 유엔이 붙어버렸으니 전쟁은 어느 세월에 끝날지 예측불허가 되어버렸다. 무수한 인민을 희생시키고 북반부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든 책임을 누구가는 져야 할 것이다. 전쟁을 발의한 것도, 밀어붙인 것도 수상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또한 전쟁은 단기간에 끝날 것이며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스탈린과 모택동을 설득했지만 수상의 예견은 어긋났다. 스탈린이 시골 청년 하나를 발탁해 국가권력을 안겨놓았더니 이 젊은이가 기고만장한 나머지 전쟁을 벌여 파국을 자초한 셈이다. 정숙은 수상이 마흔만 넘었어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267쪽)

패전 책임이란 나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루저가 책임을 모두 뒤집어쓰고 어쩌면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게임이라 이것도 하나의 전쟁이었다. (290쪽)

누가 잡든 권력의 속성은 똑같다는 생각, 어느 개인이 더 현명하든 덜 현명하든 집단이 되면 어리석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 그렇다면 권력을 포식한 집단이 권력에 굶주인 집단보다 낫지 않을까. 굶주린 이리떼보다 배부른 사자 떼가 낫지 않을끼. 이건 가장 저급하고 비겁한 보수주의자의 사고방식인데 자신이 어느 결에 이토록 회의주의자가 되었던가, 하고 정숙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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