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의 연락 - 유지혜, 스물다섯의 여행기
유지혜 지음 / 북노마드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몬드리안은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파악‘했다.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하고 ‘제시‘했다. 우리라 머리로만 알았던 철학에 숨을 불어넣어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그에게 ‘실력‘이 좋다는 칭찬은 온당치 않다. 그것은 마치 전화기를 발명한 사람에게 벨소리의 종류를 운운하는 것처럼 어리석다. 명목 없고 허세 있는 예술은 실력이 좋은 아름다운 부품일 뿐, 탄생 자체가 되지 못한다. 평탄한 연대기를 원하는 젊음은 한 번에 모든 것을 하려 한다. 초기작도, 과정도 없다. 첫 순간에 모든 것을 보여주고 완벽해지려 한다. 그토록 어리석은 과감함을 몬드리안은 거부하고 있었다. 우리 세대의 가벼운 잘못을, 느린 과정없이 멋들어진 결과만을 원하는 시대를, 아무 의미 없는 색만 덧칠하고 과장하는 껍질에 분노하는 듯했다. 몬드리안의 그림 앞에서 다짐했다. 매일매일이 예술이 될 수는 없겠지만 ‘기다림‘을 실천하며 살아가겠다고, 하루하루 내 밖으로 내 안의 진심을 떨구겠다고, 나의 의미를 증명하는 모든 과정을 살아내겠다고. (69-70쪽)

삶이라는 제안을 더는 튕기지 않기로 했다. 매일같이 배달되는 핑계에 자물쇠를 채우고 ‘나‘만 챙겨 떠난다. (77쪽)

맥주 한 잔 이전의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담백했다가, 한 잔 그 이후에는 안쓰러운 과거 이야기도 주저 없이 꺼내들 수 있었다. (117쪽)

마음이 맞는 무언가를 만나는 순간을 일탈이자 탈출이다. 그중에서는 마음에 맞는 동갑내기를 찾는 것은 평생을 채워갈 일탈의 목록에서 가장 어렵고 향기로운 항목을 성취하는 것이다. 일일 다이어리, 수웨터, 버스 자리와는 비교할 수 없다. (121쪽)

이곳이 일상인 사람들에 대한 시기심을 누르며 커피를 마신다. 분위기에 젖어 비행기를 처음 탄 사람이 느낄법한 두근거림을 빌렸다. 분위기의 표본이 되어주는 카페가 존재하는 것이 고맙다. 여러 만남이 기웃거리는 장소, 복작거리는 다정함의 상징, 수다가 안착하는 곳, 눈을 맞추는 곳, 혼자만의 무표정이 집중으로 소비되는 곳, 감성을 수용하는 곳, 진심이 투여된 대화가 가능한 곳, 최상의 감정이 한꺼번에 모여드는 사건은 좋은 분위기에서 비롯된다. 부누이기의 정서고가도 같은 카페에서의 시간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일을 떠나서 마음이 갖고 있던 모든 증세를 낫게 했다. (124쪽)

1월 1일이 지나고 똑같은 하루가 이어질 것이다. 단지 한 해의 시작이라는 그럴싸함으로 포장된 날을 통과하고 다시 무뎌질 것이다. 기대한 것이 이루어지기보다 실망하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이제는 잘안다. 덜 익은 고기와 냉동만두로 할 말을 잃게 했던 식당처럼. 바라고, 당하고, 잊히고, 흩어지고, 부대끼면서 한 해를 살 것이다. 출근길에 급하게 아이라인을 그리고, 주말을 기다리고, 크고 작은 사건에 절망하거나 열광하며, 에축할 수 없는 고약한 365개의 날들 앞에 서 있다. (214쪽)

1990년대 대표 팝송이 줄곧 나오는 이곳은 지난 추억거리를 살살 불러 모아 대화를 자주 잘랐다. 찻잔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앞에 두고 딱딱한 날들을 토로했다. 어쩔 수 없는 계산과 슬픈 오해, 깊이에 대한 허무한 착각, 툭 건드리면 무너져버릴 쓸모없는 일들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서로 말했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순화시키지 않고 툭툭 내뱉는 솔직한 얘기들. 서로의 힘든 일은 이기적이게도 가장 큰 위로가 됐다. 무엇이 그리 어려웠느냐고 묻는 친구의 표정은 삐걱대던 마음에 목공질을 했다. (222쪽)

화려한 말만 앞선다면 실천은 뒤따라갈 기력이 없이 넘어지고 만다. 하지만 원하는 것으로 서서히 다가가면 몰랐던 힘이 발휘된다. 아득했던 목표는 상상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291쪽)

요즘 시대에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진실로 자유하기란 가능한 걸까? 관심없다고 던지는 말의 진심을 의심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프랑스 여자들의 쿨함은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자기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그 밖으 떠들썩한 이야기들은 로그아웃시켰다. 남에게 간섭하지 않는 말투는 실제로 관심이 없다기보다 자기주장을 똑바로 전달하고 그 밖의 것들에 신경을 끈다는 말이겠다. 쿨함은 나에 관한 질문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진정한 자존감은 그들의 태도에 필수조건으로 대접 받는다. 무심하게 지키는 품위, 도도하고 꼿꼿한 지조는 꾸며낸 얼굴이 탐낼 수 없는 진실한 아름다움이다. (317쪽)

사랑을 필수로 쥐어주는 치명적인 매력은 화려하고 큰 움직임이 아니라 민낯 같은 말투와 자연스러움에서 온다......자연스러운 여자는 가장 예쁘다. 묶었던 머리를 갑자기 풀어버릴 때도 일말의 어색함이 없는. (331쪽)

‘가끔‘이어서 좋았던 것들 앞에 이제 ‘자주‘라는 말이 붙었지만 비싼 가능성만 늘어났을 뿐, 다채로운 감정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지금의 여행은 아주 가끔 이렇게 변하곤 했다. 종종 감격은 한도 초과된 카드처럼 쓸모없어졌다. 좋은 장소에서 큰 몫을 지불하기 위해 마음을 내밀지만 소모된 억지만이 긁혔다.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했다. 좋은 것을 봐도 허무함으로 답할 때도 있었다. 어쩌만 조금 더 넉넉해진 여행에 자꾸만 값비싼 구멍이 뚫리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자극을 탐하려 드는 것은, 익숙한 것을 보고 더이상 동요하지 않는 내 자신 때문이 아닐까?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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