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만나러 밀양까지 다녀왔다. 전도연 주연의 영화가 떠오르고, 그곳의 대추의 달콤함도 비밀스런 햇살과 관련되었다는 터무니없는 가정까지... 낮으막한 산들이 새색시처럼 수줍은 거 같지만, 치마자락 속에는 불같은 에너지가 있을 거 같은, 순전히 밀양이라는 이름 때문이리라... 수십년만에 처음 만나는 친구들도, 계속 만나온 친구들도 모두 반가웠다. 모임을 빌미로 아직까지 카톡을 보내는 건 무슨 마음일까. 무슨 마음을 알아달라는 걸까... 불쾌한 기분이 든다. 이러저러한 가운데 단풍놀이도 갔다. 서울거리의 은행나무들은 새파랗게 질려있는데... 내려 갈수록 단풍들이 눈에 들어왔다. 김려령의 '트렁크'와 정이현의 '트렁크'도 읽었고. 전자는 읽는 내내 기분이 나빴고, 단순하다 못해 그러한 혼인으로 살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까지... 후자의 트렁크에는 목적을 위해서는 누구든 트렁크에 넣어 버릴 수 있음을 알려줬다. 트렁크가 아니라 무슨 짓을 못하겠어... 지금 막 덮은 '그의 여자'는 각자의 그 남자를 기다리고 만나고 했을 때를 기억하면 두근거림과 고소한 미소까지 나올 수 있다. 나의 내밀한 기억들과 불쾌한 기분은 트렁크에 넣고 잠궜다. 이제 버릴 일만 남았다... '그의 여자'에서는 완전히 가질 수 없는 그 남자 대신 소소한 물건들을 만날 때마다 챙긴다. 이제 그의 여자가 될 수 있다는 상황에서는 애써 챙긴 물건들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그녀의 마음을 잡게 되는 새로운 물건이 자리 잡는다. 결국 그녀는 또 다른 그 이들의 여자가 될 수 있음을 남겨둔다. 누군가와 온전한 만남을 하기까지의 순간 순간의 감정들을 세밀화처럼 그려냈다. 한때 나의 마음도 그러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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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자 엠마뉘엘 베르네임 소설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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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클레르는 혼자 숲 속을 걸었다. 그녀는 죽은 나뭇가지들을 밟아 부러뜨리기도 하고 진창을 철벅철벅 밟고 다니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이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점심을 아주 많이 먹었다. (27쪽)

그가 그녀 위에 누워 있거나 그녀가 그 위에 누워 있을 때, 둘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다 한 사람의 오른팔이 한데 엉긴 몸에서 빠져나가기라도 하면, 다른 사람의 왼팔이 즉시 그 오른팔을 포개었다. 둘은 키가 거의 비슷했다. 그래서 이마에서 발가락까지 토마스는 클레르에게 꼭 맞고, 클레르는 토마스에게 꼭 맞았다. (41쪽)

클레르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계단에 앉아 기다릴 정도로 그녀가 보고 싶어 달려왔다면서, 그는 왜 카페로 가자고 했을까? (57쪽)

하지만 그는 언제 떠났가가 언제 돌아올까?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는 휴가에 대해서는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80-81쪽)

그녀는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그는 `올여름`, 그리고 `우리`라고 말했다. 일월, 이월, 삼월, 사월, 오월, 유월, 적어도 여섯 달 동안은 그들은 헤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우리`를 되뇌었다. 토마스와 그녀는 이제부터 `우리`가 되는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올여름에는 우리 정원에서 저녁을 먹읍시다.` 따뜻한 날씨, 정원에 놓인 하얀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들. 의자의 수는 네 개. 토마스의 아내가 주방에서 나온다. 클레르는 머리맡 램프의 스위치를 찾았다. 이제 더는 토마스의 아내를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토마스에게 아내는 없다. (132쪽)

그녀는 서랍을 꽉 잡고서 휴지통 위로 기울였다. 그녀가 서랍을 좀 더 기울이자 금빛 봉지, 각설탕, 마른 장미 열두 송이, 샴페인 코르크 마개, 폴라로이드 사진들, 응답기 테이프들, 노란색 플라스택 막대가 소리 없이 휴지통으로 떨어졌다. (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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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일까. 인간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을 믿고 사랑하고 싶었지만 그 방법을 몰랐던, 스스로를 폐인이며 인간 실격자라 여겼던 서투른 한 사람의 고백서(136쪽)"를 읽었다. 모른척하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요조는 그 조차 들키고 만다. 속고 속이는 세상사에서 모른척 하고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없는 요조는 죽음을 택하지만 혼자 살아남게 되고, 깊은 죄의식으로 절망감에 빠진다. 믿고 마지막 호의로 따라간 곳은, 정신병원으로, 그곳에서 인간실격, 완벽한 폐인으로 스스로 낙인 찍는다... 이렇게 예민하고 순수하여, 이런 사람도 있구나. 그걸 이용하는 사람도... 답답....인간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변상황이나 구조적인 문제와 개인의 선택과 책임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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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클래식 보물창고 35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아영 옮김 / 보물창고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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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 수단에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호소해도, 어머니에게 호소해도, 순경에게 호소하거나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세상살이에 강한 사람이 세상이 좋을 대로 할 만한 기세 좋게 떠들어 대는 건 아닐까. 편파적일 것이 자명하다. 결국 인간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저는 역시 진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저 참고 우스갯짓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3쪽)

아침에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난 저는 원래의 경박하고 가식적인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조차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솜으로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 입는 일도 있습니다. 상처를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다고 서두르고, 늘 하던 우스갯짓으로 연막을 쳤습니다. (58쪽)

세상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간의 복수(復數)인 걸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강하고, 엄격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세상이라는 건 자네가 아닐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88쪽)

"아니, 이제 필요 없어."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남이 권하는 것을 거부하지는, 제가 살아 온 인생에 있어, 그때 단 한 번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저의 불행은 거부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 데 거부하면, 상대방의 마음에도 저의 마음에도, 영원히 고칠 수 없는 금이 갈 것 같은 두려움에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125쪽)

완벽한 폐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을 안 뒤로 저는 점점 더 무기력해졌습니다. 아버지가 이제 없다, 나의 마음속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그 그립고도 두려운 존재가 이젠 없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몹시도 무거웠던 것은 아버지 탓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했습니다. 완전히 맥이 풀렸습니다. 고뇌할 능력조차 잃어버렸습니다. (127쪽)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 세계에 있어, 단 하나의 진리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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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전의 그녀의 글을 읽었는데, 아직도 유효하다...그녀의 세밀하고 뾰족한 글이 내맘에 금을 내고 있다...

일터에서는 어느새 고령자 축에 들어가 있고, 집에서는 원가족보다 더 가까운? 가족이 되어 각각의 삶을 살고 있고 - 어느 순간 아주 오랫만에 본 듯한 느낌까지, 누구세요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나오는 정도- 이제는 진짜로 나의 삶에 몰입할 수 있고, 나만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굳은 의지까지 생겼다...그러면서 홍상수감독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를 보고 북촌을 돌아 인사동까지 자박자박한 걸음으로 시월을 시작했고...전어, 새우가 살아 뛰는 서해안 낙조까지 보고 오면서 시월을 지나고 있다... 순간의 기억들이 각색과 윤색을 통해 최적화된 이미지로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지금 추억하고 있는 기억이 과연 맞는 걸까. 맞다면 누구의 기준일까... 그래서 각자의 스타일대로 사는 거다. 누구의 잣대보다는 나의 기준으로, 그 기준을 조금 더 멋지고 세련되게 만들려면 열심히 일을 하여 민생고부터 해결하여야 하고, 그리고 등등... 나에게 온 명품이 누가 봐도 짝퉁이 아니라 명품으로 끄덕여 지길...스스로 명품(물건을 칭하기도 하지만 삶의 질을 더 많이 포함하고 있음)을 누릴 만하다는 당당함까지... 그 정도에 다다를 수 있는 강하고, 우아하고, 기품있는 마음의 수위까지 조절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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