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호소한다. 저는 그 수단에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호소해도, 어머니에게 호소해도, 순경에게 호소하거나 정부에 호소해도, 결국은 세상살이에 강한 사람이 세상이 좋을 대로 할 만한 기세 좋게 떠들어 대는 건 아닐까. 편파적일 것이 자명하다. 결국 인간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저는 역시 진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저 참고 우스갯짓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3쪽)
아침에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난 저는 원래의 경박하고 가식적인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겁쟁이는 행복조차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솜으로도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행복에 상처 입는 일도 있습니다. 상처를 입기 전에, 얼른 이대로 헤어지고 싶다고 서두르고, 늘 하던 우스갯짓으로 연막을 쳤습니다. (58쪽)
세상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간의 복수(復數)인 걸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강하고, 엄격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세상이라는 건 자네가 아닐까?`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습니다. (88쪽)
"아니, 이제 필요 없어."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남이 권하는 것을 거부하지는, 제가 살아 온 인생에 있어, 그때 단 한 번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저의 불행은 거부할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권하는 데 거부하면, 상대방의 마음에도 저의 마음에도, 영원히 고칠 수 없는 금이 갈 것 같은 두려움에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125쪽)
완벽한 폐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을 안 뒤로 저는 점점 더 무기력해졌습니다. 아버지가 이제 없다, 나의 마음속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그 그립고도 두려운 존재가 이젠 없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몹시도 무거웠던 것은 아버지 탓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했습니다. 완전히 맥이 풀렸습니다. 고뇌할 능력조차 잃어버렸습니다. (127쪽)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 세계에 있어, 단 하나의 진리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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