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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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시 말해 지금 읽어도 새로운 것은 쓰인 당시에도 새로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전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당대의 진부함과 싸워야마 했습니다. 고전은 당대의 뭇 책들과 놀랍도록 달랐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렇기에 진부함과는 정반대에 서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낡거나 진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책들은 살아남았고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고 후대로 전승되었을 겁니다. (16쪽)

우리는 자기 자신과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변은커녕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요. (27쪽)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31쪽)

사람들은 흔히 환상에 빠져 현실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일까요? 인간이 그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현실에 너무 집착해 자기 내면의 정신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요? (67쪽)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요. (69쪽)

책을 읽는 매 순간, 우리는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읽겠다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해서 한 권의 책을 끝내게 됩니다. 완독이라는 것은 실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만 읽고 싶다는 유혹을 수없이 이겨내야만 하니까요. (84-85쪽)

강가의 오리나무와 버드나무는 그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의 눈을 통해 보여진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독자는 그뒤에 의미가 감춰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허투루 보아 넘기기 않습니다. (87쪽)

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얻은 것은 고유한 헤맴, 유일무이한 감정적 경험입니다. 이것은 교환이 불가능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한 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104쪽)

한갓 독자에 불과한 제가 작가의 무의식을 파헤치려고 노력하고 소설을 작가가 읽기를 원한 대로 읽지 않으려 애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소설을 읽는 행위가 끝없는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소설은 일종의 자연입니다. 독자는 그것의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 자연을 탐험하면서 독자는 고통과 즐거움을 모두 느낍니다. (136-137쪽)

우리는 우리를 언제나 잘 모르고 있습니다. 소설이 우리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것임에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괴물을 만나기 위해 책장을 펼칩니다. (176-177쪽)

류슈디가 통찰했듯 책은 독립되어 있을지 몰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는 물이나 바다처럼 유동적이빈다. 그것은 흘러다니고 합쳐지고 나눠지고 인간의 내부를 `가득 채우`곤 합니다. 그러므로 독자가 된다는 것은 이야기의 바다에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물을 받아 마실 수 있는 `계약자`가 되는 것입니다. (192-193쪽)

그렇다면 소설을 읽는 것은 바로 이 광대한 책의 우주를 탐험하는 것이빈다. 우리는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처럼 하나의 책을 통해 그 우주에 들어갑니다. 책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문이자 다른 책으로 연결해주는 징검다리입니다. 소설과 소설, 이야기와 이야기, 책과 책 사이의 연결을 찾아내는 것은 독자로서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면서도, 그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의 연결점을 찾아나가고, 그런 경험을 쌓아나가면서,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소설과 소설 사이의 유사점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독자는 자기만의 책의 우주, 그 지도를 조금씩 완성하게 됩니다. (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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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동안 '정희진처럼 읽기'를 나처럼 읽었다. 한권의 책이 그녀의 몸을 통과하면서 쓴 글은, 읽은 이의 빰을 때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으면서까지 굳이 읽을 필요는 있을까 하다가, 다시 펼치면, 이도저도 아닌 나의 앎의 수준? 가장 최악의 수준을 확인하는, 그래서 나의 부족보다는 그녀의 전투적인 내용에다 변명과 핑계를 댔다. 그녀의 읽기가 정답일까도 있지만, 새롭게 읽기를 통해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에는 동의한다. 온 몸을 던져서 책읽기를 해야 나를 조금이나마 볼 수 있겠다는, 그래도 책읽기를 통해 조금씩 바뀌고 있었잖아, 이건 속도의 문제지 질의 문제는 아니라는 실소에 가까운 변명까지, 읽는 내내 불편했다. 한마디로 엄청 무식한 나를 발견했다. 그래도 책읽기를 계속하다 보면 자신을 좀 더 알게 되면서 주변인과도 함께 나눌 수 있으리라고 애써 위로한다. 그리고 지금도 나누고는 있잖아, 하며 쓰담쓰담까지. 괜찮은 책을 권하고 사서 주는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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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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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눈은 거만해서 한번 `아름다운`것을 경험하면 다시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소비나 경험 자체가 그런 것이다. (18쪽)

습득은 객관적, 일방적, 수동적 작업인 반면에 배치는 주관적, 상호적, 갈등적이다. 자기만의 사유, 자기만의 인식에서 읽은 내용을 알맞은 곳에 놓으려면 책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책의 위상과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 자기 입장이 있어야 하고, 자기 입자잉 전체 지식 체계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가, 그리고 또 지금 이 책은 그 자리의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37쪽)

즉음은 삶의 끝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 뿐이다. 사후 세계에 다녀온 사람은 없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에 비해 삶의 고통은 너무나 생생하다. 바로 우리 곁에서 경험하고 잘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구체적인 고통보다 관념적인 죽음의 공포에 압도된다. 타이느이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엄청난 노동이다. 체제는 이러한 현실을 "신의 뜻", "생명의 소중함", "남은 사람의 고통" 등 엉뚱한 언어로 포장한다. (83쪽)

`사랑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는 게 사랑인가? 공부도 마찬가지다. 하라고 해서 하게 되는 게 아니다. 사랑과 공부 모두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양도 불가능한` 한 사람, 개체의 몸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112쪽)

말을 섞는 것은 살을 섞는 것보다 훨씬 육체적인 행위다. 대화는 상대의 몸에 삼투압을 일으키고 화학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몸의 변용이 인생이고, 삶이 고해인 이유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며 그런 이를 만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드물게 `그 사람`을 만났다 해도 사랑과 제도는 상극이다. 이성애, 가족, 계급은 최고의 제도 권력으로서 진정한 사랑을 방해한다. 대화 이전에 이미 각종 갑을로 설정된 관계 자체가 스트레스다. (119쪽)

`위어조자 언재호야.` 996자를 알아도 마지막 네 글자 조사를 모르면 글을 쓸 수 없다. 문장의 성립은 조사로만 가능하니, 문장은 결국 조사의 기술(art)이다. 글자와 조사의 관계를 실과 바늘, 나사와 볼트처럼 짝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둘의 위치는 동등하고 불가분이다.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소용없다. 그러나 이들은 동등하지 않다. 사실은 조사가 더 `우월`하다. 글자들의 관계, 즉 문자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뜻이 있는 글자가 아니라 뜻이 없는 글자, 조사다. 무의미는 모든 의미다. 뜻의 무게를 진 자는 사용이 한정되지만,조사는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문자를 배치하고 지배한다. 의미(권력)없음이 의미를 통제하는 것이다. (157쪽)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순수한 보고가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태도, 입장을 드러내는 행위다.(투사!) 모든 발화는 객관적일 수 없다. 지식은 인식자의 렌즈를 통해 우리 앞에 재현된 것이다.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가 자기에 대해 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199쪽)

그러나 역사 인식은 자랑스럽든 창피하든 통일된 의견이 있을 수 없다. 구성원 각자가 경험한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문 피해자나 산업화 과정에서 인권 침해를 겪은 이들의 역사를 타인이 규정할 수는 없다. 지식인이 할 일은 남의 경험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지식인의 사명감? 자신을 아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겨우 사명이란 말로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그렇다 치더라도, 혼자 알아서 하면 되지 사명으로 선포할 일은 아니다. (223-224쪽)

그깨 혹은 지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당시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이는 사건 이후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238쪽)

이해(理解)는 읽는 이의 이해(利害)관계와 관련이 있다. 그러니 이해는 난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이해의 영어 표현(under/standing)이 좋다. 이해하려는 대상 아래 서 있으려는 겸손한 마음, 이것이 첫 번째 자세다. 이해는 사랑과 지식을 아우른다. 사랑은 수용이다. 상대를 수용할 때 이해는 따라온다. 이해는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선입견이든 지식이든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은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충돌은 앎의 지름길이다. 먹지 못할 떡을 두 손에 든 사람들이 있다. 절충은 아는 방법,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앎 자체와 가장 거리가 먼 행위다. 욕심일 뿐 지식도 정보다 아니다. (283-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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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과 잉크, 적어도 펜에 대한 추억이 있다면 이 책을 금방 구입할 수 밖에 없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아껴가며 읽고 오는 길에도 읽었다. 그러면서 그때의 사람들이 마음속 깊은 데서 쑥 올라왔다. 문명의 이기랄까. 기계치도 금방 찾을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고1때 짝꿍을 찾아 그애가 재잘되던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대학때 만났던 사람까지, 한참을 주고 받은 이야기는 각자의 바램대로 아주 예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서로의 기억의 조각을 맞춰가며 웃었다. 응답하라 1988까지 불붙여 준 저녁이었다. 놓쳐버리고 설레며 다가가지 못했던 그녀, 그이들을 기억했다. 삼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 여전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 그들과의 이야기는 순전히 만년필 때문이었다. 나야 어찌됐던 그들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감정만이라도 그대로이기를 마음 한켠으로 바랬을 수도. 그들 또한 그랬을 수도... 기억 속에서 잡지 못하고 서로 엇갈려 갔던 그 순간은 아련했지만 서로에게 빛나고 있었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그것도 모자라 카톡으로까지, 지금 돌아보니 섭섭하고 나빴던 게 하나도 없다. 만년필을 찾아보고 잉크 한병을 구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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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좋을 그림 - 여행을 기억하는 만년필 스케치
정은우 글.그림 / 북로그컴퍼니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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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각해보라. 언제든 바뀌거나 또 사라질 수 있는게 소속감이다. 나이 오십 전에 모두 퇴사한다고 가장했을 때 우리는 소속이 없는 상태로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속이나 지위가 없어졌을 때 `나`도 없어졌다고 생각하기 일쑤다. 우리가 혼자 잘할 수 있는 것, 스스로 재미있게 즐기며 몰입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5쪽)

하지만 우리의 행복과 무관심에 누군가는 마음 아플 것이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누군가 우리로 인해 아파한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안 했다고 말하는 게 과연 떳떳한 일일까? (53쪽)

여행지에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먹든 내가 살던 곳과 다른 것들뿐이다. 그 여행이 언젠간 끝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정신이 각성되지 않을 도리도 없다. 그러다 보면 거대한 성채 못지않게 작은 들꽃, 수상한 저녁노을, 길가의 돌멩이, 산책하는 여자와 개, 그 모든 것이 돌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86쪽)

많은 자가용 통근자가 아침마다 졸린 눈을 부비며 도심으로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고, 자기 몸무게의 스무 배가 넘는 쇠덩이를 힘겹게 끌고 가기 위해 인생의 주요한 시간과 번 돈의 대부분을 지출하며 알 수 없는 슬픔에 빠진다. 자동차는 결코 이동수단의 승리가자 아니었다. (97쪽)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생각에도 한계가 없었겠지. 때론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외려 우릴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104쪽)

우리가 정작 걱정해야 하는 것은 윌 곁의 세계문화유산에는 무관심하면서 유럽의 고풍스러운 도시나 성당 앞에 서면 그게 뭐가 됐건 일단 감성을 과소비하고 보는 문화사대주이다. 그게 부끄러운 일인 줄도 모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11쪽)

오랜 시간이 흘러도 쉬이 없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 그것을 고스란히 물려주고 싶다. 물론 어렵겠지만. (134쪽)

도시가 일종의 유기체인 이유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걸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삶은 다르다. 도시의 모습에서 그곳 시민들의 철학을 읽어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144쪽)

그럼에도 지구 곳곳에서 아직도 도시의 상징으로 타워를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 도시민 누구에게나 어디에서 바라보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뭔가를 필요하다는 암묵적 동의 때문 아닐까. 신경숙의 말마따나 그 자리에 항상 같은 모습으로 곁에 있는 무언가는 인간에게 위로를 준다. 그게 사람인지 타워인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 한결같은 빛을 뿜어내며 곁에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무엇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인간은 타워를 지어왔고 지금도 짓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을 것이다. (189쪽)

나는 문득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한때임을 깨달았다. 귀한 줄 모르고 쉽게 흘러보낸 시간, 사람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려왔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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