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눈은 거만해서 한번 `아름다운`것을 경험하면 다시는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소비나 경험 자체가 그런 것이다. (18쪽)

습득은 객관적, 일방적, 수동적 작업인 반면에 배치는 주관적, 상호적, 갈등적이다. 자기만의 사유, 자기만의 인식에서 읽은 내용을 알맞은 곳에 놓으려면 책 내용 자체도 중요하지만 책의 위상과 저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려면 기본적으로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는 자기 입장이 있어야 하고, 자기 입자잉 전체 지식 체계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가, 그리고 또 지금 이 책은 그 자리의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37쪽)

즉음은 삶의 끝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을 뿐이다. 사후 세계에 다녀온 사람은 없다.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에 비해 삶의 고통은 너무나 생생하다. 바로 우리 곁에서 경험하고 잘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구체적인 고통보다 관념적인 죽음의 공포에 압도된다. 타이느이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엄청난 노동이다. 체제는 이러한 현실을 "신의 뜻", "생명의 소중함", "남은 사람의 고통" 등 엉뚱한 언어로 포장한다. (83쪽)

`사랑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하는 게 사랑인가? 공부도 마찬가지다. 하라고 해서 하게 되는 게 아니다. 사랑과 공부 모두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양도 불가능한` 한 사람, 개체의 몸에서 일어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112쪽)

말을 섞는 것은 살을 섞는 것보다 훨씬 육체적인 행위다. 대화는 상대의 몸에 삼투압을 일으키고 화학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이러한 몸의 변용이 인생이고, 삶이 고해인 이유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며 그런 이를 만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드물게 `그 사람`을 만났다 해도 사랑과 제도는 상극이다. 이성애, 가족, 계급은 최고의 제도 권력으로서 진정한 사랑을 방해한다. 대화 이전에 이미 각종 갑을로 설정된 관계 자체가 스트레스다. (119쪽)

`위어조자 언재호야.` 996자를 알아도 마지막 네 글자 조사를 모르면 글을 쓸 수 없다. 문장의 성립은 조사로만 가능하니, 문장은 결국 조사의 기술(art)이다. 글자와 조사의 관계를 실과 바늘, 나사와 볼트처럼 짝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둘의 위치는 동등하고 불가분이다.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소용없다. 그러나 이들은 동등하지 않다. 사실은 조사가 더 `우월`하다. 글자들의 관계, 즉 문자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뜻이 있는 글자가 아니라 뜻이 없는 글자, 조사다. 무의미는 모든 의미다. 뜻의 무게를 진 자는 사용이 한정되지만,조사는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문자를 배치하고 지배한다. 의미(권력)없음이 의미를 통제하는 것이다. (157쪽)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순수한 보고가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자신의 생각, 태도, 입장을 드러내는 행위다.(투사!) 모든 발화는 객관적일 수 없다. 지식은 인식자의 렌즈를 통해 우리 앞에 재현된 것이다.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인식자가 자기에 대해 아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199쪽)

그러나 역사 인식은 자랑스럽든 창피하든 통일된 의견이 있을 수 없다. 구성원 각자가 경험한 역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문 피해자나 산업화 과정에서 인권 침해를 겪은 이들의 역사를 타인이 규정할 수는 없다. 지식인이 할 일은 남의 경험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일이다. 지식인의 사명감? 자신을 아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겨우 사명이란 말로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또 그렇다 치더라도, 혼자 알아서 하면 되지 사명으로 선포할 일은 아니다. (223-224쪽)

그깨 혹은 지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당시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이는 사건 이후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238쪽)

이해(理解)는 읽는 이의 이해(利害)관계와 관련이 있다. 그러니 이해는 난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이해의 영어 표현(under/standing)이 좋다. 이해하려는 대상 아래 서 있으려는 겸손한 마음, 이것이 첫 번째 자세다. 이해는 사랑과 지식을 아우른다. 사랑은 수용이다. 상대를 수용할 때 이해는 따라온다. 이해는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선입견이든 지식이든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은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충돌은 앎의 지름길이다. 먹지 못할 떡을 두 손에 든 사람들이 있다. 절충은 아는 방법, 인식할 수 있는 능력, 앎 자체와 가장 거리가 먼 행위다. 욕심일 뿐 지식도 정보다 아니다. (283-28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