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옷의 세계 -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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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은 A도 아니고 B도 아닌 이 경계를 문지방 영역이라고 표현했다. 아이가 크리스마스 양말 속에 손을 넣는 순간부터 양말 속 선물을 만지게 되는 순간까지. 먹장구름이 우리 머리 맡에 잔뜩 운집해 있는 순간에서부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순간까지. 당신이 나에게 오기로 한 그날로부터 당신이 나에게 도착하게 되는 순간까지. 이 사이들. 이 짧은 시간 안에는 설렘과 긴장과 예감과 떨림이 농축돼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더없이 길고 긴 체험의 시간이다. 한 세계와 또 한 세계의 문지방위에서, 기대에 대한 희망과 절망의 교차점을 통과하면서,우리는 가장 농밀하게 흔들리는 시간을 산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화학적으로 성숙한다. (48-49쪽)

침묵은 무엇을 지키는 데에 쓰이기도 하지만 무엇을 행사하는 데에도 쓰인다. 침묵은 경청과 묵살이라는 두 극단을 모두 포함하낟. 침묵이하는 것은 내가 행할 때는 가장 신중한 방패지만, 타자가 행할 때는 가장 뾰족한 창일 수 있다. 나의 침묵은 방패처럼 나를 보호해주지만, 너의 침묵은 뾰족한 창처럼 나를 찌를 수 있다. 나는 말보다는 침묵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우선 말해볼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그러므로 실은 우리를 위해서. 매사에, 번번이, 계속해서. (70쪽)

지금 여기, 윌가 하필 같이 있을 때, 우리가 같이 있는 이유가 만들어진다. 이유는 변한다. 세밀해지고 증식된다. 절망과 두려움은 이겨내는 게 아니라 밥처럼 마주 앉아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사이로 희망이 끼어들어 이유를 완성한다. (115쪽)

인간은 고통에 관한 한 무력하다. 나쁜 말은 육체에 새겨진 통점을 아주 쉽게 건드리고 상승작용을 한다. 육체에 내장된 통점은 나쁜 말에 순발력 있게 반응한다. 인간이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을 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의 숙주가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잊기보다는 익숙해지기. 고통의 숙주가 되어간다는 것은, 통증의 수위만큼을 인내심으로 제방을 쌓아두는 행위이다. 인내심이라는 제방은 한꺼번에 무너져버리거나 혹은 서서히 균열이 간다. 결국 인내심은 거짓말의 또 다른 얼굴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 사랑 가득했던 과거완료형의 말들이 오히려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거짓말과 같아지는 순간. (164쪽)

추억은 요물이었다. 살아가는 지금을 맨눈으로 보게 하질 않았다. 추억은 경험치라는 편견의 도수에 맞춰진 안경이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울 나의 선택들을 막는, 트라우마로 직조된 장애물이었다. 추억은 번번이 고정관념이라는 굳은살로 새로운 사물들을 새롭지 않게 만지게 했다. 추억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처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꿈과 다르지 않았다. 인과관계는 까맣게 잊힌 채로, 제멋대로 기억을 기억하는 몹쓸 것이었다. (169쪽)

누구에게나 자기 한계는 주어져 있다. 이것에 주목하여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 `시선attention`이라고 한다면, 자기 한계를 기회로 받아들여 입장을 갖추기 시작하는 지점을 `시점viewpoint`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야vision`라는 것은 시선과 시점이 새로운 작용을 낳는 능력이다. 시선은 관심으로, 시점은 입장으로, 시야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시선을 통해서는 나를 다시 보고, 새로운 시점을 통해서는 당신을 다시 보고, 새로운 시야를 통해서는 세상을 다시 본다. (194-195쪽)

물론, 생활의 비참이 영혼의 비참과 닿아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실은 대부분의 우리들은 비참하다. 그러나 조금 위험하게 말하자면, 생활의 비참과 영혼의 비참의 연관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그 연관 고리를 끊어냄으로써 생활의 비참에 영혼만큼은 물들지 않기 위해서, 자본 논리를 벗어나 다른 층위에서 삶을 바라보기 위해서, 최소한 노예는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는 시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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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을 방문하여, 그 곳에 고여있는 침묵에 대하여, 침묵의 필요성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글로 읽고 체험하기란 아주 어렵다. 저자 또한 막연히 밖에서의 수도원과 머물면서의 수도원에 대하여 자신의 잘못된 이해를 기록하고 자신의 변화된 마음을 기록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침묵을 강요한다. 수도원이 어떻게 세워지고, 수도원의 문화, 수도생활을 하는 그들의 삶은 이쪽에서 본 우리들의 시각을 수정해 준다. 특히, 수도원의 가득 채워진 침묵을 저자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수도자에 대하여 생 방드리유 대수도원의 아빠스가 말한, "아주 특별하지요. 어떤 성정에는 잘 맞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93쪽)" 수도생활을 하는 그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이뤄졌고, 그 선택은 이쪽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상이하게 다른, 그들의 삶을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것. 그 누가 그곳에 살고 싶겠는가. 특별한 자 만이 선택되고 선택받아 그곳에서 기도하고, 자신의 맑은 영혼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다. 침묵을 한다면 다른 감각의 눈으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거 같지만, 내가 원한다고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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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위한 시간 - 유럽 수도원 기행 봄날의책 세계산문선
패트릭 리 퍼머 지음, 신해경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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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기도를 마친 수사들이 흩어졌다. 몇 시간 뒤에 끝기도까지 마치고 나자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일 분 일 초가 지날수록 혈관의 피는 느려지고 말라붙어 어느 곁에 심장박동이 멈출 것처럼 오싹한 기분이었다. 이 사람들은 정말로 매일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세상과 화해하고, 죄를 보속(補贖)받고, 성사(聖事)를 통해 보호받으며, 자정에 가까운 어느 때라도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가 되면 죽음은 가장 손쉬운 변신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죽음의 침묵과 죽음의 외양, 죽음의 안색, 그리고 유령의 걸음걸이를 손에 넣었으니까, 마지막 단계는 그저 사소한 통과의례일 뿐일 테지, 나는 혼잣말을 계속했다. (29-30쪽)

사람들은 수도 생활이라는 개념을 늘 있어왔던 하나의 현상으로 치부하고는 별다른 분석이나 비평 없이 머릿속에서 치워버리는 경향이 있다. 잠시 수도원에서 살아보는 것만이 우리의 일상과 수도 생활이 얼마나 극명하게 다른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두 가지 삶의 길은 단 하나의 요소도 서로 공유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도원 거주자들을 둘러싼 생각과 욕망, 소리, 빛, 시간, 분위기는 우리가 익숙한 그 어느 것과도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뭔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정확하게 반대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상식적인 기준들이 물러가고 이상한 신세계가 실체를 갖춰가는 과정은 느렸고, 처음에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36-37쪽)

수도자에게 일생이란 영원에 비하면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찰나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흠숭하는 데도 짧은 생이고, 지극한 행복으로부터 추방당한 동료들의 영혼을 위해 미약하게나마 신과 인간을 중재하는 데도 모자라는 시간이다. 세상의 가치들이 급속히 변화하는 와중에도 수도자들의 가치는 온전히 남았다. 해마다 변화하느라 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외부 세상에서 수도 생활에 겨눈 조롱을 듣는 현실이 어처구니가 없다. 그리스도교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든 간에 수도 생활이 위선과 게으름, 이기주의의 발현이자 현실도피일 뿐이라고 비난하는 주장은 그 얼마나 얄팍한가! 수도자들은 작열하는 확신과 각고의 노력으로 한 생을 보낸다. 거기엔 휴일도 없다. 무엇보다 살아 있는 사람치고 수도자들이 믿는 전제들이 참 또는 거짓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도자들은 세상의 가치들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그 가치들이 주는 즐거움과 보상을 단호하게 끊었다. 그들만이 동시대인들과 스스로를 돕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채 맨몸으로 무시무시한 영원의 문제와 대적해왔다. (44-45쪽)

나는 시토 수도회의 어떤 일면을 보고 움찔한 만큼 일반적인 편견을 가졌고, 트라피스트회 수도생활의 기저에 거의 초인적인 관대함과 이타심이 놓여 있음을 알아챌 정도로는 세상물정을 알았다. 그리고 내 편견과 안목이 모두 엄밀하지 않다는 사실과 내게는 거기서 발견한 것들을 마음대로 재단하고 기록할 만한 정신적 도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 정도의 겸손함과 직감은 있었다. 내가 믿음에 관한 천부적인 재능과 수도 생활에 딱 맞는 천성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트라피스트회 수사가 될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 사실 또한 나는 알았다. (93쪽)

매일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침묵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 안에 숨어 있는 거소가 가려져 있는 것을 모두 떠올려 한 번에 걷어낼 수 있는 시간, 최소한의 균형을 잡고 삶의 방향을 재조정할 시간이. 저자에게 수도원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명징한 정신과 평온한 마음과 새로운 활기를 채워 세상 속으로 되돌려줄 곳이 절실하다. 도달하기 어려운 어떤 곳을 가장 현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우리에게 결핍된 것이 무엇인지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 작은 책은 빼어난 여행서가 분명하다. (155-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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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여행자를 따라 이곳 저곳을 다녔다. 종로서적도 생각나고, 파주 지혜의 숲, 서울도서관, 삼중당 문고판도 생각났다. 고개를 뒤로 젖혀 볼 정도의 높은 천장까지 닿아있는 책장에 사다리를 걸치고 책을 찾아보고 싶다. 책이 가득한 그 공간, 책 냄새, 책장넘어가는 소리 등등이 떠오른다. 그렇게 읽다보면 환상과 현실에서 분명한 자리를 잡을거고, 분명 좋은 생각을 하게 될 거고,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꽃샘추위로 바람 부는 쓸쓸한 날에 1호선을 타고 달려가 시집이 가득 꽂힌 그 아래에 쪼그려 앉아서 읽었던 책들이 그립다. 아직도 코끝에 달려있는 아련한 기억 속의 책냄새, 그 냄새를 맡기 위해 이리저리 찾아 다녔던 도서관들도, 책 속에 갇혀 있고 싶었던 그날들로 달려가고 싶은 날이다. 책여행자를 따라가는 길은 상쾌했다. 나를 조금씩 바꾸고 있는 책들, 책이 만들어주는 한단어, 한문장, 그 속의 그 길을 따라 계속 걷고 싶다. 가득 내려온 커피까지, 햇살이 내려 앉은 창가까지 오늘은 덤이 많아서 즐거운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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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3-10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납니다 삼중당문고
장정일의 말마따나 글씨가 깨알같던...
그 많던 삼중당 문고는 다 어디로 갔을까요?

JUNE 2015-03-10 20:21   좋아요 0 | URL
글씨가 깨알같고, 세로쓰기로 되어 있던 책, 중고시절에 삼중당문고를 선물로 주고받았던. 그리고 서문문고는 세로쓰기가 두단으로 되어 있었고, 가격은 모두 몇백원이었지요...책냄새가 가장 구수했던 삼중당문고, 아껴가며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책여행자 - 히말라야 도서관에서 유럽 헌책방까지
김미라 지음 / 호미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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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가 책을 읽고 쓰는 이유는 위험한 이상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문학은 내 생각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겠다는 의도를 내려놓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고 공감할 수 있는 장소다. 의도 없이 서로 이해하려는 시간이다. 그제야 비로소 문학은 모두의 문학이 될 수 있다. (40쪽)

사실 우리는 혁명가로서의 마르크스를 알고는 있지만, 그가 14년 동안 대영도서관에 틀어박혀 싸구려 담배를 피워 대며 [자본론]을 썼던 긴 침묵의 기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가 항상 앉았던 시멘트 바닥이 닳아서 움푹 파였다고 할 정도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마르크스를 어떻게 보았을까? 어쩌면 단지 하릴없이 도서관에 다니는 실업자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 낸 결과를 보면 결코 무의미가 아니었다. (47쪽)

문자가 만들어 내는 환상 속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을 통해 냄새를 맡고, 입맛을 다시고, 노래를 부르고, 먼 곳을 향해 나가야 한다. 책읽기는 온몸을 부딪쳐서 하는 것이고, 그렇게 온몸이 책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사람의 독서법이다. (65쪽)

런던, 뉴욕, 파리..., 이 도시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꿈에 휩싸이게 한다. 우리가 이 유명한 도시를 여행하고 싶은 이유는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만 보았던 머릿속 환상의 장소를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그런 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대부분은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의 무게와 피곤한 다리, 이방인이라고 힐끔힐끔 바라보는 시선들,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는 고소한 냄새에 고픈 배를 ㄷ라래야 하는 실질적인 일들로 이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경험은 골방 속에서 나 홀로 빚어내곤 하던 희미하고도 불완전한 세사오가는 또다른 기쁨을 준다.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에만 실감할 수 있는 게 있다. (193쪽)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그 간극을 좁혀 가는 일. 그것이야말로 책방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아무리 책 속에, 영화 속에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곳으로 달려간다면 바로 내가 그곳의 현실이 될 수 있다.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놀이를 하기에는 그 어디보다도 파리가 제격이다. (196쪽)

뉴욕은 화려한 만큼이나 많은 것을 잊기 쉬운 도시이다. 그래서 더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대도시의 고급문화가 마치 치장과 허세의 도구로 더욱 유용해지고 있는 듯 보일 때, 고급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얼구로가 옷차림에는 하이클래스라는 자부심이 묻어날 때, 나는 예술의 목적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진다. 그런 자체로 인간의 영혼을 이야기한다는 건 왠지 아이러니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223쪽)

책이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 내면의 은밀한 문제가 드러나는 곳이 책의 공간이며, 그 안에서 정상과 비정상을 떠나서 날것 그대로의 인간이 보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책을 쓰고, 또 읽고 있는 것이 아닐까.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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