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은 A도 아니고 B도 아닌 이 경계를 문지방 영역이라고 표현했다. 아이가 크리스마스 양말 속에 손을 넣는 순간부터 양말 속 선물을 만지게 되는 순간까지. 먹장구름이 우리 머리 맡에 잔뜩 운집해 있는 순간에서부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순간까지. 당신이 나에게 오기로 한 그날로부터 당신이 나에게 도착하게 되는 순간까지. 이 사이들. 이 짧은 시간 안에는 설렘과 긴장과 예감과 떨림이 농축돼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더없이 길고 긴 체험의 시간이다. 한 세계와 또 한 세계의 문지방위에서, 기대에 대한 희망과 절망의 교차점을 통과하면서,우리는 가장 농밀하게 흔들리는 시간을 산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화학적으로 성숙한다. (48-49쪽)
침묵은 무엇을 지키는 데에 쓰이기도 하지만 무엇을 행사하는 데에도 쓰인다. 침묵은 경청과 묵살이라는 두 극단을 모두 포함하낟. 침묵이하는 것은 내가 행할 때는 가장 신중한 방패지만, 타자가 행할 때는 가장 뾰족한 창일 수 있다. 나의 침묵은 방패처럼 나를 보호해주지만, 너의 침묵은 뾰족한 창처럼 나를 찌를 수 있다. 나는 말보다는 침묵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우선 말해볼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그러므로 실은 우리를 위해서. 매사에, 번번이, 계속해서. (70쪽)
지금 여기, 윌가 하필 같이 있을 때, 우리가 같이 있는 이유가 만들어진다. 이유는 변한다. 세밀해지고 증식된다. 절망과 두려움은 이겨내는 게 아니라 밥처럼 마주 앉아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사이로 희망이 끼어들어 이유를 완성한다. (115쪽)
인간은 고통에 관한 한 무력하다. 나쁜 말은 육체에 새겨진 통점을 아주 쉽게 건드리고 상승작용을 한다. 육체에 내장된 통점은 나쁜 말에 순발력 있게 반응한다. 인간이 고통을 잊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고통을 망각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의 숙주가 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잊기보다는 익숙해지기. 고통의 숙주가 되어간다는 것은, 통증의 수위만큼을 인내심으로 제방을 쌓아두는 행위이다. 인내심이라는 제방은 한꺼번에 무너져버리거나 혹은 서서히 균열이 간다. 결국 인내심은 거짓말의 또 다른 얼굴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언젠가는 그렇게 된다. 사랑 가득했던 과거완료형의 말들이 오히려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거짓말과 같아지는 순간. (164쪽)
추억은 요물이었다. 살아가는 지금을 맨눈으로 보게 하질 않았다. 추억은 경험치라는 편견의 도수에 맞춰진 안경이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울 나의 선택들을 막는, 트라우마로 직조된 장애물이었다. 추억은 번번이 고정관념이라는 굳은살로 새로운 사물들을 새롭지 않게 만지게 했다. 추억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처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꿈과 다르지 않았다. 인과관계는 까맣게 잊힌 채로, 제멋대로 기억을 기억하는 몹쓸 것이었다. (169쪽)
누구에게나 자기 한계는 주어져 있다. 이것에 주목하여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 `시선attention`이라고 한다면, 자기 한계를 기회로 받아들여 입장을 갖추기 시작하는 지점을 `시점viewpoint`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시야vision`라는 것은 시선과 시점이 새로운 작용을 낳는 능력이다. 시선은 관심으로, 시점은 입장으로, 시야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시선을 통해서는 나를 다시 보고, 새로운 시점을 통해서는 당신을 다시 보고, 새로운 시야를 통해서는 세상을 다시 본다. (194-195쪽)
물론, 생활의 비참이 영혼의 비참과 닿아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실은 대부분의 우리들은 비참하다. 그러나 조금 위험하게 말하자면, 생활의 비참과 영혼의 비참의 연관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그 연관 고리를 끊어냄으로써 생활의 비참에 영혼만큼은 물들지 않기 위해서, 자본 논리를 벗어나 다른 층위에서 삶을 바라보기 위해서, 최소한 노예는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는 시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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