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교사와 학생이 승승하는 안전한 학교 공동체로 나아가는 '회복적 생활교육'에 관하여 아직 발걸음을 떼고 있는 환경에서, 기본 이론서나 실천서 같은 책을 번역하려고 읽은 글이다. 학교현장에서의 분노와 수치심을 넘어 존중과 협력, 관계성 강화. 연결과 공감으로 추상에서 현실의 한발로 굳건이 내딛도록 노력하고 있는 저자를 만나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보태고자 한다. '회복'은 괜찮은 원래가 있다는 말이므로 희망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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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적 생활교육을 만나다 - 공동체가 새로워지는
박숙영 지음 / 좋은교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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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의 원인을 가해 학생의 개인적 문제로만 접근하는 방식은 학교 폭력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 개인의 부족한 인성도 문제지만, 개인의 인성이 가정. 경제. 사회구조적 환경과 상호 작용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학교 폭력의 원인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인성의 문제라고만 볼 수가 없다. 오히려 입시 위주의 경쟁적인 학교 구조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협력하기보다 비교와 경쟁을 통해 승자가 되어야 하는 구조 속에서는 학생들 사이에 폭력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 모순이 있다. 학교 폭력은 학생 개인보다는 오히려 경쟁과 폭력적 구조를 강화하고 유지시키고 있는 기성세대와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 정직한 고백이다. (22쪽)

상벌에 의해 행동을 수정했다면 그 내면의 동기는 대부분 두려움, 죄책감, 수치심이다. 두려움이나 수치심은 학생들로 하여금 저항이나 복종, 도피를 불러온다. 결과적으로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가 단절되어 서로에 대한 존중이나 협력, 자발적 책임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38쪽)

결국 `생활지도`의 개념은 `잘못한 행동에 대해 교사의권위에 의존한 처벌과 통제 중심`의 의미를 지녀온 것이다. 반면, `생활교육`은 잘못한 행동에 대한 것뿐 아니라, 학생들의 전반적인 생활에 대한 교육적 접근을 의미한다. 학교라는 공동체 속에서 준엄한 개인들이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면서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능력을 키우는 교육 과정인 것이다. 이는 이전의 `생활지도`보다 훨씬 폭넓은 개념이다. 생활교육은 교육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수업을 개인이 공동체 안에서 상호 존중과 협력을 통해 배움을 익히고 확산하는 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수업도 생활교육의 중요한 한 영역으로 인식한다. 학교 공동체가 연결과 공감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통제의 관점인 `생활지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48-49쪽)

존중이란 무엇인가? 수라 하트(Sura Hart)는 "존중이란 말의 핵심 의미는 `살핀다`이다.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는 경험을 살펴 보는 것, 특히 그들이 갖고 있는 느낌과 욕구를 살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존중은 `허용한다`의 의미보다는 `살핀다`에 더 초점이 가 있다. (74쪽)

교사가 최선을 다하지만, 교사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회복적 생활교육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문제 해결 과정에 공동체가 모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교사는 문제에 답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내려놔야 한다. 왜냐하면 교사는 문제의 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답은 문제의 당사자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교사는 학생들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고, 열린 공간에서 학생들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말하고 들을 수 있도록 격려해주면 된다. (90-91쪽)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관계적 존재다. 회복적 생활교육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인간 본성인 `관계성`을 단단하게 유지. 강화시키고, 훼손된 관계는 복구하고 회복하는 것이다.....`관계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라는 의미는, 교실에서 단절된 관계를 `연결`과 `공감`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94-95쪽)

잘못한 행동을 한 학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교사가 아니라 학생 그 자신의 내면의 힘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교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변화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분노와 폭력의 공간을 평화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판단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판단을 멈춘다는 것은, 상대방의 문제점과 무지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의 행동에 대해 재판관 역할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에 머문다는 것을 의미한다. (115쪽)

왜 학생들은 많이 배울수록 인격적으로 성숙해지지 않는 것일까?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는 이론과 실천이 결합된 대화 방식(praxis)의 교육이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했다. 즉, 학생들은 삶의 경험과 동떨어진 이론만 암기하기 때문에, 그들이 배운 지식은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 세상과 삶으로 연결되지 않고 소통되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못하고 도전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지식은 단지 시험 볼 때 필요할 뿐이다. 실제(reality)는 관계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관계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는 상호작용, 또는 관계적 배움을 통해 가장 잘 배울 수 있다. 학생들도 사물에 대해 탐구하고 배울 때, 관계적 방식으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즉, 사물에 질문하고, 서로 다른 생각들을 소통하고 대화할 때, 그 사물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사물에 대한 지식은 학생들의 삶과 관계하면서, 학생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168쪽)

파커 파머는 어려움을 헤쳐 나기기 위해 네 가지 내적 토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올바르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전략, 커뮤니티의 지속적인 지원, 혼자서도 당당하게 길을 갈 수 있는 내면의 힘이 그것이다. (208-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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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챙겨서 금각사를 다시 가보고 싶다.. 사람들이 현실에 동화되지 못할 때는, 특정인이나 사물을 자신과 동일시 하거나 과잉행동 또는 특이행동으로 드러낸다. 그 기저에는 나를 알리고 싶은. 나를 좀 봐 달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결국 타인의 관심으로 살아간다고 볼 수있다. 금각사의 아름다움을 자신으로 여기고 금각사로 자신을 미화하는 주인공의 진짜 마음은 무얼까. 병리적인 아픔으로 나아가는 현상 중에 하나였을까. 어찌됐던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 움직인다고 여겨진다. 얼토당토 않은 몽환으로 이상행동을 하게 되는, 이 또한 관심끌기로는 충분하다. 결국 닿지 못하고, 나의 것이 될 수 없고, 나와 일치되지 않는, 일치 할 수 없는 실체를 불질러 없애버리고, 죽어버리면 해방되는 걸까... 결국 '일을 하나 끝내고 담배를 한모금 피우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생각하듯이, 살아야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272쪽)' 어떻게 사는 게 정답일까는 없는 거 같다. 비참하고 비루하게 살아도 살아 있다는 거, 살고 있다는 거 자체가 가장 큰 의미가 된다. 인식이든. 아름다움이든. 생각이든. 감정이든. 겸손이든. 우아하든. 그건 차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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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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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금각이 나에게 결코 하나의 관념은 아니었다. 산으로 막혀 있다고 해도, 보고 싶으면 직접 가서 볼 수 있는 하나의 물체였다. 미는 그처럼 손으로 만질 수도 있고 눈에도 확실히 비치는 하나의 물체였다. 여러가지로 변모하는 가운데, 불변의 금각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으며 믿고 있었다. (25-26쪽)

눈에 덮인 금각의 아름다움은 비할 바가 없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이 건축은, 눈 속에서, 눈이 날려 들어와도 아랑곳않고, 가느다란 기둥을 즐비하게, 산뜻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째서 눈은 더듬거리지 않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팔손이나무의 잎사귀에 닿거나 하면, 더듬거리듯이 내려와 땅에 떨어지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로막는 것이 없는 하늘에서 유려하게 내려오는 눈을 맞고 있노라면, 내 마음의 굴곡은 잊혀지고, 음악을 듣는 듯이 내 정신은 순순한 율동을 되찾았다. 사실, 입체적인 금각은 눈 덕분에 아주 온순하고 평면적인 금각, 그림 속의 금각이 되어 있었다. 단풍나무가 많은 양쪽 산의 마른 가지에는 눈이 전혀 쌍이지 않았기에, 그 숲은 평소보다도 발가숭이로 보였다. 여기저기 소나무에 쌓인 눈은 장관이었다. (78쪽)

너는 육체의 자각이라면, 일정한 질량을 지닌, 불투명하고 확고한 `물체`에 관한 자각을 상상하겠지. 나는 그렇지 않았어. 내가 일개의 육체, 일개의 욕망으로서 완성된다는 사실, 그것은 내가, 투명한 것, 보이지 않는 것, 즉 바람이 되는 일이었거든......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불구라는 사실은 언제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이야. 그 거울에 종일, 내 전신이 비치고 있지. 망각은 불가능해......불안이 전혀 없고, 발붙일 곳이 전혀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 나의 독창적인 삶이 시작되었지.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이러한 점에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자살하기도 하지.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야. 안짱다리가 내 삶의 조건이고, 이유이며, 목적이자, 이상이고......삶 그 자체이니까.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하니까. 원래 존재의 불안이란, 자신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치스러운 불만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105-106쪽)

나는 서서히 손을 여자의 옷자락에 밀어넣었다. 그때 금각이 나타났다. 위엄으로 가득한, 우울하고 섬세한 건축, 벗겨진 금박을 여기저기에 남긴 호사의 주검과도 같은 건축, 가까운가 싶으면 멀고, 친하면서도 소원하고 불가사의한 거리에, 언제나 선명하게 솟아 있는 그 금각이 나타난 것이다. (132-133쪽)

여자와 나 사이, 인생과 나 사이에 금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 내가 잡으려고 손을 댄 것은 곧바로 잿더미가 되고, 전망은 사막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167쪽)

그렇다. 분명히 우리들의 생존은,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된 시간의 응고물에 둘러싸여 유지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단지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도록 목수가 만든 작은 서랍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시간이 그 물체의 형체를 능가하여, 수십 년 수백 년 후에는, 거꾸로 시간이 응고되어 그 형태를 취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일정하고 조그만 공간이, 처음에는 물체에 의하여 점령당하던 것이, 응결된 시간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205쪽)

미적인 것, 네가 좋아하는 미적인 것, 그건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인식에 위탁된 나머지 부분, 잉여 부분의 환영이야. 네가 말하는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의 환영이야. 원래 그런 건 없다고도 할 수 있지. 할 수 있지만, 그 환영을 강력하게 만들고, 최대한의 현실성을 부여하는 건 역시 인식이야. 인식에 있어서 미는 결코 위안이 아니라구. 여자이고, 아내이기도 하겠지만, 위안은 아니야. 하지만 결코 위안이 아니면서 미적인 것과, 인식과의 결혼에서는 무언가가 생겨나지. 덧없는, 물거품과도 같은,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지만, 무언가가 생겨나지. 세상에서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그거야. (227쪽)

과거는 우리들을 과거 쪽으로만 잡아당기는 것은 아니다. 과거 기억의 여기저기에는, 적은 수이기도 하지만, 강력한 강철로 된 용수철이 있어서, 그것에 현재의 우리들이 손을 대면, 용수철은 곧바로 늘어나 우리들을 미래 쪽으로 퉁겨 버리는 것이다......[임제록] 시중의 유명한 구절이다. 말은 잇달아 거침없이 나왔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서, 비로소 해탈을 얻노라.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투탈자재 해지리라."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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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벌렁 벌렁거리다가, '밤의 대관람차'에서는 가슴이 심하게 애렸다. 감정이입이 되어서다. 

요즘 들어 쓸데없이 공감과 배려와 오지랖까지 생기고 있으니, 늙었다에 핑계를 댄다.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을 한다는 건 모두 거짓말같다. 결국, 자신을 위하여 하는 거다. 웃는 얼굴이 진짜가 아닐 수 있고, 울음 또한 거짓일 수 있고. 갖가지의 가면을 쓰고 사는 거 같다. 나는 아니야라고 포장한 모습이 글을 읽으면서 하나씩 벗겨져 한없이 쪼그라지고 숨을 곳이 없어진 느낌, 부끄러움 조차 느낄 수 없는 상태이기 보다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음같다. 그래도 아닌 척, 꿋꿋하게 살아갈 거다. 얼굴 아래에서는 파르르 떨림도 있을 거지만 그래도 상냥한 미소를 지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뒤늦은 후회와 자책을 하더라도, 마음 속이 다 타들어가도, 다시 정비를 하고 타인과 세상을 향해 웃으면서 나갈 것이다. 알고도 모른 척, 진짜 몰라 속기도 하고 속이기도 하는, 의도한 바는 아니였지만 나의 불편과 안위를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누군가에게, 적어도 한명에게라도 진짜 모습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은 해 둬야겠다. 그때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그래도 나보다는 너네들이 더 무섭고 뻔뻔한 얼굴을 가졌다고. 너희를 대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동안 단단하게 준비했지만 가슴이 많이 벌렁댔다고. 심지어 사랑하는 관계에서까지 위로가 노고와 헛수고가 아닌지, 혹시 혹시하는 의심이 들었다고. 그러다 너의 진짜 모습을 보기 전에 어떤게 진짜 내모습일까, 까지 세월이 흐르다 죽을 거같다.

'하는 수 없었다.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139쪽)'   

시월의 막날, 오는 세월 막지 않고 가는 세월 잡지 않고 싶다고, 태연하고 싶은데 마음은 여전히 뒷걸음 가다가 먼저가 있기도 하다. 지금 여기에 내가 있는데... 친구가 지은, 늦가을을 몇 번 읽었다. 또 다른 친구에게는 상학이 시집 두권을 부쳤다.

 

늦가을 / 안상학

 

그만하고 가자고

그만 가자고

내 마음 달래고 이끌며

여기까지 왔나 했는데

 

문득

그 꽃을 생각하니

아직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은 

내가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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