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다고 해서 금각이 나에게 결코 하나의 관념은 아니었다. 산으로 막혀 있다고 해도, 보고 싶으면 직접 가서 볼 수 있는 하나의 물체였다. 미는 그처럼 손으로 만질 수도 있고 눈에도 확실히 비치는 하나의 물체였다. 여러가지로 변모하는 가운데, 불변의 금각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으며 믿고 있었다. (25-26쪽)

눈에 덮인 금각의 아름다움은 비할 바가 없었다. 바람이 잘 통하는 이 건축은, 눈 속에서, 눈이 날려 들어와도 아랑곳않고, 가느다란 기둥을 즐비하게, 산뜻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째서 눈은 더듬거리지 않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팔손이나무의 잎사귀에 닿거나 하면, 더듬거리듯이 내려와 땅에 떨어지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가로막는 것이 없는 하늘에서 유려하게 내려오는 눈을 맞고 있노라면, 내 마음의 굴곡은 잊혀지고, 음악을 듣는 듯이 내 정신은 순순한 율동을 되찾았다. 사실, 입체적인 금각은 눈 덕분에 아주 온순하고 평면적인 금각, 그림 속의 금각이 되어 있었다. 단풍나무가 많은 양쪽 산의 마른 가지에는 눈이 전혀 쌍이지 않았기에, 그 숲은 평소보다도 발가숭이로 보였다. 여기저기 소나무에 쌓인 눈은 장관이었다. (78쪽)

너는 육체의 자각이라면, 일정한 질량을 지닌, 불투명하고 확고한 `물체`에 관한 자각을 상상하겠지. 나는 그렇지 않았어. 내가 일개의 육체, 일개의 욕망으로서 완성된다는 사실, 그것은 내가, 투명한 것, 보이지 않는 것, 즉 바람이 되는 일이었거든......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불구라는 사실은 언제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이야. 그 거울에 종일, 내 전신이 비치고 있지. 망각은 불가능해......불안이 전혀 없고, 발붙일 곳이 전혀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 나의 독창적인 삶이 시작되었지.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이러한 점에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자살하기도 하지.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야. 안짱다리가 내 삶의 조건이고, 이유이며, 목적이자, 이상이고......삶 그 자체이니까.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하니까. 원래 존재의 불안이란, 자신이 충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치스러운 불만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105-106쪽)

나는 서서히 손을 여자의 옷자락에 밀어넣었다. 그때 금각이 나타났다. 위엄으로 가득한, 우울하고 섬세한 건축, 벗겨진 금박을 여기저기에 남긴 호사의 주검과도 같은 건축, 가까운가 싶으면 멀고, 친하면서도 소원하고 불가사의한 거리에, 언제나 선명하게 솟아 있는 그 금각이 나타난 것이다. (132-133쪽)

여자와 나 사이, 인생과 나 사이에 금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 내가 잡으려고 손을 댄 것은 곧바로 잿더미가 되고, 전망은 사막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167쪽)

그렇다. 분명히 우리들의 생존은,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된 시간의 응고물에 둘러싸여 유지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단지 살림살이에 도움이 되도록 목수가 만든 작은 서랍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시간이 그 물체의 형체를 능가하여, 수십 년 수백 년 후에는, 거꾸로 시간이 응고되어 그 형태를 취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일정하고 조그만 공간이, 처음에는 물체에 의하여 점령당하던 것이, 응결된 시간에게 점령당하게 된다. (205쪽)

미적인 것, 네가 좋아하는 미적인 것, 그건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인식에 위탁된 나머지 부분, 잉여 부분의 환영이야. 네가 말하는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의 환영이야. 원래 그런 건 없다고도 할 수 있지. 할 수 있지만, 그 환영을 강력하게 만들고, 최대한의 현실성을 부여하는 건 역시 인식이야. 인식에 있어서 미는 결코 위안이 아니라구. 여자이고, 아내이기도 하겠지만, 위안은 아니야. 하지만 결코 위안이 아니면서 미적인 것과, 인식과의 결혼에서는 무언가가 생겨나지. 덧없는, 물거품과도 같은,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지만, 무언가가 생겨나지. 세상에서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그거야. (227쪽)

과거는 우리들을 과거 쪽으로만 잡아당기는 것은 아니다. 과거 기억의 여기저기에는, 적은 수이기도 하지만, 강력한 강철로 된 용수철이 있어서, 그것에 현재의 우리들이 손을 대면, 용수철은 곧바로 늘어나 우리들을 미래 쪽으로 퉁겨 버리는 것이다......[임제록] 시중의 유명한 구절이다. 말은 잇달아 거침없이 나왔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서, 비로소 해탈을 얻노라. 아무것에도 구애 받지 않고 투탈자재 해지리라."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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