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답게 믿음에 대해 묻고 또 물어가며 답한 글이다. 신학자가 쓴 글과 다른 각도라 일반인이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거 같다. 믿음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예수를 알게 되고, 응답하는 과정에서 감사와 찬양하는 존재로의 변화를 맛보고,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더 잘 믿기 위해서는 더 잘 알아야 하고, 신앙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즉,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가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지금 나의 심장은 어디로 향하는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나자신을 점검하는 시간들로 보내고 있다. 단 한 번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그 고백이 삶이 끝날 때까지 실천으로 유지되고 지탱되는 믿음이기를 소망한다. 

짚신장수와 우산장수를 둔 엄마의 마음같다. 누군가의 웃음이 누군가의 한숨이기도 한 나날이다. 죽으면 그만인데, 뭘 그리. 아니,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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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다는 것 - 묻고 응답하고 실천하는 믿음
강영안 지음 / 복있는사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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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믿음이 과거에 중심을 두고 있고 소망이 미래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사랑은 현재에 중심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과거에만 머물고 소망이 미래에만 머물며 사랑이 현재에만 머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것인데"라고 말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현재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앞서고 무엇이 바탕이 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믿음의 결과가 사랑이고 사랑의 결과가 소망이라고 말하겠습니다. (17쪽)

순서로 보자면, 우리 속에 먼저 믿음이 심겨지고, 이로부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나오고, 이를 통해서 소망이 가능합니다. (20쪽)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은 단순한 믿음의 내용을 수용하거나 인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의 방식‘a way of life의 변화로 드러납니다. (34쪽)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앞에서 잠시 언급하나 대로 삭개오는 자기 집에 머물러 온 예수께 자신이 가진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혹시 부당하게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행동입니다. (60쪽)

그러므로 사실은 예수께서 먼저 찾아 나섰고, 삭개오에게도 찾아 나서도록 열망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이 열망이 곧 믿음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예수를 만나 그분을 알고자 찾아 나서는 열망의 결과입니다. (중략) 오늘 우리에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요? 예수를 우리 삶의 처소에,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실까요? 그리하여 그분이 걸어가는 삶의 길을 따라 걸어가게 될까요? 아니면 우리 삶에 오시되,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원하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 두기만을 원하게 될까요? (66-67쪽)

‘내 안에 삭개오가 했던 것처럼 그분을 찾고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예수를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알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에 관한 정보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69쪽)

생각하는 단계를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 만일 내가 나에게 전해진 메시지를 수용하면 그것이 나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하는 단계에 들어섭니다. 나의 희망과 두려움이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으로 알고 동의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도 내가 절실하게 원하고, 내 자신을 맡기고 의탁하며 신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83쪽)

내가 타자에게 열릴 때, 타자가 나를 찾아와 줄 때, 타자에게 귀 기울이고 타자의 말을 들을 때,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결단함으로 나는 믿음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91쪽)

하나님께서는 삶의 모든 부분에서, 다시 말해 도덕적이고 법적이며 사회적인 정의와 공의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천하시기를 원했습니다. (128쪽)

사람이 의롭게 됨 곧 의인이 되고 그리하여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유대인처럼 율법을 따름으로나 이방인처럼 양심을 따름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앞서고, 그로 인해 ‘의롭다 하심‘이 있고, 그 뒤에에 비로소 의로운 사람 곧 의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정의롭고 공평한 행위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독특성입니다. (136-137쪽)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제는 내 뜻대로 살지 않고,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진리로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있습니다. 이 윤리는 자연적 본성에 따라 나 중심으로 살아가던 삶에서 하나님 중심과 이웃 중심으로 삶의 축이 바뀐 윤리입니다. (151쪽)

이 믿음은, 단 한 번의, 한 순간의 믿음일 뿐만 아니라 처음 믿을 때 생긴 믿음이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삶의 실천을 통해 지탱되고 유지되는 믿음입니다. 이때 실천은 믿음에 근거를 둔 실천이고 믿음은 실천으로 열매 맺는 믿음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이 땅에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고백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53쪽)

믿음은 한번 믿고 ‘아멘‘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었으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믿는지, 왜 믿는지, 어떻게 믿어야 할지, 끊임없이 묻고 따지고 알기를 계속 추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지성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잘 믿기 위해서 더욱더 지성을 요구합니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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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니 엄청 시원하다. 무더위가 싹 사라졌다. 

역사학자인 저자가 구약성서를 공부하는 법을 읽었다. 성서 속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오늘날 적용해 본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사는 모습은 나쁜 쪽으로는 한결 같다. 예언자들이 말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지금 여기에 그대로 울려 퍼지게 되고 적용해도 된다. 현재의 도덕적 행위,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 사람 사이의 도리에서 선함과 선인이 승리한다는 원리는 절대자의 살아계심을 전제하여야 가능하다. 그래야 악한 이들이 잘 살고 있는 현재의 보루가 된다. 성서 속 예언자들의 외침이 곳곳으로 퍼져 조금 나아지는 우리나라가 되는 데 도움되길 바란다는 저자의 목소리다.

사회정의 문제를 외쳤던 아모스는 기업형 목회자들에게 가장 불편한 존재가 되겠고, 농민을 학대한 지주들의 탐욕과 불의를 꾸짖으며 상인들의 가짜 되와 거짓 저울 추를 비판한 미가와 유복한 계층의 안일과 나태, 종교적 무관심을 꾸짖고 공동체보다 사적인 이익 추구에 골몰하는 소시민적 태도를 비판한 스바냐, 레바논 숲을 벌목하고 동물을 살육한 바빌로니아인을 비판하면서 자연보호 사상을 설파한 하박국, 도시와 궁정의 타락과 음모를 풍자와 비판한 이사야 등이 있다.(39쪽) 

유명한 인사가 죽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방송매체에서는 왁자지껄, 의견이 분분하다. 남은 자의 몫으로 정확한 자, 정직한 되와 저울 추가 필요하다. 이전의 잣대와 개인의 주관적인 저울 추가 아닌, 공정하고 함의된 되가 필요하다. 이때 예언자들은 뭐라고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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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읽다 - 역사학자가 구약성서를 공부하는 법 유유 서양고전강의 4
박상익 지음 / 유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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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은 현재의 도덕적 행위와 미래의 운명이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세계 속에 도덕적 질서가 있고, 인간의 현재와 미래 사이에 도덕적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17쪽)

헤브라이즘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세계로 웅비하기 위한 전제 조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41쪽)

히브리 성서 기자들은 지나온 역사 속에서 신의 손길을 느끼고 섭리를 깯라앗다는 점에서 칼라일이 말한 ‘위인‘의 범주에 드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히브리인의 종교적 천재성이 돋보이는 것이며, 그들의 선민된 자격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략)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로 일컬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 종교에서 영원과 시간은 막혀 있지 않습니다. 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역사 속으로, 시간 속으로 뛰어듭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의 세계는 영원과 단절된 차원의 세계가 아닙니다. 성서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순간은 영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66-67쪽)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존재는 한 가지 공동 체험의 기억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 공동 체험의 기억은 거기에 참여했고 또 이스라엘의 핵심이었던 사람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것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히브리 노예들은 모세의 영도하에 놀라운 방법으로 이집트를 탈출했고, 그들은 이 출애굽 사건을 야훼의 자비로운 간섭에 의한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훼는 새로운 신이었으며, 모세는 그 신의 이름으로 백성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후 시내로 옮겨 가 그곳에서 야훼와 계약을 맺고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94쪽)

인간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계약을 토대로 이루어진 결속과 유대는 광야에서 일어난 인간적인 분열의 원심력으로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 속에 등장했다가 이름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다른 민족과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계약 신앙을 바탕으로 사막 생활을 하던 중 중대한 사실을 깨우칩니다. 즉 야훼는 이러한 시련을 통해 백성을 훈련시켜 역사적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갖추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115쪽)

아모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신은 우리에게 희생 제물이나 곡식 제물, 십일조 따위가 아니라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정의를 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158쪽)

호세아는 ‘야훼를 아는 것‘을 말할 때 머리로 하는 단순한 지적 인식을 훨씬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전 존재가 던져지는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야훼를 아는 것‘은 신을 한낱 관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의 야훼에게 충실한 사랑과 헌신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이 관계를 통해 비로소 터득할 수 있는 자신과 이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친절과 성실로써 도덕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172쪽)

미가는 세상에서 헤세드(‘사람과 사람 사이‘, ‘신과 사람 사이‘의 충성, 성실, 우애, 친절 등을 의미)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모두 피를 흘리려고 숨어서 남을 노리고, 저마다 형제를 잡으려고 그물을 치게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중략) 헌신적으로 의무를 이해하고, 타인을 선의와 성실로 대할 때 비로소 그 사회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 이전에 ‘신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 종교의 핵심입니다. (215-216쪽)

소시민적 기질을 가진 많은 사람은 공적 영역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회피합니다. 이 무관심한 대중은 그저 자기 자신과 가정 그리고 자신의 직업에 안주한 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그러한 생활 태도의 이면에는 겸손함보다는 나태와 비겁함이 가로놓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광정을 떠나 밀실에, 국가를 떠나 사적 영역에 안주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종교의 신은 밀실에 숨어 있는 소시민적 부류들을 등불로 찾아내어 그들을 기어이 광장으로 끌어내고자 합니다. 에언자 스바냐는 모든 사람에게 공적인 영역, 즉 광장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232-233쪽)

이렇듯 [나훔]에 줄곧 등장하는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요? (중략) 앗시리아는 이 좁은 세계 바깥에서 가공할 무력을 지닌 채 물밀 듯이 쳐들어와 선민 이스라엘을 주변의 다른 민족과 똑같이 무자비하게 취급했습니다. (중략) 이스라엘도 앗시리아가 침입해 오기 이전까지 자기 민족만이 창조주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백성이며, 전 인류의 모범이자 으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앗시리아의 무력에 의해 다른 이방 민족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지위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민족의 섭리적 역사와 야훼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40-241쪽)

하박국은 야훼에게 불평, 불만이 뒤섞인 질문을 퍼부으며, 부당해 보이는 야훼의 처사에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야훼에게 의문을 제기하긴 했으되, 야훼를 거역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박국은 다만 현실 생활에서 솟구치는 의문, 즉 야훼는 정의로운데 어째서 세상의 불의를 방관만 하는지에 관해 솔직히 궁금증을 피력할 따름이었습니다. (249쪽)

유대인은 성전이 지어지고 있음에도 재난이 그치지 않고 흉년이 계속되자 크게 상심하고 용기를 잃었습니다. 학개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거룩한 것과 접촉하는 일은 작은 결과를 초래하지만, 부정한 것과 접촉하는 일은 훨씬 더 큰 능력을 발휘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중략) 백성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그것은 그들의 나쁜 행실이 초래한 것만큼 큰 효력을 낼 수 없었습니다. (292-293쪽)

종교학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루터에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어떻게 구분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필경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구분할 수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일지라도 그리스고의 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성경을 읽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327-328쪽)

요엘의 신앙은 야훼에 대한 신앙이 외적.물질적 축복과는 무관하다고 한 욥의 신앙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외적 축복과 내적 축복이 모두 필요하다고 인정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331쪽)

요나가 화를 낸 이유는 예언이 성취되지 않아 예언자로서의 위신이 손상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니느웨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는 니느웨가 구원받는 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더 크게 분노했을 겁니다. (360쪽)

절대자인 신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삶이며, 인생은 그 하나하나가 소우주인 것입니다. 그리고 휘트먼이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에서 노래한 것처럼 "내게 속하는 모든 원자는 마찬가지로 네게도 속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지역 문제, 계층 문제, 통일 문제 그리고 전 세계적인 골칫거리가 된 인종 문제 등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인간 개개인을 하나의 고귀한 삶으로, 하나의 소우주로 바라보는 태도, 내게 속한 원자가 모든 인간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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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밤이다. 꼭 집어 뭐라 정의 내릴 수도, 규정하지 못하는, 애매모호하다. 뭔가를 할 때 나만의 선택지가 사라지고, 이거도 좋고 저거도 괜찮다는 무한의 상태랄까. 그러면서 나의 고유한 색이, 그 간의 까칠했던 신경쓰임이 무색해지는... 짙은 다름이 멋짐같은 말로 오용되어 언제나 색깔 다름을 은연 중에 선택해 온 것 같다.... 뭔가의 반대라는 말이 죽음과 삶처럼 정말로 반대도 있지만, 개념이 모호한, 덥다와 춥다같이 가운데가 얼마큼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도, 또한 네가 있는 곳에서의 거기가 내가 있는 곳에서의 여기가 되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반대도 있다. 그런데 그 반대라는 부분에 많이, 아니 다름에 많이 치중해 온 거 같다... 인생은 이 가운데를 통과하는 거 같다. 한발한발이 정확한 지점을 딛기도 하지만 늦거나, 앞서거나 옆길로, 한참이나 에둘러 지나가는 거 같다. 그래서 누군가를 보면 맞는? 잘 살아보이기도 하지만, 나의 발은 도무지 웬만해선 지금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보여지는 모습에 충실하고, 보이는 부분에 애쓰고 있는 거 같다. 난 분명 반대 지점에 있는 것 같고 잘못된 길로 들어섰는데, 나를 본 이들은 괜찮다고 잘 하고 있다고 들려주는 말에서 위로도 받고 위안도 하고 있으니... 그러고보면 삶이라는 건 종합문같다. 언제나 참인 문장이 있지만 누가봐도 거짓인 문장도 있다. 그리고 참인지 거짓인지는 눈으로 확인하거나 그런 일을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 개인이 현실에서 부딪혀 만들어가는 문장도 있다. 그러한 문장을 누가 틀리고, 맞다로 규정하고, 옳다와 그르다로 말할 수 있을까마는,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저자의 인생은 종합문이었다. 한 꼭지씩 읽을 때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마주쳐온 그러한 일들이 들어 있다. 눈을 돌리면 이웃이 있고, 그들의 소리가 들리고, 아이들과 부대끼고, 내밀한 부부의 일, 친구들 등, 모든 모습들이 들어있다. 각 장면에서의 기쁨뿐 아니라 난감함과 아쉬움도, 누군가가 미리 말해주었더라면, 아니 그런 상황을 누군가에게 말할수 있었더라면 하는, 그녀의 마음이 녹아 있다. 특히, 가족간의 불통, 엄마와의 단절, 닿고 싶은 엄마의 맘은 언제나 다른 곳에 가 있다.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가족에게서는 그 어떤 삶의 내용도 듣지 못했던, 그녀가 자신의 인생을 풀어서 쓴 글이다. 그때 그것을 알았더라면 달라졌을까.. 아주 작은 일도 지금에서야 알게 되는데, 그래도 조금은 달라졌을거야... 그래서 그녀의 글을 읽는데 아깝고, 안타까운 마음에다 후회도 조금 가미된 감정들이 같이 왔다. 언제나 선택에서 머뭇대다가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고르고, 그러다 결국 얼추 맞는 것을 다시 고르는, 오늘도 그러고 있다. 마음에 드는 것 앞에서 선뜻 고르지 못하고 자꾸만 돌아서 가려는 마음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래도 그까이껏, 심각한 피해를 주거나 어려움이 없었잖아. 괜찮아 하지만, 가랑비도 옷을 적신다는.... 이게 지금의 나의 삶이고 모습이네.  (~하는 것 같다.. 이런 말을 많이 쓰고 있다니. 에구구.)(번역을 참 고급지게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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