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를 읽다 - 역사학자가 구약성서를 공부하는 법 유유 서양고전강의 4
박상익 지음 / 유유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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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은 현재의 도덕적 행위와 미래의 운명이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세계 속에 도덕적 질서가 있고, 인간의 현재와 미래 사이에 도덕적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17쪽)

헤브라이즘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세계로 웅비하기 위한 전제 조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41쪽)

히브리 성서 기자들은 지나온 역사 속에서 신의 손길을 느끼고 섭리를 깯라앗다는 점에서 칼라일이 말한 ‘위인‘의 범주에 드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히브리인의 종교적 천재성이 돋보이는 것이며, 그들의 선민된 자격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중략) 기독교가 ‘역사적 종교‘로 일컬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히브리 종교에서 영원과 시간은 막혀 있지 않습니다. 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우리의 역사 속으로, 시간 속으로 뛰어듭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의 세계는 영원과 단절된 차원의 세계가 아닙니다. 성서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순간은 영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66-67쪽)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존재는 한 가지 공동 체험의 기억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 공동 체험의 기억은 거기에 참여했고 또 이스라엘의 핵심이었던 사람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것은 역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히브리 노예들은 모세의 영도하에 놀라운 방법으로 이집트를 탈출했고, 그들은 이 출애굽 사건을 야훼의 자비로운 간섭에 의한 구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훼는 새로운 신이었으며, 모세는 그 신의 이름으로 백성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 후 시내로 옮겨 가 그곳에서 야훼와 계약을 맺고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94쪽)

인간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계약을 토대로 이루어진 결속과 유대는 광야에서 일어난 인간적인 분열의 원심력으로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역사 속에 등장했다가 이름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다른 민족과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계약 신앙을 바탕으로 사막 생활을 하던 중 중대한 사실을 깨우칩니다. 즉 야훼는 이러한 시련을 통해 백성을 훈련시켜 역사적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갖추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115쪽)

아모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신은 우리에게 희생 제물이나 곡식 제물, 십일조 따위가 아니라 매일매일 생활 속에서 정의를 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었습니다. (158쪽)

호세아는 ‘야훼를 아는 것‘을 말할 때 머리로 하는 단순한 지적 인식을 훨씬 뛰어넘는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식 주체인 인간의 전 존재가 던져지는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만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야훼를 아는 것‘은 신을 한낱 관념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의 야훼에게 충실한 사랑과 헌신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이 관계를 통해 비로소 터득할 수 있는 자신과 이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친절과 성실로써 도덕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172쪽)

미가는 세상에서 헤세드(‘사람과 사람 사이‘, ‘신과 사람 사이‘의 충성, 성실, 우애, 친절 등을 의미)가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모두 피를 흘리려고 숨어서 남을 노리고, 저마다 형제를 잡으려고 그물을 치게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중략) 헌신적으로 의무를 이해하고, 타인을 선의와 성실로 대할 때 비로소 그 사회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 이전에 ‘신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 종교의 핵심입니다. (215-216쪽)

소시민적 기질을 가진 많은 사람은 공적 영역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도덕적 책임을 회피합니다. 이 무관심한 대중은 그저 자기 자신과 가정 그리고 자신의 직업에 안주한 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그러한 생활 태도의 이면에는 겸손함보다는 나태와 비겁함이 가로놓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광정을 떠나 밀실에, 국가를 떠나 사적 영역에 안주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종교의 신은 밀실에 숨어 있는 소시민적 부류들을 등불로 찾아내어 그들을 기어이 광장으로 끌어내고자 합니다. 에언자 스바냐는 모든 사람에게 공적인 영역, 즉 광장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232-233쪽)

이렇듯 [나훔]에 줄곧 등장하는 앗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요? (중략) 앗시리아는 이 좁은 세계 바깥에서 가공할 무력을 지닌 채 물밀 듯이 쳐들어와 선민 이스라엘을 주변의 다른 민족과 똑같이 무자비하게 취급했습니다. (중략) 이스라엘도 앗시리아가 침입해 오기 이전까지 자기 민족만이 창조주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백성이며, 전 인류의 모범이자 으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앗시리아의 무력에 의해 다른 이방 민족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지위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민족의 섭리적 역사와 야훼의 권능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40-241쪽)

하박국은 야훼에게 불평, 불만이 뒤섞인 질문을 퍼부으며, 부당해 보이는 야훼의 처사에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야훼에게 의문을 제기하긴 했으되, 야훼를 거역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박국은 다만 현실 생활에서 솟구치는 의문, 즉 야훼는 정의로운데 어째서 세상의 불의를 방관만 하는지에 관해 솔직히 궁금증을 피력할 따름이었습니다. (249쪽)

유대인은 성전이 지어지고 있음에도 재난이 그치지 않고 흉년이 계속되자 크게 상심하고 용기를 잃었습니다. 학개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거룩한 것과 접촉하는 일은 작은 결과를 초래하지만, 부정한 것과 접촉하는 일은 훨씬 더 큰 능력을 발휘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중략) 백성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에도 그것은 그들의 나쁜 행실이 초래한 것만큼 큰 효력을 낼 수 없었습니다. (292-293쪽)

종교학자 마르틴 루터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루터에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을 어떻게 구분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필경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구분할 수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일지라도 그리스고의 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성경을 읽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327-328쪽)

요엘의 신앙은 야훼에 대한 신앙이 외적.물질적 축복과는 무관하다고 한 욥의 신앙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외적 축복과 내적 축복이 모두 필요하다고 인정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331쪽)

요나가 화를 낸 이유는 예언이 성취되지 않아 예언자로서의 위신이 손상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니느웨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는 니느웨가 구원받는 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더 크게 분노했을 겁니다. (360쪽)

절대자인 신 앞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개인의 삶이며, 인생은 그 하나하나가 소우주인 것입니다. 그리고 휘트먼이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에서 노래한 것처럼 "내게 속하는 모든 원자는 마찬가지로 네게도 속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지역 문제, 계층 문제, 통일 문제 그리고 전 세계적인 골칫거리가 된 인종 문제 등을 해결하는 궁극적인 방법은 인간 개개인을 하나의 고귀한 삶으로, 하나의 소우주로 바라보는 태도, 내게 속한 원자가 모든 인간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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