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달인, 호모 로퀜스 - 언어가 춤을 춘다 세상을 다 말하라!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3
윤세진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구판절판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며, 정보를 전달하는 객관적인 체계다." 이게 언어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믿음이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그토록 빈번하게 말로 인한 오해가 생기고, 말로 사람을 찌르거나 죽이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는 일이 생기는 이유는 뭘까? 이건, 언어가 그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힘이야말로 실은 언어에 본질적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힘이야말로 실은 언어에 본질적인 것이 아닐까? 객관적이고 추상적 언어가 아니라, 바다의 물고기처럼 펄펄 살아 숨쉬는 언어, 우리의 사고와 행위에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언어, 미세한 파동을 가지고 다양한 의미의 결들을 생산하는 언어. 언어의 공간은 끊임없이 유동하면서 크고 적은 파도를 일으키는 바다와 같다. -19쪽

언어는 단순히 사고의 표현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행위다. 따라서 다른 언어를 갖는다는 건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산다는 걸 의미한다. 언어는 무게도 부피도 없는 추상적 기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물질적으로 작용하는 '힘'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언어는 차갑고 어떤 언어는 뜨거우며, 어떤 언어는 사람을 죽이고 어떤 언어는 사람을 살린다. 또 어떤 언어는 억압을 무기가 되는 반면, 어떤 언어는 억압을 깨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여러분의 언어는 어떤 힘으로 작동하고 있는가?-95쪽

책을 여행하는 즐거움이란 바로 거기서 오는 즐거움이 아닐까?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꿈이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그의 아픔과 기쁨을 만나면서 나의 아픔을 잊기도하고, 나의 기쁨을 확인하기도 하는 것, 내가 알지 못하는 우주를 여행하고, 내가 도달하지 못한 미래를 꿈꾸면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것. 여행 중에 만난 낯선 사람과의 대화에서 문득 아련한 깨달음 하나를 얻어내듯, 책으로의 여행 중에 이루어진 어떤 것-사람일 수도, 동물일 수도, 혹은 바람이나 비 같은 것일 수도 있는-과의 만남을 통해 다른 차원으로의 열림을 경험하는 것. 책은 우주를 품고 있다. 돈도, 시간도, 장비도 필요 없는 우주여행. 책은 그걸 가능케 해준다. -180쪽

책은 물론이고 우리가 어떤 그림이나 영화를 보면서 지루함과 부담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텍스트를 읽는 우리 자신의 역할을 단순한 '기호 해독자'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그건 결국 텍스트를 가지고 놀 수 없다는 것. 즐길 수 없다는 것.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어가는 텍스트를 살리는 기적은, 그것과 접속하는 독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202쪽

독서는 자유다. 그것은 맞아들이고, 승낙하고, 나와 다른 것을 긍정하는 자유다. 니체는 "하나의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은 낙타가 사자로 변신해야 한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책을 읽으면서 '동일한 나'를 고집하고 거기에 집착하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기꺼이 그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가, 나는 무거운 짐을 견디는 낙타가 아닌 포효하는 사자로 다시 태어나며, 텍스트는 새로운 공간으로 재창조된다. -231-232쪽

그러므로 읽어야 하는 책과 읽어선 안 되는 책이 아니라, 익숙함으로 유혹하는 책과 새로운 사유를 자극하는 책, 순종하는 책과 위험한 책, 딱 한 번 작동하고 전사하는 책과 끊임없이 작동하는 책, 우리로부터 '할 수 있는 힘'을 뺏으면서 한자리에 머무르도록 하는 책과 우리의 에너지를 배가시키면서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책이 있을 뿐이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앞에서 말한 미식가의 태도로 혹은 미식가 친구와 함께 책의 세계를 탐사하라. 괴물이 될 준비를 하고, 질문을 하나씩 들고서, 그러다보면 어떤 책이 여러분을 기쁨으로 채우는지. 어떤 책이 더 많이 작동하고 더 많은 접속을 가능케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터득할 날이 있으리라. 좋은 책을 고르는 데 있어 좋은 친구와 스승으로부터 열심히 배우고 게걸스럽게 읽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241쪽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른 존재와의 '공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구성해간다. 어떤 존재의 능력이란 힘이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더 많은 것들과 공명할 수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여러분의 공명 능력은 얼마나 되는지? 혹, 자기 자신하고밖에 공명하지 못하는 '자발적 왕따'라면, 어서어서 마음의 빗장을 풀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리듬을 타시길.-264쪽

하나의 현실. 하나의 진실이란 없다. 표현된 다양한 현실이 있을 뿐이다. 즉,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저 거기에 놓여 있을 뿐이고 '그것을 누가. 어디서. 어떤 눈으로 포착하는가'가 문제다. 현실은 그렇게 '포착된' 어떤 것인지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존재하면서 누군가가 참모습을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구운몽]에서 성진의 꿈. 즉 '양소유'로서의 삶이 현실일 수도 있고, 우리가 경험하는 가상현실이 '가상'이 아닌 진짜 현실일 수도 있다. -304-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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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지 않는 이가 누가 있으랴, 피곤을 털어 버리려 자전거 타러 갔다가 무릎을 깼고, 목이 부었고, 두통과 발열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계속 혼만 내려하고 트집만 잡으려 하는 상사(上司)를 비롯한 주변 남자들로 짜증 연발이었다... 그 와중에 '최종병기 활'에선 싱싱한 만주어가 빛났고, '3명의 얼간이들'에서는 '걱정을 미리하는 우리 마음을 속일 필요가 있다...All is well..All is well..All is well..' 주문이 귀에 남는다... 문명의 요람인 서아시아를 글로써 가본다. 유목민인 그들의 생활을 좌우하는 종교가 곧 그네들의 삶의 방식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가장 비극적인 그곳이다... 어디에서건 누구와 같이 하든 행복하게 일하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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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땅으로 가다
권삼윤 지음 / 북폴리오 / 2004년 5월
절판


삶의 방식은 대개 풍토의 차이에 기인한다. 풍토의 차이는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에서부터 건축 방식과 도시 구조, 노동의 방식, 이동의 선호 여부, 나아가서는 신의 존재와 그 양태, 우주의 탄생, 사후 세계의 존재, 시간의 흐름 등을 인식하는 방식에까지 극단적인 차이를 보여 준다. 이에 따라 내가 생각해낸 것이 '농경과 유목'이란 이분법이다.
농경이란 주로 재배식물을 기르면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가꾸고 그 성과물을 취하되, 그것이 끝난 다음에는 자연에 되돌려주는, 그래서 순환과 지속을 중시하는 삶의 방식이다. 농업과 정착을 바탕으로 한 농경적 삶은 범신론과 우주론적 세계관을 키워냈으며 말보다는 행동을, 외향화보다는 내면화를 지향했다. 수신과 자율이 자연스례 중요한 덕목이 됐다. -7쪽

반면, 유목은 메마른 땅에 살기 때문에 농사는 지을 수 없고 무리 지어 사는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게 고작이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전부 조달할 수 없다. 부족한 것들은 대체로 원거리 사람들과의 교환 거래나 약탈을 통해 획득한다. 가축 사육과 상업 그리고 기동성으로 상징되는 유목적 삶은 땅보다는 하늘에 의지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 탓에 유일신 신앙과 창조론적 세계관, 그리고 인간 중심주의를 잉태했으며 행동보다는 말, 내면화보다는 외향화를 중시했다. 그들은 이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으며, 그 같은 이익 지향성은 공격성과 결합하여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지금의 '세계화 시대'까지 도래케 했다.
성서는 히브리인들의 작품이다. 성서의 키워드(중심어)가 떠남 또는 '이동(migration)'인 것은 그들이 유목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동 목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으로 묘사돼 있다. 유목민일지라도 땅은 필요한 것이다. 그들이 두 다리를 펴고 쉴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의 땅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구현되는 그런 공간적 의미에서의 땅도 필요해서이다.-8쪽

사랑은 선언이란 과정을 통해 '창조'되듯이 하나님의 우주 만물 창조도 그와 같았다. 성서는 우주 만물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제 나름의 용도와 기능이 정해져 있다. 하나님의 쓰임에 쓰일 도구로서, 거기에는 우연(chance)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84쪽

성서가 뱀과 출산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면 농경문화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뱀과 여성성을 받들게 된다면 자신들의 생존 근거나 정체성을 흔드는 일이 되므로 유목민인 유대인들이 그걸 우상 숭배라며 금기시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100쪽

음양은 순환구조를 갖는다. 음과 양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음은 양이 되기도 하고 양 또한 음이 되기도 하는 상보적(相補的)인 관계, 순환과 조화의 관계에 있다. 음은 결코 격퇴해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음양은 빛과 어둠과는 달리 가치 술어가 아니라 가치중립적 술어인 것이다. 빛과 어둠의 대결! 이는 사막 문화권이 갖는 정신 구조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풍토에 있는데, 순환구조가 가동되지 않는 데다 무엇보다도 그곳에 쏟아지는 빛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134-135쪽

출애굽기의 히브리어 원 명칭은 '웨일레 셰모트(Weeleh Shemoth)'로 그 뜻은 '이름은 이러하니'이다. 이름은 유대인들에겐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궁극적인 그 무엇이다. 인간의 인식은 비교 또는 대비를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즉 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를 나와 다른 '남'과 비교해야 한다. 그때 얻어지는 것이 정체성, 흔히 말하는 아이덴티티(identity)이다. 정체성이란 생명을 뜻한다. 유대인에게 이름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164쪽

여호와는 영어식 표현이고 히브리어로는 야훼라 표기된다. 야훼란 '나'라는 뜻이다. 처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일러준 "나는 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전에는 "Yahweh asher yihweh"로 기록되어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I am who I am."이고 우리 개역 성경은 "스스로 있는 자"라 번역했다. -198쪽

성전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또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그 곳에서 기도하는 인간의 심령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지붕도 없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통곡의 벽 광장은 기도의 공간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할 것이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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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밤새워 읽었던 책들이 가물되며 그때의 느낌을 또 한번 맛보았다. 마음 속에 즐겁고 아련한 뭔가가 가득차 오른다. 줄그어 가며 읽었던 글귀도 눈에 띄었다. 삼중당 문고도 생각났다. 사람마다 고전의 의미가 다르겠지만 시간이 된다면 다시 한번 손에 잡고 싶은 책들이 '고전탐닉'에 56권이나 들어 있다... 때아닌 무더위가 조금 가라 앉을 때 한권씩 읽어보면 좋으리라. 구월이다...책과 함께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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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탐닉 - 삶의 질문에 답하는 동서양 명저 56 고전 탐닉 1
허연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6월
구판절판


샤르트르 실존주의의 근간은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에서 시작된다. 존재existence는 규정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본질은 규정된 이후다.-63쪽

한 사람을 만들려면 아홉 달이 필요하지만 죽이는 데는 단 하루로 족해. 우리는 그걸 뼈저리게 깨달은 셈이지. 그러나 메이,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는 아홉 달이 아니라 6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해. 그런데 그 인간이 다 만들어졌을 때, 이미 유년기도 청년기도 다 지난 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죽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거란다.-72-73쪽

인간은 하루 중 3분의 1은 일하고, 3분의 1은 잠자고, 3분의 1은 여가로 보낸다. 일하는 3분의 1을 파헤친 사람이 마르크스라면, 여가를 정리한 사람은 피에르 부르디외이고, 나머지 3분의 1을 분석한 사람은 프로이트다. 프로이드의 도전은 위대했다.-115쪽

모든 사람들은 전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도 유린될 수 없는, 정의에 입각한 불가침성을 갖는다. 다수가 누릴 보다 큰 이익을 위해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도 좋다는 정의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173쪽

사실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문화와 경험, 환경 등에 따라 기준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을 획일화하는 순간 그건 폭력일 뿐이다. -181쪽

[미디어의 이해]라는 책을 이해하기 위해 먼전 만나야 하는 문장이 있다.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는 인간을 만든다"라는 구절이다. 매클루언은 인간이 주도한 미디어의 발달은 곧 인간의 감각기능을 확장한다고 주장했다. 즉 책은 눈의 확장이고, 바퀴는 다리의 확장이며, 옷은 피부의 확장이고, 전자회로는 중추신경계의 확장이라고 본다. 감각기관의 확장은 곧 감각체계의 변화를 가져오고, 이렇게 변화된 인간의 감각체계는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낸다. 미디어 자체가 곧 메시지라는 이야기다. -195-196쪽

살아온 환경에 따라 사람들은 각기 다른 문화를 접하고 습득한다. 이 과정을 통해 클래식이 즐거운 사람과 클래식만 들으면 하품이 나오는 사람이 나뉘는 것이다. 그럼 환경은 무엇 때문에 나뉘는가. 결국 돈과 권력이다. 역으로 말해 그 사람의 문화 취향을 보면 그 사람의 정치적, 경제적 환경을 알 수 있는 것이다.-206-207쪽

사람들은 자식을 통해 자신이 더 놓은 계급에 속하는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는 사이 자신의 현재 계급은 점점 낮아진다. 슬픈 현실이다.-208-209쪽

지멜의 방법론은 당시 사회학자들과는 달리 미시적인 데가 있었다. 그는 사회란 "상호작용에 의해 연결된 수많은 개인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사회 담론이 인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결국 개인은 개인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사회는 그 방식의 총합이라는 주장이었다. -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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