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식은 대개 풍토의 차이에 기인한다. 풍토의 차이는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에서부터 건축 방식과 도시 구조, 노동의 방식, 이동의 선호 여부, 나아가서는 신의 존재와 그 양태, 우주의 탄생, 사후 세계의 존재, 시간의 흐름 등을 인식하는 방식에까지 극단적인 차이를 보여 준다. 이에 따라 내가 생각해낸 것이 '농경과 유목'이란 이분법이다. 농경이란 주로 재배식물을 기르면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가꾸고 그 성과물을 취하되, 그것이 끝난 다음에는 자연에 되돌려주는, 그래서 순환과 지속을 중시하는 삶의 방식이다. 농업과 정착을 바탕으로 한 농경적 삶은 범신론과 우주론적 세계관을 키워냈으며 말보다는 행동을, 외향화보다는 내면화를 지향했다. 수신과 자율이 자연스례 중요한 덕목이 됐다. -7쪽
반면, 유목은 메마른 땅에 살기 때문에 농사는 지을 수 없고 무리 지어 사는 가축을 따라 이동하는 게 고작이라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전부 조달할 수 없다. 부족한 것들은 대체로 원거리 사람들과의 교환 거래나 약탈을 통해 획득한다. 가축 사육과 상업 그리고 기동성으로 상징되는 유목적 삶은 땅보다는 하늘에 의지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 탓에 유일신 신앙과 창조론적 세계관, 그리고 인간 중심주의를 잉태했으며 행동보다는 말, 내면화보다는 외향화를 중시했다. 그들은 이익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으며, 그 같은 이익 지향성은 공격성과 결합하여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지금의 '세계화 시대'까지 도래케 했다. 성서는 히브리인들의 작품이다. 성서의 키워드(중심어)가 떠남 또는 '이동(migration)'인 것은 그들이 유목민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동 목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으로 묘사돼 있다. 유목민일지라도 땅은 필요한 것이다. 그들이 두 다리를 펴고 쉴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의 땅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구현되는 그런 공간적 의미에서의 땅도 필요해서이다.-8쪽
사랑은 선언이란 과정을 통해 '창조'되듯이 하나님의 우주 만물 창조도 그와 같았다. 성서는 우주 만물과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만물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제 나름의 용도와 기능이 정해져 있다. 하나님의 쓰임에 쓰일 도구로서, 거기에는 우연(chance)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84쪽
성서가 뱀과 출산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면 농경문화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뱀과 여성성을 받들게 된다면 자신들의 생존 근거나 정체성을 흔드는 일이 되므로 유목민인 유대인들이 그걸 우상 숭배라며 금기시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100쪽
음양은 순환구조를 갖는다. 음과 양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음은 양이 되기도 하고 양 또한 음이 되기도 하는 상보적(相補的)인 관계, 순환과 조화의 관계에 있다. 음은 결코 격퇴해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음양은 빛과 어둠과는 달리 가치 술어가 아니라 가치중립적 술어인 것이다. 빛과 어둠의 대결! 이는 사막 문화권이 갖는 정신 구조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풍토에 있는데, 순환구조가 가동되지 않는 데다 무엇보다도 그곳에 쏟아지는 빛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134-135쪽
출애굽기의 히브리어 원 명칭은 '웨일레 셰모트(Weeleh Shemoth)'로 그 뜻은 '이름은 이러하니'이다. 이름은 유대인들에겐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궁극적인 그 무엇이다. 인간의 인식은 비교 또는 대비를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즉 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를 나와 다른 '남'과 비교해야 한다. 그때 얻어지는 것이 정체성, 흔히 말하는 아이덴티티(identity)이다. 정체성이란 생명을 뜻한다. 유대인에게 이름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164쪽
여호와는 영어식 표현이고 히브리어로는 야훼라 표기된다. 야훼란 '나'라는 뜻이다. 처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일러준 "나는 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전에는 "Yahweh asher yihweh"로 기록되어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I am who I am."이고 우리 개역 성경은 "스스로 있는 자"라 번역했다. -198쪽
성전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또 거창하면 거창할수록 그 곳에서 기도하는 인간의 심령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지붕도 없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통곡의 벽 광장은 기도의 공간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할 것이다. -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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