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
김수정 지음 / 달 / 2009년 8월
절판


[링빙 라이브러리]의 콘셉트는 단순했다. 도서관에 와서 '책'을 빌리는 대신 '사람'을 빌린다는 것, 대출시간은 30분, 독자들은 준비된 도서목록-사람들목록-을 훑어보며 읽고 싶은 책-사람-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책-사람-과 마주앉아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읽는 것이다. 도서목록에 올라 있는 사람들은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살마들, 남들과 약간 다른 독특한 이력 덕분에 '오해의 시선'을 받아온 사람들. 즉, [리빙 라이브러리]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하고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서로 잘 알지 못해 가질 수밖에 없었던 타인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 고정관념을 줄이자는 의도로 기획된 행사였다. -9쪽

[리빙 라이브러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 사람 입장이 되어보자는 것. 그러면 그 사람의 처지를 헤아릴 수 있다는...-16쪽

"선생님이 결코 가져서는 안 될 게 바로 선입견과 편견이에요. '저 아이는 아마 이 정도 수준인걸' '이런 가정 형편이니 여기까지만 기대해야지'. 이런 선입관이 아이의 미래를 망칠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선입관과 편견을 깨자는 [리빙 라이브러리]에 매료됐어요. 아이들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데, 타인에 대한 편견을 타파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이 '살아 있는 도서관'이야 말로 완벽하게 아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죠."-77-78쪽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노년이 그런 거예요. 적당히 돈을 벌었으니 나머지 인생은 조용한 곳에서 쉬면서 보내겠다, 뭐 이런 거.
전한테 그건 이미 죽은 삶이에요. 왜 죽는 걸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죠?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도전하면서 살 거예요."-155쪽

우리는 자주 자신의 가치 기준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나눠놓고 산다. 영국 사람이 영국에 살지 않고, 아프리카에 살면 비정상인 걸까. 그렇다면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우여곡절 끝에 영국에 사고 있는 나는 비정상인가 정상인가. 어쩌면 '특별하다'와 '평범하다'는 개념은 우리가 멋대로 만든 허상일지도 모른다. 정상, 비정상이라는 말조차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일 수도 있다. 런던을 보면 딱 그렇다. 코스모폴리탄이라는 표현이 너무 잘 어울리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복작복작 어우러져 살고 있다. 자신을 런던이라는 용광로에 녹여 출신, 나라, 인종을 떠나 세계 시민 런더러로서 살아간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역사와 민족, 개인 취향을 고집스럽게 지키는 개성 만점의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의 범주에 드는 런던 사람들이다. -233쪽

"어휴, 저 책상이 좀 낡았네. 내다 버려야지"라고. 하지만 만약 그 책상을 본인이 며칠 동안 공을 들여서 직접 만들었다면 그런 생각을 쉽게 하지는 못할 거라는 거다. 혹은 그 책상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열심히 대패질해가며 만들어서 선물한 거라면 그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된 수고와 에너지를 쉽게 저버릴 수는 없다는 거다. 그런데 돈을 사용하면서부터 우리는 그런 마음을 잃어버렸다. 물질 만능주의 사고방식과 습관에 길들여져 언제부터인가 아무 고민 없이 물건을 버리고, 새로운 물건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물건의 진짜 가치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돈이 표시하는 숫자에 따라 가치를 매기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에게 물건 자체보다 어느 브랜드인가, 가격이 얼마인가가 더 중요할 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가 소유한 물건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마크는 우리의 삶이 이렇게 변질된 게 너무 슬펐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돈은 우리 인생에서 주인공이 될 정도로 그리 대단한 존재는 아니라고. 돈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돈이 행복을 좌우할 수는 없다고.-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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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의학을 역사에 맞춰서 이야기로 구성한 글을 읽었다. 모든 사건은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 심신의학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흘러간다. 질병에 대하여 가짜의학인 플라시보효과에 기댈 수 밖에 없었던 시절에서 감정이 질병의 원인이 되어 몸으로 드러내는 시대로 왔지만, 치유를 위해서는 개인의 신념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그래서 긍정적인 사고를 개발하는 것이 최고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고 측정되지 않는 개인의 믿음을 누가 믿을까... 세상은 점점 발전되어 해결되지 않는 개인문제와 사회문제로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현대의 삶이 망가지는 원인을 최소화하여 아프지 않으려면 감정적 사회적 지원이 되는 사람과의 끈으로 이어져 있을 때야 병이 치유된다기에, 결국엔 사랑이 최고의 치료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이라도 생명을 연장하거나 어떻게 도움이 되고 있느냐는 여전한 의문으로 남게 된다. 결국 동양의 명상으로 넘어 와 현재까지 의학이 진행되고 있다. 덧붙여 단순한 의학의 문제가 아니라 동양의 우수한 문화까지 드러났다는 마지막 줄까지의 이야기다. 결국 우리의 몸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다양한 분야로 이야기거리를 만들 수 있다. 한사람이 존재한다함은 의학 뿐 아니라 과학, 문화, 역사, 종교, 철학 등 모든 게 녹아 있기 때문이리라... 번역하기 무지 힘들었겠다, 독자가 많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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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 - 과학과 종교를 유혹한 심신 의학의 문화사
앤 해링턴 지음, 조윤경 옮김 / 살림 / 2009년 2월
품절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언제나 질병이 안겨주는 고통의 의미를 납득하려 애썼다. 서양의 문화사 속에는 종교, 도덕, 사회를 다룬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가 존재하며, 환자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왜'라는 중대한 질문의 답을 얻고, 자신의 경험을 연결하여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운명을 더 잘 이해해왔다. 전통적으로 어떤 질병은 죄가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고, 질병을 통해 그 사람의 인생을 바꾸려는 신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도 했다. 현대 물리주의 의학은 모든 종류의 질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극히 일반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환자가 아니라 전적으로 질병에 대한 이야기이며, 여기에는 언제나 조직, 혈액, 생화학과 같은 전문 용어가 사용된다. -9-10쪽

우리 스스로에게 장난질을 하는 마음의 망령은 현실이 아닌 것을 경험하게 만든다. 이처럼 퇴마사에서 최면술사로 다시 스벤갈리로 이어지며 암시를 통해 사람들을 조종하고 속이는 망령은 지금도 인간의 상상력을 강하게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망령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통합 의학, 대체 의학, 그리고 심신요법과 별 관계가 없다. 심지어 이들은 마음과 몸의 연관성을 믿지 않는다. 또한 환자에게 실제로 도움을 주는 방법, 즉 무의식 속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긍정적인 기원을 담은 만트라, 명상, 서포트 그룹, 심리요법도 모두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일지라도 암시의 존재는 믿는다. 암시의 본질은 심신요법이 아니라 돌팔이 의사의 가짜 치료법이기 때문이다. -73-74쪽

저명한 문화비평가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1970년대에 암이 발병했다. 막상 자신이 암에 걸리고 보니 감정적으로 억압된 사람들이 암에 걸린다는 낡은 정신분석학적 믿음이 아직도 대중 속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사실에 기겁했고, 이것이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못 박았다. 또한 사람들은 결핵에 잘 걸리는 특정한 성격 유형이 있다고 믿곤 했다. 이런 믿음은 현대 의학에 의해 결핵이 박테리아 때문에 발병한다는 사실이 발견될 때까지 이어졌다. 아직 정확한 발병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지만 암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손택은 영향력 있는 책 [은유로서의 질병(Illness as Metaphor)]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질병은 은유가 아니다. 질병을 바라보는 가장 진실한 방법이자 가장 건강하게 질병을 앓는 방법은 은유적 사고를 가장 많이 걸러내는 것이며 대부분은 이에 거부감을 느낀다."-119쪽

"플라시보와 관련한 논쟁이 수그러들지 않는다는 것음 무슨 의미일까?" "오늘날 인간은 왜 그토록 긍정적인 사고의 마법에 대한 낡은 관심을 플라시보라는 마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일까?" 그 한 가지 해답은 그렇게 하면 긍정적인 사고와 자기치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실험실, 역학연구 등 믿을 수 있는 데이터를 통해 지지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비록 뇌 촬영기술을 사용해서라도 긍정적임과 플라시보를 연결함으로써 우리는 실험을 통해 믿음의 치료 효과를 연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173쪽

세상에 의해 각 개인마다 주어지는 스트레스의 절대적인 양보다 개인이 세상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대처하느냐는 기능으로 재정의할 경우 새로운 의문이 발생했다. 특정 유형의 사람들은 삶의 도전에 대한 적응 능력이 평균보다 못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스스로에게 스트레스를 주어 건강을 해치는 성격도 있지 않을까?-207쪽

사회적 지원이 완충제라면 비축해두었다가 언제든, 특히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꺼내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사회적 지원이 정보라면 사실상 의식적으로 믿는 것에 불과하며, 이 경우 누군가 진짜 사랑받고 존중받았는지의 여부나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교제를 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주관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이 '인지적 사회적 지원'이 된다. -239-240쪽

"사랑과 친밀감음 건강과 질병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이다. 내가 아는 한 식습관, 흡연, 운동, 스트레스, 유전, 약물, 수술 등 그 어떤 의학적 요소도 삶의 질, 질병의 발생, 질병으로 인한 모든 조기 사망에 사랑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는 못한다."-252-253쪽

[사랑, 의학, 그리고 기적]의 저자이자 암 전문 외과의 버니시겔의 말

나는 결국 모든 질병은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거나 조건부 사랑만을 받은 사람의 면역계가 지치고 우울해져 몸이 약해지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한다. 또한 모든 치유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낟. 내가 생각하는 진실은 사랑이 병을 치유한다는 것이다. -255쪽

하지만 희망은 있다. 사회의 잘못을 우리 스스로 고치는 일은 고사하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조차 바로잡을 수 없을지라도 이런 일을 해내는 '다른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이 누구인지 궁금한가? 이 기사에 따르면 이들은 동쪽에서 왔으며 서쪽에 사는 사람들이 지니지 않은 면을 모두 갖춘 사람들이다. 우리는 현대적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대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스트레스 때문에 곤경에 처하고 긴장하지만 이들은 일부러 유도한 평정과 명상을 바탕으로 현명하게 말하고 행동한다. 우리의 의학은 공격적이고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인간의 몸을 치료한다. 그러나 이들의 의학은 부드럽고 인간을 몸과 마음 모두를 지닌 통합체로 인식하여 환자가 받는 고통을 가늠한 뒤 치료방법을 선택한다. 우리는 마음과 몸이 별개라는 생각을 끈질기게 고수하는 반면 이들은 마음과 몸이 서로 어디까지 밀접하게 작용하는지 이해하고, 이 지식을 독특하고도 효과적인 치유법으로 변환하는 방법을 찾았다. 놀랍게도 해결책은 간단하다. 이들을 통해 가르침을 얻는 방법을 배우고, 그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를 치유할 방법을 발견하면 된다.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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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생뚱맞게 입은 원피스까지 용서가 되는 날이다. 누구에게도 두근두근대는 내 인생을 들키고 싶지 않는 날이다. 그래서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날이다... 지나와서야 그렇구나하고 조금 알 듯한, 이제 알듯말듯한 삶인데, 되돌아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책읽는 내내 두근거렸다. 아껴가며 읽었다. 아직까지 두근거린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인생이 앞에 있으니까. 잊지말아요, 지금의 마음을... 내 인생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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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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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탁자 위에 놓인 물잔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설명했다. "이 물만 해도 그래. 우리집은 대수가 보리차 좋아해서 물 끓여 먹거든? 근데 봐봐, 밥상에 물 한잔 올려놓으려면 얼마나 많은 절차가 필요한지. 물 끓여야지, 식혀야지, 주전자 씻어놔야지, 물병 소독해야지, 병에다 다시 물 담아야지, 냉장고에 넣어야지...... 근데 그렇게 끓인 물이 또 이틀을 못 가. 예전에 물 마실 땐 아무 생각 없었는데. 참, 사는 게 보통 일이 나닌 것 같아."-83쪽

고작 열일곱살밖에 안 먹었지만, 내가 이만큼 살면서 깨달은 게 하난 있다면, 세상에 육체적인 고통만큼 철저하게 독자적인 것도 없다는 것였다. 그것은 누군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누구와 나눠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프다'는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마음이 아프려면, 살아 있어야 하니까. -96쪽

어딜 가나 바람소리가 들렸다. 어디서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초록을 자빠뜨린 주황. 주황을 넘어뜨린 빨강. 바람은 조금씩 여름의 색을 벗기며 땅밑의 심을 앗아가고 있었다. -192쪽

가슴 뛰는 날들이 이어졌다. 내가 말하고, 그애가 답하고, 다시 그애가 말하면 내가 답하는. 한 줄의 문장으로 하루를 버틸 수 있고, 한 번의 호흡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하루. 딱히 뭐라 이름 부를 수 있는 사이는 아니라도, 그저 얘기를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게 좋았다. 평소에 왜 장씨 할아버지가 나한테 그렇게 또래를 사귀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의미있고, 중요해지는 날들이었다. 그애가 하는 얘기, 그애가 쓰는 단어, 그애가 보낸 노래, 그애가 가른 여백, 그런 것이 전부 암시가 됐다. 나는 이 세계의 주석가가 되고, 번역가가 되고, 해석자가 되어 있었다. 상체를 기울여 뭔가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려 하고 있었다. 내 짐작이 맞았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탓에 이 세상도 덩달아 좋아져버렸다. -232-233쪽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편지를 쓰는 일보단 답장을 기다리는 일이 훨씬 더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신은 혼자 할 수 있는 거지만, 수신은 그렇지가 못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적어도 그렇게 둘 이상이 있어야 하고, 받는 사람이 최소한 자기가 무얼 받았는지 알아차려야만 가능한 일이 바로 '소통'이었다.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도 안 생겼을 것을, 말 그대로 내가 뭔가 '했기'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도 손이나 발이 아니라 '마음'을 사용해서 한 일...... 그게 또 '마음'이라, 처방할 약으로는 상대의 '마음'만한 것이 없는......-251쪽

"에구, 나도 사람이 언제 다 크는지 모르겠구나. 더 자랄 수 없는 사람은 무얼 하는지, 그런 것도 모르겠고."
"........."
"근데 내가 마흔 넘었을 때 딱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이제 내 몸은 나빠질 일만 남았다, 하는. 몸이 좋아 몸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산 게 지금까지의 삶이었구나, 앞으로는 뭔가 잃어버릴 일만 남았겠구나 하고 말이야."
"음"
"그래도 그땐 그냥 짐작이었지. 나이란 건 말이다. 진짜 한번 제대로 먹어봐야 느껴볼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거 같아. 내 나이쯤 살다보면......음, 세월이 내 몸에서 기름기 쪽 빼가고 겨우 한줌, 진짜 요만큼, 깨달음이라는 걸 주는데 말이다, 그게 또 대단한 게 아니에요. 가만 봄 내가 이이 한번 들어봤거나 익히 알던 말들이고, 죄다."
"그럼 저도 지금 아는 것을 나중에 한번 더 알게 돼요?"
"그럼."-298-299쪽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부는 것은 나무들이 제일 잘 안다. 먼저 알고 가지로 손을 흔들면 안도하고 계절이 뒤따라 온다. 봄이 되고 싶은 봄. 여름이 하고 싶은 여름. 가을 혹은 겨울도 마찬가지다. 바람이 '봄'하기로 마음먹으면 나머지는 나무가 알아서 한다. 자연은 해마다 같은 문제지를 받고, 정답을 모르면서 정답을 쓴다. 계절을 계절이게 하는 건 바람의 가장 좋은 습관 중 하나다. -328쪽

작가의 말


소리없이 기다려준 당신과 나에게

마음이 하늘을 본다.
내몸이 바닥에 붙어 있기 때문이겠지.

바람이 불고
내 마음이 날아
당신 근처까지 갔으면 좋겠다.

이 노래가
씨앗이 될지, 휘파람이 될지,
모르는 얼굴이 될지
알 수 없지만

당신이 오래전 부르고 싶어한 이름과
닮아 있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inBOIL에게 바친다.
버려진 이름들에게 온기를 불어넣는 법을
나는 그에게서 배웠다.

2011년 6월
김애란-353-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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