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책을 왜 읽어요?"라는 질문에 저는 무수히 많은 디테일로 답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충동, 게으름, 타성, 우정, 불안, 고통, 회한, 슬픔, 욕망, 상상력, 기억, 위로, 정체성, 공감, 재탄생, 창조, 이 모든 것에 대해서요. 저는 이러한 디테일을 책을 통해 조금씩 배운 듯합니다. 저는 책을 잃고 한 발짝씩 나가며 거기서 배운 디테일들로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사랑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비인격적으로 취급하는 일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모든 것이 거래되는 세상에서 사랑만은 유일하게 거래할 수 없습니다. 사랑만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됩니다. 삶은 이 세계에서 내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이미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하겠어?"라며 삶을 수수방관하게 하지 않습니다. -17쪽
소외된 개인은 "내가 이것을 원해도 될까?"라는 '도덕적 질문'에 대해 항상 "이것을 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야.", "다른 것을 해야 했기 때문이야.", "나에겐 선택권이 없어."와 같은 말을 한다고 합니다. 즉 소외된 개인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해야 했기 때문에 했어."라고 말합니다. "바로 내가 그것을 원해서 했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복종하는 자는 결코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51쪽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기가 무섭게 이 빽빽한 방 안에 칼로 도려낸 듯이 빈자리가 파였다. 한 인간이 이미 마련된 제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72쪽
우린 누가 나를 필요로 하는가, 누구와 연결될 것인가 같은 중요한 문제를 선택이 아니라 자격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어떤 자격증을 딸 것인가 같은 문제로 착각합니다. 누군가에게 너무나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인맥을 관리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과 떠들썩한 우정을 맺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해야 할 삶과 실존의 문제를 임기웅변이나 처세술, 기술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면서 자존감을 지닌 인간으로 살기는 어렵습니다. -79쪽
우린 포기가 어떻게 표현되었나. 슬픔이 어떻게 표현되었나. 양심은, 두려움은, 좌절감은, 위로는 어떻게 표현되었나를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책 읽기도 형식입니다. 발터 벤야민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읽은 모든 책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그에게 책 읽기는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이라는 형식을 발견하는 행위입니다. 그는 읽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도 우리의 딜레마, 고통, 슬픔을 표현하려 합니다. 어떤 방식이 될까요? 타협이냐 대결이냐, 망각이냐 묵비권이냐 여러 가지가 있겠죠.-95쪽
사랑은 우리가 결이 진 표면을 어루만질 때, 손이나 입으로 뭔가를 이야기할 때 생겨난다. 입은 어루만지기 위해 이야기를 이용하고, 흩어졌던 결이, 입 밖에 내어 읽을 수 있는 결이 나타나도록 한다. -122쪽
삶 속에는 앎의 자리가 있습니다. 교육이란 것이 하도 이상하게 변절되어서 앎이란 말은 정말 매력 없게 변했지만요. 우리가 아직 아이였을 때는 책이 주는 '앎'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인어 공주]를 읽으면서 뭔가를 얻기 위해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빨간 망토]를 읽으면서는 세상에 친절한 할머니 목소리를 내는 늑대가 우글거린다는 것을. [아기돼지 삼형제]를 읽으면서는 세상에 내 집을 부서뜨리거나 나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늑대가 우글거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라큘라]를 읽으면서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혼이 없으면 남들의 피나 빨아 먹고 살 수밖에 없단 걸 알게 되었고, 신 포도니 따 먹지 말라는 [이솝우화]의 여우 같은 짓은 하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152쪽
우리는 반복되는 일상을 살면서 어딘가로 옮겨 갑니다. 반복하면서 새롭게 바뀝니다. 한 스텝, 다시 한 스텝, 또다시 한 스텝. 춤추듯이. 우린 반복되는 삶 속에서, 자구 던지는 질문 속에서 오로지 그 질문 안에서만, 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하고 고유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238쪽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질문에서 시작되어 질문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뒤의 질문은 앞의 질문과 다릅니다. 책 읽기는 수많은 우회로를 거친 느린 귀향입니다. 새로운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고, 몰랐던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고, 달라진 자기 자신에게 돌아갑니다. -239쪽
저는 왜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도 돼요?"라고 물었는지 이제 이해합니다. "그렇게"라고 애매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는 저마다의 가습속에 있었던 겁니다.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 말고, '살아야 하는 삶', 즉 인간이라면 꿈꾸는 존재라면 "그렇게" 한 번 살아 봐야 하는 삶에 대해 자꾸만 말하게 합니다. 그 말로 우리를 채우게 합니다. 그것이 "그렇게"였습니다. -242쪽
파리로 떠난다면 꼭 가지고 갈 필수품, PARIS IN(book)이다. 특히, 여성이라면...
변산반도. 채석강. 격포. 내소사. 고사포를 다녀왔다. '신사와 호박'에서의 식사는 꿀맛이었고, 내소사의 단아하고 소박한 모습은 닮고 싶었고, 고사포 바닷가는 맑고 깨끗했다. 조개까지 캤다.
바람을 쐬었다.
입안이 훨었고 피곤으로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만, 바람. 바람. 바람은 한꺼번에 해결이 된다.
이건 현실이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어떻게 머리를 굴려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왜?"라는 한 단어의 글자뿐이다.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이 세상에 이유가 없는 것만큼 답답한 일은 없다. 이유를 알면, 그 이유를 해결하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문제도 해결된다. 하지만 이유가 없으면 답도 없다. 단지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을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새로운 애인이 생긴 것도 아니고, 그냥 마음이 식었을 뿐이라는 그의 대답은 그녀를 더욱 화나게 했다. 차라리 새 애인이 생긴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단지 그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때문이라고 말하니, 이건 정말 답이 없는 문제다. 더 이상 뭐라고 할 말도 없어진 그녀는 일단 모든 정신을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일에 집중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밖에 없었다. -17쪽
어쩌면 그녀는 그를 잃는 것보다 자신에게 일어난 최초의 실패를 더욱 인정할 수 없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그녀는 두 손을 들고 자신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음과 세상에는 예상하지 못했어도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9쪽
진짜 사랑해서 헤어짐이 이렇게 힘들고 아픈 것인가, 아니면 헤어지면 슬퍼해야 한다는 공식이 그녀를 슬픈 연기라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인가? 그녀는 문든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스스로가 슬프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미 그에게 가슴 떨리는 사랑을 느꼈던 것은 아주 예전의 일, 헤어지기 직전의 그녀는 그가 가져다줄 여유로운 미래와 남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는 그녀 자신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스스로를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자신을 객관화해서 감정의 소모를 줄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그녀는 점점 더 마음이 가벼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음속을 채우고 있던 묵은 감정을 모두 떨쳐내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터였다. -82쪽
그와 헤어지면서 그녀를 지켜주고 있던 보호막이 떨어져나간 걸까? 과연 누가 누구를 지켜준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만약 그가 그녀를 지켜줬다면 그녀 또한 그를 지켜줬어야 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녀는 막연히 생각했다. 자기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는데 남을 어떠헥 지켜준단 말인가? 지금까지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대체 왜 자신을 떠났는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그가 날 떠난 건 어쩌면 이런 이유였는지도 모르겠어.'-104쪽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한 모금 들이키자 달다 못해 쓴맛의 뜨거운 초콜릿이 목을 타고 서서히 몸 안으로 퍼져 간다. 우리나라에서 먹는 분말 코코아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리얼 초콜릿. 간간히 덜 갈린 초콜릿 덩어리가 입 안에서 씹히느넫 그것 또한 이 쇼콜라의 매력이다. -128쪽
여행은 자고로 어느 정도 외로워야 한다. 조금 쓸쓸하고 조금 외로워야 풍경도 제대로 보이고, 사람도 제대로 보인다. -165쪽
어느 순간,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태어날 때부터 남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듯, 오로지 그 모습으로만 나에게 존재한다. 가령 회사에서의 그의 모습이라든지 슈퍼마켓에서 뭔가를 사는 그의 모습은 전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안다. 어쩌면 애정이 식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남편에 대한 사랑이 식었느냐고 하면, 그건 또 별개의 문제이다. 나 나름대로의 형태로 나는 여전히 남편을 사랑한다. 다만 손으로 깨질 것같이 안타깝고 애달픈 모양이 아닐 뿐이다. 아마 남편도 비슷하리라. 나에게 친절하지만 그 이상의 애정을 느낄 수는 없다. 아마 그것이 내 우울함의 첫 번째 이유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225-226쪽
오늘도 이렇게 특별한 무언가는 하지 않은 채 마레에서 하루를 보낸다.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종일 여기저기를 쏘다녀도, 오늘처럼 그냥 산책하듯 다녀도 하루는 생각보다 길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시간은 또 금방 가서 금세 밤이 된다. 일단은 깊이 생각하지 않을 것. 다시 우울해지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으므로, 그냥 주어진 현재를 묵묵히 즐길 것. 그게 우선은 나의 제일 중요한 계획이자 목표이다.-294쪽
사지 않더라고 예쁘고 좋은 것을 보는 건 중요한 일이다. 여자는 그 자체에서 행복을 느낀다. -304쪽
시간을 나눈다는 건 이래서 좋다.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말이 생긴다. 우린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깔깔대고 웃으며 나란히 집으로 돌아왔다.-315쪽
그게 꽃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어떤 하나에 빠져 있는 사람은 정말 아름답다. 이제야 정확히 알았다. 내가 원하는, 또 바라는 얼굴은 이런 거라는 사실을. 다른 말이나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고 온전히 하나에 집중한 얼굴. 첫 번째 꽃집에서 훔쳐봤던 꽃을 배우는 사람들의 얼굴과 두 번째에서 만난 꽃을 만들던 사람들의 얼굴, 그리고 지금 바로 이 남자의 얼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그 무엇. 하나에 몰두하고 집중한 얼굴은 이런 것이리라. 세상 어떤 보석보다, 또 어떤 명품보다도 근사하고 값지다.난 마음이 꽉 차서 그곳을 나왔다. -324쪽
가을, 제주도 가려했는데 태풍온단다. 모든 걸 캔슬하고 변산반도에 갈까, 나서기 직전...
Here and Now, with Whom 집중하기...
그리 무덥던 여름도 내게 몇번이나 남았을까. 아주 아주 많아야 40번 될까. 그까짓 것...
빨간 표지의 책, 'PARIS IN' 을 챙기고 출발!
사랑은 산책하듯 스미는 자,산책으로 젖는 자('사랑은 산책자'中 - 이병률)-50쪽
이제 곧 익숙해질 거야.살아서 잠드는 일에 대해살아서 깨어나는 일에 대해이름도 모르는 벌판의 낯선 태양과살아서 마주치는 일에 대해.바람이 몹시 분다.바람이 뭔지도 모르면서두려운 없이 바람 소리를 듣는다.나무가 뭔지도 모르면서나무로 살아온 것처럼.('나무를 모르는 나무'中 - 황성희)-83쪽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사곶 해안'中 - 박정대)-158쪽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건, 왜 한 해의 시작이 겨울의 한복판에 있느냐는 점이죠. 전날까지 불던 바람과 오늘 부는 바람이 전혀 다를 바 없이 추운 그런 나날의 하나가 도대체 왜 새해의 첫날이 되어야만 할까요? 개나리와 진달래와 목련꽃이 만개하는 날을 새해의 첫날로 삼으면 좋을 텐데요. -214쪽
가을이라는 물질-이기철가을은 서늘한 물질이라는 생각이 나를 끌고 나무나라로 들어간다잎들에는 광물 냄새가 난다나뭇잎은 나무의 영혼이 담긴 접시다접시들이 깨지지 않고 반짝이는 것은나무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햇빛이 금속처럼 내 몸을 만질 때 가을은 물질이 된다나는 이 물질을 찍어 편지 쓴다촉촉이 편지 쓰는 물질의 승화는 손의 계보에 편입된다내 기다림은 붉거나 푸르다내 발등 위에 광물질의 나뭇잎이 내려왔다는 기억만으로도 나는 한 해를 견딜 수 있다그러나 너무 오만한 기억은 내 발자국을 어지럽힌다낙엽은 가을이라는 물질 위에 쓴 나무의 유서다나는 내 가을 시 한 편을 낙엽의 무덤 위에 놓아두고흙 종이에 발자국을 찍으며 돌아온다-272쪽
우리는 날마다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 순수한 존재를 경험 할 수 있다. 시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것들, 즉 은행나무며 초승달이며 바다 같은 것들이 모두 그렇게 순수하게, 즉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시를 읽는 시간 역시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 순수하게, 매일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이 순수한 존재의 경험을 통해 결국 우리는 이 세계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의 모호한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모두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그저 아무런 목적이나 쓸모 없이 하루 중 얼마간 시간을 내어 언어를 읽는 일이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다른 책도 좋겠지만, 시를 읽는 게 제일이다. -2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