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순간 : 시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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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산책하듯 스미는 자,
산책으로 젖는 자
('사랑은 산책자'中 - 이병률)-50쪽

이제 곧 익숙해질 거야.
살아서 잠드는 일에 대해
살아서 깨어나는 일에 대해
이름도 모르는 벌판의 낯선 태양과
살아서 마주치는 일에 대해.

바람이 몹시 분다.
바람이 뭔지도 모르면서
두려운 없이 바람 소리를 듣는다.
나무가 뭔지도 모르면서
나무로 살아온 것처럼.
('나무를 모르는 나무'中 - 황성희)-83쪽

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
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
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절대 빠져들지 않는
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
('사곶 해안'中 - 박정대)-158쪽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건, 왜 한 해의 시작이 겨울의 한복판에 있느냐는 점이죠. 전날까지 불던 바람과 오늘 부는 바람이 전혀 다를 바 없이 추운 그런 나날의 하나가 도대체 왜 새해의 첫날이 되어야만 할까요? 개나리와 진달래와 목련꽃이 만개하는 날을 새해의 첫날로 삼으면 좋을 텐데요. -214쪽

가을이라는 물질

-이기철

가을은 서늘한 물질이라는 생각이 나를 끌고 나무나라로 들어간다
잎들에는 광물 냄새가 난다
나뭇잎은 나무의 영혼이 담긴 접시다
접시들이 깨지지 않고 반짝이는 것은
나무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햇빛이 금속처럼 내 몸을 만질 때 가을은 물질이 된다
나는 이 물질을 찍어 편지 쓴다
촉촉이 편지 쓰는 물질의 승화는 손의 계보에 편입된다
내 기다림은 붉거나 푸르다
내 발등 위에 광물질의 나뭇잎이 내려왔다는 기억만으로도
나는 한 해를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오만한 기억은 내 발자국을 어지럽힌다
낙엽은 가을이라는 물질 위에 쓴
나무의 유서다
나는 내 가을 시 한 편을 낙엽의 무덤 위에 놓아두고
흙 종이에 발자국을 찍으며 돌아온다
-272쪽

우리는 날마다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그 순수한 존재를 경험 할 수 있다. 시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것들, 즉 은행나무며 초승달이며 바다 같은 것들이 모두 그렇게 순수하게, 즉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시를 읽는 시간 역시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 순수하게, 매일 반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이 순수한 존재의 경험을 통해 결국 우리는 이 세계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의 모호한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도 모두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그저 아무런 목적이나 쓸모 없이 하루 중 얼마간 시간을 내어 언어를 읽는 일이 우리에게는 중요하다. 다른 책도 좋겠지만, 시를 읽는 게 제일이다.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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