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IN - 솔로, 혹은 홀로
이현지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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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현실이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어떻게 머리를 굴려야 할지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왜?"라는 한 단어의 글자뿐이다.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냥" 이 세상에 이유가 없는 것만큼 답답한 일은 없다. 이유를 알면, 그 이유를 해결하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문제도 해결된다. 하지만 이유가 없으면 답도 없다. 단지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을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새로운 애인이 생긴 것도 아니고, 그냥 마음이 식었을 뿐이라는 그의 대답은 그녀를 더욱 화나게 했다. 차라리 새 애인이 생긴 거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단지 그는 이제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때문이라고 말하니, 이건 정말 답이 없는 문제다. 더 이상 뭐라고 할 말도 없어진 그녀는 일단 모든 정신을 그 자리에서 일어서는 일에 집중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빨리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밖에 없었다. -17쪽

어쩌면 그녀는 그를 잃는 것보다 자신에게 일어난 최초의 실패를 더욱 인정할 수 없어서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윽고 그녀는 두 손을 들고 자신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음과 세상에는 예상하지 못했어도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9쪽

진짜 사랑해서 헤어짐이 이렇게 힘들고 아픈 것인가, 아니면 헤어지면 슬퍼해야 한다는 공식이 그녀를 슬픈 연기라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인가? 그녀는 문든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스스로가 슬프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미 그에게 가슴 떨리는 사랑을 느꼈던 것은 아주 예전의 일, 헤어지기 직전의 그녀는 그가 가져다줄 여유로운 미래와 남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는 그녀 자신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은 때로 스스로를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자신을 객관화해서 감정의 소모를 줄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그녀는 점점 더 마음이 가벼워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음속을 채우고 있던 묵은 감정을 모두 떨쳐내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터였다. -82쪽

그와 헤어지면서 그녀를 지켜주고 있던 보호막이 떨어져나간 걸까? 과연 누가 누구를 지켜준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만약 그가 그녀를 지켜줬다면 그녀 또한 그를 지켜줬어야 되는 게 아닐까 하고 그녀는 막연히 생각했다. 자기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는데 남을 어떠헥 지켜준단 말인가? 지금까지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가 대체 왜 자신을 떠났는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그가 날 떠난 건 어쩌면 이런 이유였는지도 모르겠어.'-104쪽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한 모금 들이키자 달다 못해 쓴맛의 뜨거운 초콜릿이 목을 타고 서서히 몸 안으로 퍼져 간다. 우리나라에서 먹는 분말 코코아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리얼 초콜릿. 간간히 덜 갈린 초콜릿 덩어리가 입 안에서 씹히느넫 그것 또한 이 쇼콜라의 매력이다. -128쪽

여행은 자고로 어느 정도 외로워야 한다. 조금 쓸쓸하고 조금 외로워야 풍경도 제대로 보이고, 사람도 제대로 보인다. -165쪽

어느 순간,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태어날 때부터 남편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듯, 오로지 그 모습으로만 나에게 존재한다. 가령 회사에서의 그의 모습이라든지 슈퍼마켓에서 뭔가를 사는 그의 모습은 전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안다. 어쩌면 애정이 식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남편에 대한 사랑이 식었느냐고 하면, 그건 또 별개의 문제이다. 나 나름대로의 형태로 나는 여전히 남편을 사랑한다. 다만 손으로 깨질 것같이 안타깝고 애달픈 모양이 아닐 뿐이다. 아마 남편도 비슷하리라. 나에게 친절하지만 그 이상의 애정을 느낄 수는 없다. 아마 그것이 내 우울함의 첫 번째 이유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 -225-226쪽

오늘도 이렇게 특별한 무언가는 하지 않은 채 마레에서 하루를 보낸다. 다리가 뻐근할 정도로 종일 여기저기를 쏘다녀도, 오늘처럼 그냥 산책하듯 다녀도 하루는 생각보다 길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시간은 또 금방 가서 금세 밤이 된다. 일단은 깊이 생각하지 않을 것. 다시 우울해지면 아무것도 의미가 없으므로, 그냥 주어진 현재를 묵묵히 즐길 것. 그게 우선은 나의 제일 중요한 계획이자 목표이다.-294쪽

사지 않더라고 예쁘고 좋은 것을 보는 건 중요한 일이다. 여자는 그 자체에서 행복을 느낀다. -304쪽

시간을 나눈다는 건 이래서 좋다.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할 말이 생긴다. 우린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깔깔대고 웃으며 나란히 집으로 돌아왔다.-315쪽

그게 꽃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어떤 하나에 빠져 있는 사람은 정말 아름답다. 이제야 정확히 알았다. 내가 원하는, 또 바라는 얼굴은 이런 거라는 사실을. 다른 말이나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고 온전히 하나에 집중한 얼굴. 첫 번째 꽃집에서 훔쳐봤던 꽃을 배우는 사람들의 얼굴과 두 번째에서 만난 꽃을 만들던 사람들의 얼굴, 그리고 지금 바로 이 남자의 얼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그 무엇. 하나에 몰두하고 집중한 얼굴은 이런 것이리라. 세상 어떤 보석보다, 또 어떤 명품보다도 근사하고 값지다.
난 마음이 꽉 차서 그곳을 나왔다. -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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