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기 전에 읽으면 좋은 책, '성경 한 걸음'이다. 성경 전체에 대한 간단한 간단한 이야기이다. 얇은 책이지만 단 번에 꼼꼼히 천천히 읽어야 한다. 잠깐이나 깜박 할 경우, 이해력이 단번에 떨어진다. 

-성경은 종교 서적이 아니며, 나의 삶과 역사를 독특하게 해석한 책이다. 따라서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로 통합되고 연결되어 있기에 처음부터 읽어야 한다. 

-그리하면 인류 전체 속에서 나의 삶이 의미 있게 보일 수 있다. 즉 "성경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그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104쪽)."

-지팡이를 짚으면서 집 밖을 나서기는 더더욱 무섭다. 그리고 너무 덥다.

-그래도 휴가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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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뉴비긴의 성경 한 걸음
레슬리 뉴비긴 지음, 윤종석 옮김 / 복있는사람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적어도 천 년 동안, 유럽인들이 알던 책은 사실상 성경이 유일했다. (중략) 성경의 이야기야말로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던 유일한 이야기였다. (중략)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가정에 성경책이 있다. (중략) 우리 대부분은 성경을 이따금씩 유익한 생각이나 위로, 지침이나 방향을 얻을 수 있는 문집 정도로 대한다. 그리하여 성경이 입맛대로 골라 읽는 지혜 선집이라는 인상을 부추긴다. 이는 읽을 만한 부분을 성경 자체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미리 정해 두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의 권위가 아닌 것이다. (17쪽)

성경은 종교 서적이 아닙니다. 종교 서적이라면 이미 인도에 얼마든지 많이 있어 더는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주의 역사, 곧 창조세계 전체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독특하게 해석한 책입니다. (18쪽)

모세는 자기 민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 홍해를 건너 시내 광야로 들어간다. (중략) 결국 그들을 하나님이 명하신 산으로 데려간다. 그들을 만나기로 미리 약속하셨던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다. (중략) 이것이 계약이 아니라 언약이라는 사실이다. 계약은 쌍방이 흥정하여 합의하는 것이지만, 언약은 주 여호와의 일방적 행동이다. 그분은 어중이떠중이 노예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전적으로 헌신하셨다. (34-35쪽)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법에 순종한다면 왕은 필요 없어진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옳은 길을 갈 것이다. 하지만 왕과 법정과 경찰과 감옥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치 질서를 주시면서도 또한 그것 자체가 깊은 타락의 원천임을 경고하신다. (45쪽)

40일 동안 예수는 광야에서 씨름하시며, 사람들의 추종을 얻어 내는 방법으로 세상이 제시하는 제시하는 세 가지 길을 마주하신다. 첫째는 경제적인 것이다. (중략) 다음은 종교적인 것이다. (중략) 끝으로 정치적인 길이다. (중략) 그 길을 거부하심으로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이다. (중략) 예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 나라는 예수 자신이다. (71-73쪽)

성경은 창조세계와 인류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그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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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가장 잘 나타낸 글들이 페이지마다 가득 들어있다.

저자에게 대체할 수 없는 존재, 마망(maman, 엄마)의 죽음은 다시 볼 수 없는 존재가 되면서, 관계가 끊어지고 패인 부재의 자리, 즉 슬픔이 놓여 있는 곳이 생긴다. 엄마를 애도하는 메모 형식으로 쓴 일기는 2년 간 이어진다. 그리고 사고로 인해 사망한다. 저자는 이 글이 출판되기를 바랐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는 그 어떤 위로도 말이 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있지 않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당연한 있음의 존재였는데.....


엉덩방아를 찧어 누워 만 있는 지도 일 주일이 지나간다. 겨우 붙잡고 몸을 옮겨 본다. 누워 있으니, 필요 없는 것들이 무척 많다. 원피스, 가방, 샌들 등을 가지려고 부대 끼고 우쭐한 마음이 쓸데없고 부질없음으로 다운 다운되면서 마음은 표류 중이다. 그런데 동생 친구면서, 내 친구 남동생(일곱 번째 딸이 내 친구. 남동생은 가족이 바라던 목사가 되었는데)이 죽었다. 멍하다. 

죽음들이 너무 가까이 와 있으면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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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지음, 김진영 옮김 / 이순(웅진)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러나 별로 반갑지 않은 위안들. 애도는, 우울은, 병과는 다른 것이다. (18쪽)

내 주변의 사람들은 아마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다(어쩐지 그런 것 같다). 나의 슬픔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하지만 한 사람이 직접당한 슬픔의 타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측정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이 우습고도 말도 안되는 시도). (20쪽)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니!" 이 말은 영원히 죽지 않는 그 어떤 존재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21쪽)

나의 슬픔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중략) "우리는 서로 사랑했다"라는 사랑의 관계가 찢어지고 끊어진 바로 그 지점이다. 가장 추상적인 장소의 가장 뜨거운 지점...... (47쪽)

이 순수한 슬픔. 외롭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패인 고랑. (50쪽)

이 당혹스러운 부재의 추상성. 그런데도 그 추상성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너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비로소 추상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추상은 부재이면서 고통이다. 그러니까 부재의 고통. 그런데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닐까. (52쪽)

슬픔은 잔인한 영역이다. 그 안에서 나는 불안마저 느끼지 못한다. (64쪽)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 그 사람 없이도 잘 살아간다면, 그건 우리가 그 사람을. 자기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그렇게 많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까......? (78쪽)

일에 열중하고 일에 쫓기는 흥분상태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면. 그때 가장 깊은 비애 속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 내면 안에 머물기. 조용히 있기. 혼자 있기. 오히려 그때 슬픔은 덜 고통스러워진다. (110쪽)

이런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 - 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111쪽)

그런데 이런 애도(지금 내가 겪고 있는 애도)의 슬픔은 래디컬하게 그러니까 새로운 방식으로 죽음을 길들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의식이 예전에는 그저 남에게서 빌려온(졸렬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철학에서 얻어낸) 것이었다면, 지금 그것은 나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고통스러운 건 죽음의 의식 때문이 아니다. 그건 나의 애도 때문이다. (129쪽)

마망의 죽음 때문에 빠져버린 고독은 이제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영역으로까지 팔을 뻗는다. (중략) 온몸을 탕진케 하는(공황 상태와 같은) 외로움의, 슬픔의 환유. (133쪽)

사랑이 그런 것처럼 애도의 슬픔에게도 세상은 비현실적이고 귀찮은 것일 뿐이다. (136쪽)

애도의 슬픔으로, 마음의 번민으로 내내 시달리면서도 (그것도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결코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지독하게), 전혀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 (거의 막돼먹은 아이처럼) 여전히 잘 돌아가는 습관들이 있다. 욕망의 낄낄거림, 작은 탐닉들, 난-널-사랑해라는 욕망 -- 아주 빨리 사라져버리는, 곧 다시 다른 사람에게로 방향을 바꾸는 -- 그런 욕망으로 가득한 담론의 습관들. (151쪽)

마망의 사진들을 오래 바라보는 일. 그 사진들에서 출발하는 글쓰기 작업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두려움을 (중략) 늘 똑같은 의견이 있다: 애도의 슬픔은 점점 익어가는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내 경우 애도의 슬픔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그 어떤 진행의 과정도 거기에는 없다: 때문에 너무 이른 애도의 슬픔 같은 것도 없다. (159쪽)

마망의 죽음은,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는, 지금까지는 추상적이기만 했던 사실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었다. (216쪽)

삶의 결핍 상태가 서서히 구체적인 얼굴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새로운 일을 꾸며서 만들어갈 수가 없다(글쓰기는 예외지만). 우정도 사랑도 그 밖에 다른 일들도. (234쪽)

자살
죽으면 괴로워하는 일도 없게 된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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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의 눈과 자세로 철학을 개혁한 후설로 이해한다. 

*의식과 객관적 존재 사이의 관계에서 비주관적인 객관성, 서로 다른 세계관, 사랑을 통한 타자와의 결합으로 조화로운 공동체로 사는 세상, 그러나...


*후설은 하이데거의 스승으로 수학자에서 브렌타노의 강의 때문에 철학자의 길로 들어선다.

-비주관적인 객관성이 모든 철학적 방법론적 시금석이어야 한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보는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하나의 철학적 지식이 되려면 별도의 철학적 정당화가 필요하다.  

-주관적 심적 작용과 객관적 논리적 존재 사이에는 나름의 상관 관계가 있다.

-의식은  지향성을 지닌다. 즉 모든 의식 작용은 반드시 어떤 것에 관한 의식으로서 그의 상관자인 대상을 지닌다. 

-의식 현상의 지향 구조가 왜곡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판단 중지(선입견들로 부터 떠나는 것)와 현상학적 환원(판단을 유보하고 의식의 지향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의 태도를 취해야 한다. 

-서로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의식이 존재한다.

-다양한 의식을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가 대상을 경험한다. 즉 내적 지각, 외적 지각, 수학적 직관, 타인 지각 방법으로 각각의 의식이 해당하는 대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과정을 '초월론적 구성'이라 한다.

-초월론적 현상학은 개별적 대상 뿐 아니라 세계 역시 나름의 의식을 지닌 것으로 본다. 세계 의식이 세계를 구성하는 장본인으로 세계 의식은 살면서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의식이다. 

-세계는 있는 것들의 총체다. 그러나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세계 의식은 주체가 경험하는 의미로서의 세계이다. 사람은 저마다 세계를 다르게 경험하게 된다. 그 이유는 각자가 서로 다르게 살아가면서 서로 다른 세계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10년 전과 지금의 세계가 다른 의미로 경험하며 살았을 것이다. 각 시기마다 의미로서의 세계가 다르고 이에 따라 세계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의미로서의 세계는 주체가 가지고 있는 세계 의식을 통해 구성되며 계속 변한다.  

-의미로서의 대상과 세계를 구성하는 주관을 '초월론적 주관'이다. 초월론적 주관은 우리들 각자이며, 의미로서의 대상과 세계를 구성한다. 또한  의미로서의 대상과 세계를 창조하는 원천이며, 계속 재창조하므로 우리는 의식적으로 창조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후설은 세계를 '생활세계'로 표현하며, 이러한 생활세계의 성격을 '지평'의 개념으로 표현한다. 생활세계 개념은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통일된 세계 개념이다. 후설은 자연과학적 객관주의를 비판하면서 '학의 위기'로 규정한다. 즉 당대의 실증적 학의 인간적 삶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이로 인한 철학적 의미의 상실 등의 현상을 일컫는다. 

-생활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적 삶의 세계로서 직접적 경험 속에서 주어지는 세계다. 그런데 자연 과학의 영향으로 주관적인 세계가 아닌 객관적 세계만이 참된 세계라고 여긴다. 

-우리는 자신의 인식 틀에 따라 세계를 정형화하고 유형화해 파악하고자 하며, 최대한 조화롭고 의미 있게 이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이 세계에 친숙감을 느낀다. 즉 경험 대상들의 의미의 연관체가 바로 지평이다. 지평은 우리 습성의 상관자다.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세계'가  '생활세계'이다.

-후설은 생활세계 개념과 더불어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타자와 세계의 문제를 바라보는 '사랑의 공동체' 개념도 말한다. 후설의 존재론은 개체 중심이 아니라 공동체 중심의 전체론적 세계관을 취한다. 즉 각 개인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존재 가치가 있으며, 타자와의 관계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나와 타자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 지가 주된 관심사다. 사랑을 통한 타자와의 결합이 인간 간의 결합의 최고 형태로 본다. 하지만 현실에서 가능할까. 

-후설은 조화로운 공동체로서의 세계가 현실화하는 모습을 목격하지 못하고 반대의 가능성만 체험하고 생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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