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있게 다가 온 문장들을 풀이해 보면, 책 한 권을 읽었다고 전체를 알은척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파리의 한 귀퉁이 다녀오고서는 프랑스를 다녀 온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완벽할 수 있다. 그러나 맥락 안에, 상황 안에 들어가면, 타인과 만나게 되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남의 말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하도록 하자. 서평이 구구절절해도, 요점은 이 책을 꼭 읽으라는 말이라는 것. 적어도 가짜가 아닌, 거짓과 인공은 아닌, 드라마가 아닌 다큐로 말하고 살아야지로... 

최근 누구를 만났는데, 자신과 가족에 대해, 뻔히 드러날 수 있고,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것들을 아닌 척하고 포장하여 말하고 있다. 특히, 자신만 옳고 공평하고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면서, 자신의 현 상황이 최고라는 식으로 말한다. 몇 년 전부터 달라진 모습이다. 그래서 불편하여 연중 행사로 만나는데, 이쯤에서 그만 만나야 될까. 어쩌면 너보다 내가 더 나은데 잘난 척 하는 게 싫어서 일까. 우리는 서로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지난 번 이야기와 지금 이야기가 다르게 포장한 거짓말?까지 조금씩 보태면서,,, 사는 게 고만 고만이지, 네가 알고 내가 아는데, 포장을 한들, 유유상종이라는 데, 이런 데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다...    

맹자 공부는 [고자 상편]을 하고 있다. 사는 데도, 공부하는 데도, 일하는 데도 專心致志...

최근 내내 눈을 비비면서 홍상수의 '물안에서'를 보았다. 작금의 세상을 보는 듯하다. 그러면서 그렇게 본 것을 가지고 왈가 왈부하고 있다. 배우를 하겠다던 젊은이가, 아직도 아무 것도 정해진 게 없으면서 영화를 찍겠다고 같은 학교를 다녔던 두 사람과 돌과 바람 많은 섬으로 온다. 경계도 모호하고 시야는 더 더욱 눈을 크게 떠 봐도 별 뽀죽한 수가 없다. 지금 내가 물 속에 있다면, 상상할 뿐이다. 아니, 물 안에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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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 원고지를 앞에 둔 당신에게
금정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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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문장은 그 자체로 완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장을 다른 맥락 속에 위치시킬 때, 다른 문장들과 만나게 할 때, 완벽함이 생각만큼 대단한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10쪽)

언젠가 이탈로 칼비노가 정의한 것처럼,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고,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하기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보다 더 적절한 책은 없다.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다. 프루스트를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프루스트를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 다만 끝까지 읽은 사람이 극히 적을 뿐이다. (40쪽)

그리하여 연필 깎기의 기술은 삶의 기술이 된다. 연필 촉을 완벽하게 가다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평범한 우리들의 삶이다. 어디 그뿐인가. 깎으면 깎을수록 짧아지는 연필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수록 우리의 남은 시간은 점점 짧아질 뿐이다. 그것이 바로 향나무와 흑연의 쌉싸래한 연필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연필을 깎아야 한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야만 한다. (81쪽)

단지 한 권의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평소에 별 생각 없이 스쳐지니가던 이들의 삶에 대해 뭐라도 아는 양 이야기해도 좋은가? 그것은 그들의 땅 뿐만 아니라 이야기까지 빼앗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하자. (114쪽)

배움이란 "자동판매기처럼 동전을 넣으면 ‘자격‘과 ‘졸업장‘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스승이란 삼각김밥처럼 먹기 편하게 포장된 조언과 위로를 건네는 존재가 아니다. 한마디로, 스승은 기성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관계, 차라리 연애에 가까운 무엇이다. 모두가 사랑하는 연예인보다는 나 혼자만 사랑하는 연인이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처럼, 필요한 것 역시 화려한 ‘스펙‘의 멘토가 아닌 나만의 스승이다. (180쪽)

책과 나의 관계를 한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책은 내게 단지 밥벌이에 불과한가? 아마도, 하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엔 얽혀 있는 감정의 역사가 너무 깊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책을 좋아한다고, 나아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하지만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중략) 그 무렵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를 읽었다. 존 레논을 닮은 주인장, 윤성근 씨의 네 번째 책이다. (중략) 그가 주목한 것은 낯모르는 독자들이다. 그들이 책의 면지에 써내려간 짧은 글이다. (중략) 그들의 짧은 사연들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책을 읽었던 마음을, 책과 맺었던 관계를, 그 처음을, 어느덧 까맣게 잊어,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그때의 시간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내 밥벌이의 고단함을 핑계로 점점 무감해져만 가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189-190쪽)

이제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서평이라는 게 소개와 설명을 위해 존재하는 건데 이렇게 어정쩡하게 할 거냐고. 나는 이렇게 대꾸하겠다. 서평을 읽는 게 읽을 만한 책을 고르기 위해서라면 서평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냥 책을 읽으시라고. 나는 다만 "이 책을 읽으세요!"라고 말하고 끝내기에는 이 지면이 너무 넓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말들을 늘어놓았을 뿐이라고. (205쪽)

금: 그렇다면 왜 책을 읽는가?
연: 읽지 않으면 그조차 남지 않으니까.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책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책을 읽어도 좋고 안 읽어도 그만인 사람이 있는 한편 책의 마법에 걸려 다른 세상에, 책들이 사는 세상에 사는 사람이 있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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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삼중당문고 세대라는 표제가 눈에 띄어 집어든 책이다. 빽빽히 적혀있지만 숨벙숨벙 읽힌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음, 음, 음... 온전히 나의 책으로 온 삼중당문고, 을유문고, 서문문고가 기억난다. 몇 권의 책들이 아직도 책 꽂이에 있다. 흰 칼라의 교복을 입고 한 손에는 작은 독서노트,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학교를 오가며 단어도 외우고 시도 외우곤 했던 시절이었다. 교회에서 반주를 하니,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오빠들과 친구들이 마음을 담아 선물로 줬던 삼중당문고도 기억난다. 그들은 잘 살고 있을까... 60년대 대학생도, 청년이 아니라, 80년대 대학생이 되면서 계엄령이 내려지고 과외도 금지되고 그러했던 시대를 되돌아 본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국기게양식으로 길 가다가도 가슴에 손얹고 서 있었던 것, 계기교육을 빠짐없이 행사노래도 불렀는데, 교련복 입고 제식훈련 대회도 하고, 일과 학업을 공부할 수 있는 공장으로 가는 이도 있고, 여자가 대학을 당연하게 가는 일은 아닌 듯한, 교회도 대학부가 만들어졌다는 것(돌아보면, 대학 못 간 친구들이 태반이었는데), 오직 대통령은 그 사람만 당연하다고, 정말 영원히 존재할 것으로 알고 자랐던 시절이었다. 사고의 변혁, 시각의 변화는 무척 어려웠다. 이런 저런 책을 읽었고, 모임도 하고 토론도 하였지만, 너무나 딴 세상이었다. 돌아보니 이도 저도 못한 시절이었다. 세번째 동생 정도가 되어서야 대학생들이 다시 일어났다. 기껏 발령을 받고 전교조의 전신 모임에서 부터 전교조 활동을 했을 뿐, 하다보니 그들도 자기 몫만 챙기고 있어 탈퇴를 했다. 정말로 좋은 사람들도 있지만, 아닌 사람들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손에서 놓지 않았던 책들, 경험하지 못한 과거와 그들의 목소리는 책을 통해 들려오고 있지만 내 삶과의 연결은 여전히 만드는 중이라고 할까. 책 읽기를 이렇게 숨벙 숨벙, 후르룩하고 하다니, 그러니 내 삶과의 연결점이 없는 걸까. 시간이 많이 흘렀다. 과거의 감정에 매몰되기 전에 흘러 보내고 현재를 즐기는 거다. 즐겁게 살자.   


* 좋아하는 사람, 장정일 [삼중당 문고]를 읽으며, 추억을 공유한다. 

열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 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 먹은 삼중당 문고

간행목록표에 붉은 연필로 읽은 것과 읽지 않은 것을 표시했던 삼중당 문고

경제개발 몇 개년 식으로 읽어간 삼중당 문고

급우들이 신기해하는 것을 으쓱거리며 읽었던 삼중당 문고

표지에 현대미술 작품을 많이 사용한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

쉬는 시간 10분마다 속독으로 읽어내려간 삼중당 문고

방학중에 쌓아 놓고 읽었던 삼중당 문고

일주일에 세 번 여호와의 증인 집회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고 교장실에 불리어가, 퇴학시키겠다던 엄포를 듣고 와서 펼친 삼중당 문고

교련 문제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곁에 있던 삼중당 문고

건달이 되어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쓰다듬던 삼중당 문고

용돈을 가지고 대구에 갈 때마다 무더기로 사 온 삼중당 문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삼중당 문고

싸움질을 하고 피에 묻은 칼을 씻고 나서 뛰는 가슴으로 읽은 삼중당 문고

처음 파출소에 갔다왔을 때, 모두 불태우겠다고 어머니가 마당에 팽개친 삼중당 문고

흙 묻은 채로 등산배낭에 처넣어 친구집에 숨겨둔 삼중당 문고

소년원에 수감되어 다 읽지 못한 채 두고 온 때문에 안타까웠던 삼중당 문고

어머니께 차입해 달래서 읽은 삼중당 문고

고참들의 눈치보며 읽은 삼중당 문고

빳다 맞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읽은 삼중당 문고

소년원 문을 나서며 옆구리에 수북히 끼고 나온 삼중당 문고

머리칼이 길어질 때까지 골방에 틀어박혀 읽은 삼중당 문고

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문홍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시공부를 하면서 읽은 삼중당 문고

데뷔하고 읽은 삼중당 문고

시영 물물교환센터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박기영 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

쫄랑쫄랑 그녀의 강의실로 쫓아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

여관 가서 읽은 삼중당 문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와 짜장면집 식탁 위에 올라앉던 삼중당 문고

앞산 공원 무궁화 휴게실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

파란만장한 삼중당 문고

너무 오래 되어 곰팡내를 풍기는 삼중당 문고

어느덧 이 작은 책은 이스트를 넣은 빵같이 커다랗게 부풀어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네

집채만해진 삼중당 문고

공룡같이 기괴한 삼중당 문고

우주같이 신비로운 삼중당 문고

그러나 나 죽으면

시커먼 배때기 속에 든 바람 모두 빠져 나가고

졸아드는 풍선같이 작아져

삼중당 문고만한 관 속에 들어가

붉은 흙 뒤집어 쓰고 평안한 무덤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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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박숙자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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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읽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이고 그들의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과 내 삶을 연결하는 일일 것이다. (6쪽)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이 고백체가 되어야 했던 시대, 그럼에도 귓속말로 전할 수 있는 가족이 귀했던 시대. 이 난민의 경험은 악착같은 생존의 서사로 대한민국의 유전자가 되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잘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나 살아남았단 사실이 마냥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라고 누군가 말해주었으면 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일이라고 말이다. (46-47쪽)

1960년대 청년들의 삶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다. 민주주의를 배우고 학습한 이들에게 4.19혁명 이후의 세계는,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을 정도로 환멸스럽다. "무관심 하라"라는 명령은 위협적인 동시에 억압적이었다. 누군가는 이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무관심하게 굴었는 데 그 모습은 흡사 괴물과 다르지 않았다. 괴물이란 언제든지 발각될 수 있는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잉여인간이다. 괴물의 존재는 이 국가 내에 거주하는 자가 감수해야 할 몫일지도 몰랐다. ( 114-115쪽)

도처에 넘쳐흐르는 헐리우드식 사랑, 그럼에도 몸빼 바지를 입고 억척스럽게 살아내야 하는 일상, 그리고 여공과 식모로 전전하며 소녀 잔혹사를 재현하던 이 시기에 "나는 몰라요"로 일관하는 소녀는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므로 소녀들이 단지 어린 시절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못해 아직도 완구점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무 살 남짓 처녀가 서울 한복판 길거리에서 술 마시는 침팬지를 바라보고 있고, 중학생 소녀는 완구점 불이 꺼질 때까지 그 가게 앞에 서 있었던 사정은 실은 하루키 식 표현대로라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지"라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다시 말해 "여성"이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아니 1960년대 ‘여성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공포스러웠기 때문이다. (152쪽)

삼중당문고는 돈이 없어도 그리고 나이가 어려도 가질 수 있는 책이었다. 내 몫의 책이었고 내 몫의 언어를 흉내 낼 수 있는 거울이었다. 주머니에서, 그리고 책가방이나 손아귀에서 삼중당문고를 놓지 못한 것은 베르테르의 번뇌이거나, 헤스터의 위반, 혹은 갈매기의 꿈 같은 것이었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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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신이 인간에게 읽힐 요량으로 편찬한 책이라 할 수 있다.(10쪽)" 인간은 세상 만사를 아우르기 위해 메타포를 개발한 것이다. "메타포란 A 분야의 경험을 이용하여 B 분야의 경험을 환히 비추는 방법(10쪽)"이다. 이러한 메타포로 인간에게 세상을 읽도록 하기 위한 수많은 방법 중 단연코 책이 으뜸이다. 일회성이고, 되돌릴 수 없는 우리는 책을 통해 인생을 미리 알 수 있다. 세상이 곧 책이라는 메타포를 기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를 1) 여행자로 정의한다. 삶은 여행이다. 마치 세상을 여행하듯 책을 읽는다. 책은 사람이 다양하듯, 온갖 일들이 일어나듯, 천의 얼굴을 가진다. 여행을 어떻게 하는지는 우리의 몫이다. 무늬만 여행을 떠나기 보다, 탐구하는 여행으로 알뜰하게 챙겨서 기억 속에 저장하여 점차 익숙한 모습으로써 우리 삶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 2) 상아탑으로 정의한다. 책이라는 상아탑을 안식처로 삼아 세상과 유리된 자신 만의 공간에서 무한 반복적인 배회를 하고 있을 수 있다. 그 상아탑에서 완전히 나와야 한다. 깊이 있고, 진득하게, 오랜 시간을 들여 심오한 독서를 반복하여 상아탑의 문을 박차고 나와 세상책과 맞닥뜨려야 한다. 우리는 세상을 기반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3) 책벌레로 정의한다. 제발 그대 책벌레들이여, '책 속의 사실'과 '현실'을 너무 꼼꼼하게 비교하지 말아 달라(132쪽)'고 부탁한다. 책 속의 세상과 현실의 세상은 완전히 동일 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의 책을 모두 독파한다고 세상사를 완전히 알 수는 없고, 책은 세상을 비춰주는 도구임을 기억해야 한다. 결론으로 장강명이 말한 세계가 곧 책이고, 삶과 여행과 독서는 모두 똑같은 정도로 심각하고 위험한 행위임을 기억하기다. 그대가 여행을 하든, 상아탑 속에 있든, 책을 씹어 먹고 있던, 책은 읽어야 한다. 특히, 종이책으로... 잘 살기 위해서는, 책은 인생의 등대이므로 책은 계속 읽어야 한다. 'you are what you read(당신이 읽는 것이 곧 당신) (169쪽)'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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