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문장은 그 자체로 완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장을 다른 맥락 속에 위치시킬 때, 다른 문장들과 만나게 할 때, 완벽함이 생각만큼 대단한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10쪽)
언젠가 이탈로 칼비노가 정의한 것처럼,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고,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하기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보다 더 적절한 책은 없다.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다. 프루스트를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프루스트를 한 번만 읽은 사람은 없다. 다만 끝까지 읽은 사람이 극히 적을 뿐이다. (40쪽)
그리하여 연필 깎기의 기술은 삶의 기술이 된다. 연필 촉을 완벽하게 가다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평범한 우리들의 삶이다. 어디 그뿐인가. 깎으면 깎을수록 짧아지는 연필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수록 우리의 남은 시간은 점점 짧아질 뿐이다. 그것이 바로 향나무와 흑연의 쌉싸래한 연필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연필을 깎아야 한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야만 한다. (81쪽)
단지 한 권의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평소에 별 생각 없이 스쳐지니가던 이들의 삶에 대해 뭐라도 아는 양 이야기해도 좋은가? 그것은 그들의 땅 뿐만 아니라 이야기까지 빼앗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하자. (114쪽)
배움이란 "자동판매기처럼 동전을 넣으면 ‘자격‘과 ‘졸업장‘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스승이란 삼각김밥처럼 먹기 편하게 포장된 조언과 위로를 건네는 존재가 아니다. 한마디로, 스승은 기성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관계, 차라리 연애에 가까운 무엇이다. 모두가 사랑하는 연예인보다는 나 혼자만 사랑하는 연인이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처럼, 필요한 것 역시 화려한 ‘스펙‘의 멘토가 아닌 나만의 스승이다. (180쪽)
책과 나의 관계를 한번쯤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책은 내게 단지 밥벌이에 불과한가? 아마도, 하지만 그렇게 넘어가기엔 얽혀 있는 감정의 역사가 너무 깊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책을 좋아한다고, 나아가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하지만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중략) 그 무렵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를 읽었다. 존 레논을 닮은 주인장, 윤성근 씨의 네 번째 책이다. (중략) 그가 주목한 것은 낯모르는 독자들이다. 그들이 책의 면지에 써내려간 짧은 글이다. (중략) 그들의 짧은 사연들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울림을 준다. 책을 읽었던 마음을, 책과 맺었던 관계를, 그 처음을, 어느덧 까맣게 잊어,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그때의 시간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내 밥벌이의 고단함을 핑계로 점점 무감해져만 가는 나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189-190쪽)
이제 당신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서평이라는 게 소개와 설명을 위해 존재하는 건데 이렇게 어정쩡하게 할 거냐고. 나는 이렇게 대꾸하겠다. 서평을 읽는 게 읽을 만한 책을 고르기 위해서라면 서평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고 그냥 책을 읽으시라고. 나는 다만 "이 책을 읽으세요!"라고 말하고 끝내기에는 이 지면이 너무 넓어서 어쩔 수 없이 다른 말들을 늘어놓았을 뿐이라고. (205쪽)
금: 그렇다면 왜 책을 읽는가? 연: 읽지 않으면 그조차 남지 않으니까. 리베카 솔닛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책이 없으면 못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책을 읽어도 좋고 안 읽어도 그만인 사람이 있는 한편 책의 마법에 걸려 다른 세상에, 책들이 사는 세상에 사는 사람이 있다. (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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