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박숙자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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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읽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목소리이고 그들의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과 내 삶을 연결하는 일일 것이다. (6쪽)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이 고백체가 되어야 했던 시대, 그럼에도 귓속말로 전할 수 있는 가족이 귀했던 시대. 이 난민의 경험은 악착같은 생존의 서사로 대한민국의 유전자가 되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잘 살아남아야 했다. 그러나 살아남았단 사실이 마냥 자랑스럽지는 않았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라고 누군가 말해주었으면 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귀한 일이라고 말이다. (46-47쪽)

1960년대 청년들의 삶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다. 민주주의를 배우고 학습한 이들에게 4.19혁명 이후의 세계는,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을 정도로 환멸스럽다. "무관심 하라"라는 명령은 위협적인 동시에 억압적이었다. 누군가는 이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무관심하게 굴었는 데 그 모습은 흡사 괴물과 다르지 않았다. 괴물이란 언제든지 발각될 수 있는 국가 내부에 존재하는 잉여인간이다. 괴물의 존재는 이 국가 내에 거주하는 자가 감수해야 할 몫일지도 몰랐다. ( 114-115쪽)

도처에 넘쳐흐르는 헐리우드식 사랑, 그럼에도 몸빼 바지를 입고 억척스럽게 살아내야 하는 일상, 그리고 여공과 식모로 전전하며 소녀 잔혹사를 재현하던 이 시기에 "나는 몰라요"로 일관하는 소녀는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므로 소녀들이 단지 어린 시절 장난감을 가지고 놀지 못해 아직도 완구점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무 살 남짓 처녀가 서울 한복판 길거리에서 술 마시는 침팬지를 바라보고 있고, 중학생 소녀는 완구점 불이 꺼질 때까지 그 가게 앞에 서 있었던 사정은 실은 하루키 식 표현대로라면 "내가 지금 어디에 있지"라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다시 말해 "여성"이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아니 1960년대 ‘여성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공포스러웠기 때문이다. (152쪽)

삼중당문고는 돈이 없어도 그리고 나이가 어려도 가질 수 있는 책이었다. 내 몫의 책이었고 내 몫의 언어를 흉내 낼 수 있는 거울이었다. 주머니에서, 그리고 책가방이나 손아귀에서 삼중당문고를 놓지 못한 것은 베르테르의 번뇌이거나, 헤스터의 위반, 혹은 갈매기의 꿈 같은 것이었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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