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맘이 바빴다. 부모님을 뵈러갔고, 생일 여행도 다녀왔다. 

양말뜨기는 거의 중독 수준이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잠자는 내내 코 수를 잘 못 세어 다시 풀고 뜨기를 반복하는 꿈을 지금도 꾸고 있다. 몇 십켤레를 떠서 두 세개씩 나눠 주었다. 허즈번은 조끼를 원해 그거까지 마무리 하느라 시간이 지났다.

한코 한코에 그들에 대한 기도도 함께 담았다.  

맹자 공부는 매일 빠짐없이 하면서 책 읽기는 멀리 있었다.

그러면서 오월이 왔다. 

어딘가를 늘 가고 싶어 자유로를 수번 달렸다.

'소설가의 영화'를 보았다.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지속적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홍상수 영화다. '아깝다'라는 말을 다시 인지했다. 

김영하는 도쿄를 허점투성이 카메라, 롤라이35로 찍었다. '롤라이35는 실패작을 양산하는 카메라이다.(186쪽)'

그래서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들이 많이 들어있다. 하지만, 이 사진들을 잘 찍었다, 아니다를 어떻게 말할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를 다시 가고 싶다. 여전히 맘 속에 머물고 있는, 그들의 친절함은 어디까지일까, 하는 의문점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최근 비보이들의 향연을 보고 있다. 매주 기다림이 무지 길다. 아니 기다리기가 힘들어 되풀이 관람 중이다. 진조크루 윙, 리버스크루 피직스, 플로우엑셀 홍텐...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울 수가, 놀라울 따름이다. 

하고 싶은 일은 몸과 마음을 함께 움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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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여행자 도쿄 김영하 여행자 2
김영하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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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의 매커니즘을 의미한다면 도쿄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물과 사물 사이의 거리를 섬세하게 튜닝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도쿄에선 모든 것이 정교하게 세팅되어 있고 주의 깊게 조절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곳에 있고 모든 사물이 마치 행성들이 제 궤도를 따라 공전하듯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96쪽/219쪽)

도시에 대한 무지, 그것이야말로 여행자가 가진 특권이다. 그것을 깨달은 후로는 나는 어느 도시에 가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말을 다 신뢰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들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앎에 ‘갇혀‘ 있다. 이런 깨달음을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도 적용해보면 어떨까? 갇힌 앎을 버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154쪽/236쪽)

도쿄의 번화가들은 기묘하다. 마치 볼륨을 줄인 대형 텔레비전을 보는 듯한 기분이다. 대단히 화려하지만 조용하다. 어떤 억제된 에너지가 착 가라않아 있는 듯한 도쿄의 거리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개인의 존재이다. 도쿄는 근대 이래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문제적 개인들은 포용해온 유일한 도시였다. 무정부주의자, 동성애자, 범죄자, 펑크족, 공산주의자, 테러리스트, 마약중독자들이 도쿄에서 드디어 살 곳을 찾았다. 천황 암살의 뜻을 품고 잠입한 이봉창도 도쿄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임무 시작 전까지 유유히 지낼 수 있었다. (208쪽)

일본인에게는 조화와 적절한 거리, 주어진 공간 안에서 최대한의 만족을 추구하려는 정신이 있다. 그 정신의 문화적 표현이 하이쿠 아닐까? 규칙을 지키면서 제한된 글자 수 안에 최대한의 감수성을 담는 것,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하이쿠 미학의 요체이다. 튜닝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일본이의 정신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게 하이쿠라면, 하이쿠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도쿄의 호텔이다. 도쿄의 호텔들은 대체로 좁다. 그렇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호텔이 호텔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상태를 갖도록 만드는 장인이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든다. (234쪽)

도쿄에서 절과 신사, 미술관과 백화점만 보고 돌아가는 사람은 불운하다. 도쿄에서는 적어도 하루를 들여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작고 아담한 가게들을 순례하는 시간을 가져봐야 한다. 그것은 도쿄가 세계의 여행자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서도 취향과 고집을 가진 인간들이 친절하기까지를 기대하는 것은 본래 무리한 일이다. 오직 도쿄만이 그 예외이다.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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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박완서님의 글을 다시 읽었다. 오타가 있어, 읽는 이야 그 정도는 지나갈 수 있지만, 오히려 저자에게 내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뭐랄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염치, 부끄러움, 공감, 연민들이 고루 버무려져 있다. 특히, 참척을 당한 이의 마음을 곡절히 풀어 헤쳐, 죽은 이를 제대로 보내는 과정은 산 자가 편히 살기 위해서랄까...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일들을,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데도, 안일하고 안하무인 격이다. 정말로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아는 일'들이 도처에 있것만 끝까지 모른척 하고 살 수 있을까... 잘한다고 했는데, 천년만년 오랫동안 잘 살 것 같았는데, 어느새 늙고 아픈 상태가 되어 있다... 죽으면 가져갈 게 아무것도 없는데, 가져갈 수도 없는데, 아둥바둥, 특히 남을 무시하면서, 금방 드러나는 게 뻔한 데도 아닌 척, '부끄러워하고, 대범하게' 살아가야지.  


*대범한: 성격이나 태도가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으며 너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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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범한 밥상 - 박완서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3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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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죽으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눈물이 마르면 침을 몰래몰래 발라가며, 기운이 빠지면 박카스를 꼴깍꼴깍 마셔가며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고, 조상객을 치르고, 노름꾼을 치르고, 거지를 치르고, 복잡하고 복잡한 밑도 끝도 없는 여러 가지 절차를 치르고 복잡한 절차 때문에 웃어른과 아랫사람과 말다툼도 치르고, 차례에 제사에 또 제사를 치른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은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지고 진저리가 나고, 빈털터리가 되고 지긋지긋해지면서 죽은 사람에게서까지 정나미가 떨어진다. 비로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26쪽, 부처님 근처)

지금까지 한두 사람의 노파 이야기는 어느 친구한테 들은 실제로 있었던 노파들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노파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 말고는. 그런데도 굳이 이 두 노파를 한자리에 모시고 싶었음은 내가 발견한 노파들의 어떤 공통점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욕되도록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노파라든가 할머니라든가 하는 중성적인 호칭이 안 어울리는 강렬한 여자다움을 못 버렸었다. 여자라는 것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나는 차마 그들을 노파라고는, 할머니라고는 못 하겠다. 여자라고밖에는. (92쪽,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

나는 나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있게 된 내 아이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당면한 엄청난 고통 중 털끝만한 부피도 덜어 가질 수 없다는 게 부당해서 곧 환장을 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서로 남남끼리요. 사람도 결국은 외톨이라는 걸 받아들이기엔 그 아이는 너무 작고 어렸다. (167쪽, 엄마의 말뚝2)

내 모가지에 마늘 열 접이면 고작인 것을 감히 아파트 한 채를 이고 가려 했으니, 사람이 분수를 모르면 죄를 받는다니까. 그렇지만 아파트 한 채는 지 알고, 내 알고, 하늘까지 아는 일이건만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여넘길 수가 있담. 천벌을 받을 년. (290쪽,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하다 못해 스킨십조차 없는 완전히 남남이었다. 스킨십이라도 있었다면 남편의 정장이가 그렇게 꼴 보기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을 비비는 행동이 끊긴 것과 그의 몸이 그렇게도 보기 싫었던 것이 무관하지 않다면 몸을 비비는 행동이란 그닥 얕볼 일도 아니다 싶었다. 그녀가 오늘 느낀 것은 결코 구체적 욕망이 아니었다. 흔히 등을 긁어준다는 식의 스킨십 정도였다고 해도 그것으로 이 거대한 허전함을 메우고 싶어했다면 그건 욕망보다 크고 아름다운 꿈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가망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그동안 완전히 단절됐던 몸의 만남을 후회하는 마음으로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렇게도돌이킬 수 없는 실수라고는 미처 몰랐었다. (359쪽, 너무도 쓸쓸한 당신)

"(중략) 누군가가 세금을 내니까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애걔걔, 그까짓 쥐꼬리만한 혜택. 이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것들이 털도 안 뜯고 삼켜버리거나 즈이들끼리 왕창 인심쓰는 데 유용하는 액수에대 대면 그까짓 거 조금도 고마워할 거 없다, 너." "쥐락펴락이 아니라 들었다 놨다 한던 인간도 죽으면 이 세상의 있는 것 털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잖아. 그거 하나라도 확실하면 됐지 뭘 더 바라." (394쪽, 대범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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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마다 맹자를 공부한다고 역주를 미리 읽어봤다. 

배울 내용을 한 번씩 써보고 모르는 한자를 찾아서 음을 달고, 해석도 미리 해 본다.

선생님이 불러주는 토를 달고, 따라 읽고, 해석을 듣고, 한 번씩 돌아가면서 읽고 해석하는 시간이 재미있다. 

임금 앞에서 소신껏 말하는 맹자, 그러한 맹자를 불러 자신의 욕심에 맞장구 쳐주기를 원하는 임금... 위정자들은 지금에야 별반 다를 게 없는 거 같다.

인을 중히 여기고, 왕도정치, 성선설까지, 사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백성과 같은 마음이라면, 심지어 정복하는 나라의 백성들이 기뻐한다면 할 수 있다는...

학창시절 한문시간에 배웠던 사자성어들이 난무하다. 


화요일마다 복지관 카페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몇 달간 할 예정이다.


최근에는 대바늘로 양말을 떠서 선물로 줬다. 

조카 대학원 논문 영문초록 적어줬다. 

몸을 가만두지 못한다. 

심심함을 견디지 못한다. 

영어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데, 

영어 성경을 한 번 써보자고 했는데,

모든 게 다짐으로 남는다.  

점점 귀찮음이 넘쳐나고 있다.  

내적으로는 뭘 해 줄께라고 약속을 하고, 외적으로는 부탁을 기꺼이 해 주는, 

그러나,

심심함과 귀찮음의 양극점을 오가고 있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는, 

지금 이 정도도 충분하다,는 마음도 필요한데,

이 부분의 정의를 제대로 내리고 만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수 번의 봄날을 기쁘게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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