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맑은 바람이 분다. 누구의 목소리가 바람이 된 것인가. 또, 누구의 눈빛이 그 바람을 물들인 것인가. 그리고 누구의 내음이 바람에 서린 것인가. 그 바람이 달에게 다가간다. 차고 기우는 달에게 닿는다. 바람은 달과 어울려 벗이 된다. 바람은 달의 숨결을 머금는다. 그리고 바람은 나에게 그 숨결을 불어넣는다. 바람이 나를 채운다. 찬 숨결을 품은 바람이 나를 채운다. 나는 바람에게 묻는다. 어떤 목소리이며, 어떤 눈빛이고, 어떤 내음인지 묻는다. 바람은 답한다. 모든 이의 아픔이라고. 모든 이의 통곡이며, 모든 이의 피눈물이고, 모든 이의 피비린내라고 답한다. 나는 또, 묻는다. 바람이 품은 달의 숨결은 어떤 색인지 묻는다. 바람은 또, 답한다. 핏빛이라고 답한다. 그 계속된 답에, 나는 두려워진다. 그래서 몸서리를 친다. 결국, 바람을 멀리한다. 하지만, 바람을 잊지 못하고 다시 바람을 만난다. 달과 어울린 바람과 만난다. 그리고 또다시 찬바람이 온몸에 찬다.
얼마나 자주 위를 올려다봐야
한 인간은 비로소 하늘을 볼 수 있을까?
그래, 그리고 얼마나 많은 귀가 있어야
한 인간은 사람들 울음소릴 들을 수 있을까?
그래, 그리고 얼마나 많은 죽음을 겪어야 한 인간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죽어버렸다는 걸 알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나의 친구여, 바람 속에 불어오고 있지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네
-'불어오는 바람 속에(Blowin' in the Wind)' 중에서.
밥 딜런은 노래한다. 바람을 노래한다. 그 노래는 풍경(風磬)이다. 바람이 소리가 되었다. 그 소리가 울린다. 깊이 울린다. 깊이 울리는 소리는 진실하다. 그래서 맑다. 반전(反戰)의 맑은 바람. 그것이 '불어오는 바람 속에'이다. 평화의 바람(望)이 맑은 바람(風)이 되었다. 모든 이의 아픔을 담은 그 바람이 높이 외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귀를 막고 있다. 무심히 바람을 스치고 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불어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바람의 노래를 알지 못하고, 그저 옷깃을 여민다. 그래서 노래의 시인은 바람의 노래를 더욱더 부른다. 모든 대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고. 바람에는 모든 이의 통곡과 모든 이의 피눈물, 그리고 모든 이의 피비린내를 품고 있다고. 그렇게 가객(歌客)은 노래한다. 그 맑은 바람은 높은 가락이 되었다.
바람의 소리를 들었다. 울림이 된 바람. 전쟁의 깊은 아픔을 담았기에 소중하다. 진귀한 맛이다. 평화를 위해 요리한 맛. 오랫동안 음미한다.
'바깥에는 불이 폭풍처럼 번지고 있었다. 드레스덴은 하나의 거대한 화염이었다. 이 하나의 화염이 유기적인 모든 것, 탈 수 있는 모든 것을 삼켰다.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걱정하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미국인들과 경비병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하늘은 연기로 시커멨다. 해는 약이 바짝 오른 작은 핀 대가리였다. 드레스덴은 이제 달 표면 같았다. 광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은 뜨거웠다. 그 동네의 다른 모든 사람이 죽었다.
뭐 그런 거지.' -'제5도살장' 중에서.
'제5도살장'은 달이다. 붉은 달이다. 영휴(盈虧)하는 붉은 달이다. 달은 영속성을 가졌다. 차(盈)면 이지러지(虧)고, 이지러지(虧)면 또 찬(盈)다. 그렇게 영원히 순환한다. 전쟁과 평화도 그렇다. 전쟁이 오래면 평화가 오고, 평화가 오래면 전쟁이 온다. 그런데, 전쟁의 아픔이 크다. 이 이야기는 전쟁이 남긴 드레스덴의 아픔을 말한다. '달 표면 같았고', '다른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한다. 빼앗김과 죽음이 함께 날줄과 씨줄로 물든 피. 피의 하늘에, 피의 바다에, 피의 호수에, 피의 술잔에, 피의 눈동자에 붉은 달이 뜬다. 반전의 (反戰)의 붉은 달이 뜬다. 그 붉은 달은 이제 타고 남은 재가 되려 한다.
밥 딜런의 맑은 바람이 커트 보니것의 붉은 달과 어울렸다. 맑은 바람이 하늘에서, 바다에서, 호수에서, 술잔에서, 눈동자에서 달과 어울렸다. 그래서 달의 숨결을 머금었다. 핏빛 숨결을 머금었다.
붉은 달을 보았다. 그 선홍의 핏빛이 나를 감싼다. 나는 그 달을 바라보며, 달맞이를 한다. 바람과 벗한 달. 나도 그 달과 벗이 된다. 붉은 달이 들려주는 모든 이의 아픔을 함께 아파한다. 그리고 평화를 아낀다.
'그는 이미 심각한 실수를 했다. 경솔하게 공포에 굴복했으며, 그가 있는 곳에 머물며 할 일을 하는 것이 유일한 의무인 상황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아이들을 배반하고 자신을 배반했다. 마샤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뉴어크에서 구출하려고 하는 바람에 어리석게도 자신을 훼손했다. 여기에 있는 아이들은 그가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여기는 전쟁 지대가 아니었다. 인디언 힐은 그가 필요하지 않은 곳이었다.' -'네메시스' 중에서.
'네메시스'는 공포와 죄책감을 그린다. 전쟁에서 빼앗김과 죽음의 공포는 누구나 있다. 그리고 그 둘의 부재가 갖고 오는 죄책감도 누구나 있다. 그렇기에 누구나 광기에 물들기 쉬울 것이다. 거역할 수 없는 불운으로 비극으로 닿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네메시스'의 무서운 유행병. 전쟁과 치명적 유행병은 닮았다. 사람을 미치게 할 수 있다. 공포에 미치게 할 수 있다. 죄책감에 미치게 할 수 있다. 미친 사람은 늪이다. 헤어나오기 어렵다. 그리고 음침하다.
밥 딜런의 맑은 바람이 커트 보니것의 붉은 달과 어울렸다. 그 바람은 붉은 달의 핏빛 숨결을 머금고 왔다. 온몸에 차갑게 찼다. 그 냉기에 몸서리를 쳤다. 어쩌면 울고도 싶었는지 모른다. 다행히 울지는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것에 베인 것처럼 많이 쓰라렸다. 차가운 쓰라림이었다.
온몸에 차갑게 찬 공포와 죄책감. 맑은 바람이 달과 어울려 나에게 왔을 때, 그랬다. 전쟁의 아픔을 생생히 속삭였기 때문이었다. 온통 피였다. 그 피가 손에 묻었다.
작년에, 죽음을 맞이하거나 혹은 죽음을 가까이에서 보게 될 이의 통곡을 들은 적이 있다. 한 여인이 서글프게 울었다. 아픈 이들이 많은 곳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아픈 분이셨다. 나도 곧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병은 난치병이었기에 그랬다. 2년 안에 반 이상이 재발한다고 했다. 아버지의 부재. 생각지도 못했다. 삶이 소중했다. 피의 세계는 무서웠다. 그리고 아버지께 죄책감이 엄습했다. 효를 드리지 못한 죄인, 바로 나였다. 이제부터라도 드리려 한다. 벌써 2년째가 다가온다. 함께 있어 드리지만, 아버지의 짐을 덜어 드리지 못하고 있다. 부디 오랫동안 건강하시기 바란다. 아직 아버지와 함께 거닐며, 빛이 스며든 발자국을 여럿 남기고 싶다.
전쟁과 병은 쌍둥이다. 죽음을 불러오고, 소유를 빼았는다. 그래서 아프다. 그 아픔을 이야기한 세 작품을 만났다. 그리고 대화를 나눴다. 그 대화는 나옹 선사의 시구처럼 '맑은 바람 달과 어울려 온몸에 차다'로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밥 딜런의 맑은 '바람', 커트 보니것의 '달', 필립 로스의 '온몸에 차다'였다. 밥 딜런의 '바람(望)'이 '바람(風)'이 되어 커트 보니것의 '붉은 달'과 어울려 필립 로스의 '공포와 죄책감'이 '온몸에 차갑게(冷) 찼(盈)'다. 아버지의 병으로 '공포의 죄책감'이 가까이에 있는 내게 피를 이야기하는 세 작품은 각별했다. 무겁게 침잠했다. 글자 하나하나에 음각과 체온이 느껴졌다. 평화의 외침이 강렬했다. 세상의 평화와 몸의 평화. 싸우지 않고 이겨 얻고 싶은 평화다. 소중했다. 아, 바람이 또 분다. 맑은 바람이 또 분다. 붉은 달과 또 어울린다. 그리고 공포와 죄책감이 또 찬다. 그리고 또 평화를 아우성친다. 높고, 깊게 아우성친다.